메인화면으로
초여름의 수려한 풍광! 시인묵객들 즐겨 찾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초여름의 수려한 풍광! 시인묵객들 즐겨 찾다

2017년 6월 고을학교는 <괴산고을>

6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 제44강은 산수가 수려하고 절경의 골짜기가 즐비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으며, 특히 우암 송시열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충북 <괴산고을>로 갑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화양구곡의 제4곡 금사담. 맑은 물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하여 금사담이다.ⓒ괴산군

고을학교 제44강은 2017년 6월 25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4강 여는 모임)

이날 답사코스는 서울-괴산IC-괴산읍(충민사/고산정/제월대/애한정/홍범식고택)-청안면(청안동헌/읍내리은행나무/청안향교/청안사마소/함이재)-점심식사 겸 뒤풀이-화양구곡(금사담/암사재/우암송시열유적)-선유구곡-쌍곡구곡-각연사-연풍면(연풍동헌/연풍향교)-연풍IC-서울의 순입니다.


▲<괴산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44강 답사지인 <괴산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빼어난 구곡(九曲) 경승지들이 즐비

괴산(槐山)은 한반도 중부 내륙에 있으며 남동부는 높고 험준하며 북서부는 낮은 지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동쪽은 대야산(931m), 조항산(951m), 박달산(825m), 조령산(1,025m), 칠보산(778m), 보광산(539m) 등이 연봉을 이루며 고산지대를 형성하고, 북서쪽은 대부분 500m 이하 구릉성 산지로 하천을 따라 좁은 곡저평야가 발달해 있습니다.

또한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지맥들에서 발원한 작은 물줄기들이 괴강(槐江)으로 흘러가며 화양동, 선유동, 쌍곡, 갈은, 연하, 풍계 등 구곡(九曲)의 경승지를 형성하였으니 옛날부터 이름난 시인묵객이 이곳을 찾아 빼어난 산수를 시로 읊고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특히 화양동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암서재(巖棲齋), 괴강에는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고산정(孤山亭), 박지겸(朴知謙)이 애한정(愛閑亭),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이 취묵당(醉默堂), 연풍에는 장암(丈巖) 정호(鄭澔)가 반계정(攀桂亭)을 짓고 여생을 즐겼습니다.

괴산 지역은 괴산, 연풍, 청안에 각각 읍치구역이 있었으며 연풍동헌인 풍락헌(豊樂軒), 청안동헌인 안민헌(安民軒)과 괴산향교(槐山鄕校), 연풍향교(延豊鄕校), 청안향교(淸安鄕校) 등의 문화유산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각연사(覺淵寺)를 비롯한 여러 고찰과 절터에 산재해 있는 불교유적과 유물이 보물과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화양서원(華陽書院)의 유적, 화암서원(花巖書院), 청안의 사마소(司馬所) 등의 유교문화유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괴산 지역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는 청천을 제외한 괴산, 연풍, 청안 지역이 원래 백제 영역이었다가, 고구려의 영역에 들어간 후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해 신라에 통합되었으며 삼국이 서로 충돌하는 지리적 여건으로 삼국의 전쟁터가 되기도 하였는데 신라 경덕왕 때 괴양군(槐壤郡)으로 불렸습니다.

고려시대(高麗時代)는 995년(성종 14) 지방제도 정비 후에 충주, 청주 등 13주 45현으로 구성된 중원도(中原道)에 속했으나 1018년(현종 9) 충주목의 속군인 괴산군과 속현인 장연현(長延縣), 장풍현(長豊縣) 그리고 청주목의 속현인 청천현(靑川縣), 청안현(淸安縣), 청당현(淸唐縣)으로 구성되었으며 성종 때 시안(始安)이라는 별호를 얻었습니다.

조선시대(朝鮮時代)는 양광도(楊廣道)에서 충청도(忠淸道)로 그 소속이 변경되며 충청좌도(忠淸左道)에 속했는데, 충주목(忠州牧)의 괴산군과 연풍현, 청주목(淸州牧)의 청안현으로 구성되었으며 괴산군은 1403년(태종 3)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되었다가 1413년 다시 괴산군이 되었습니다.

조선말까지 괴산군, 연풍현, 청안현과 충주, 청주 등으로 나누어져 있던 괴산 지역은 일제 강점기에 단행된 지방관제 제정으로 오늘날과 같은 편제를 갖게 되었으며, 1914년 3월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괴산, 연풍, 청안이 합하여 괴산군이 되었습니다.

▲선유구곡 제4곡 연단로ⓒ괴산군

우암 송시열의 화양구곡

화양구곡(華陽九谷)은 화양천을 따라 3km를 거슬러 올라가며 좌우에 명승지가 산재해 있는 계곡으로 넓게 펼쳐진 반석 위로 맑은 물이 흐르고, 주변의 울창한 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암 송시열이 산수를 사랑하여 이곳에 은거한 곳으로,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화양동에 경천벽, 운영담, 읍궁암, 금사담, 첨성대, 능운대, 와룡암, 학소대, 파천으로 구곡의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제1곡은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으며 산이 길게 뻗히고 높이 솟은 것이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듯하여 경천벽(擎天壁)이라 하였으며 이 바위에는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는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제2곡 계곡에 맑은 물이 모여 소를 이루고 이곳에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하여 운영담(雲影潭)이라고 하였습니다.

제3곡은 우암 송시열이 제자였던 효종이 죽자 매일 새벽마다 희고 둥굴 넓적한 바위에 올라 엎드려 통곡하였다 하여 후일 사람들이 읍궁암(泣弓巖)이라 불렀습니다.

제4곡은 맑은 물속에 보이는 모래가 금싸라기 같다하여 금사담(金沙潭)이라고 하였습니다.

제5곡은 경치도 좋을 뿐더러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 미터이고 그 아래 ‘예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는 뜻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고 또한 평평한 큰 바위가 첩첩이 겹치어 있고 그 위에서 성진을 관측할 수 있다 하여 첨성대(瞻星臺)라 하였습니다.

제6곡은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것 같아 능운대(凌雲臺)라 합니다.

제7곡은 바위의 모양이 물가 옆으로 뻗혀 있어 전체 생김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고, 그 길이가 열 길이나 되어 와룡암(臥龍巖)이 하였습니다.

제8곡은 바위산 위에 낙낙장송이 오랜 성상의 옛일을 간직한 채 여기저기 서 있는데, 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 하여 이름을 학소대(鶴巢臺)라 하였답니다.

제9곡은 파천(巴串)으로 개울 복판에 흰 바위가 펼쳐 있으니 티 없는 옥반과 같아서 산수경관을 찾아 이곳에 오는 관광객은 누구나 이 넓은 반석 위에 거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쌍곡구곡 제5곡 쌍벽ⓒ괴산군

퇴계 이황의 선유구곡

선유구곡(仙遊九谷)은 괴산군 송면에서 동북쪽으로 1~2㎞에 걸쳐 있는 계곡으로 퇴계 이황이 현재 송면리 송정마을에 있었던 함평 이씨 댁을 찾아갔다가 산과 물, 바위, 노송 등이 잘 어우러진 절묘한 경치에 반하여 아홉 달을 돌아다니며 9곡의 이름을 지어 새겼다 전하는데, 긴 세월이 지나는 동안 글자는 없어졌지만 절경은 변함이 없습니다.

화양동이 남성적인 아름다움을 보인다면, 선유동은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며 신선이 내려와 노닐던 곳이라는 선유동문(仙遊洞門)을 비롯해 경천벽(擎天壁), 학소암(鶴巢岩), 연단로(鍊丹爐), 와룡폭(臥龍爆), 난가대(爛柯擡), 기국암(碁局岩), 구암(龜岩), 은선암(隱仙岩) 이 9곡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쌍곡구곡(雙谷九谷)은 괴산군 칠성면 쌍곡마을에서 제수리재에 이르기까지 10.5㎞의 구간에 호롱소(沼), 소금강(小金剛), 병암(屛巖 떡바위), 문수암(文殊岩), 쌍벽(雙壁), 용소(龍沼), 쌍곡폭포(雙谷瀑布), 선녀탕(仙女湯), 장암(場岩 마당바위)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천연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보전하고 있는 쌍곡구곡은 산수가 아름다워 퇴계 이황, 송강 정철 등 수많은 유학자와 문인들이 쌍곡의 산수경치를 사랑하여 이곳에서 소요하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전설과 함께 주위는 보배산, 칠보산, 군자산, 비학산의 웅장한 산세에 둘러 싸여 있는데,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이 기암절벽과 노송, 울창한 숲과 함께 조화를 이루며 특히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칠보산과 ‘충북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군자산은 백미라 할 수 있습니다.

갈은구곡(葛隱九谷)은 갈론마을에서 2~3㎞ 남짓 계곡을 따라 거슬러 가면서 펼쳐지는 비경으로, 장암석실(場岩石室), 갈천정(葛天亭), 강선대(降仙臺), 옥류벽(玉溜壁), 금병(錦屛), 구암(龜岩), 고송유수재(古松流水齋), 칠학동천(七鶴洞天), 선국암(仙局岩)이 9곡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암송시열유적ⓒ괴산군

괴산, 연풍, 청안에 읍치구역

청안동헌(淸安東軒)은 청안현의 관아로 1405년(태종 5)에 세워졌다고 전하나 구조기법으로 미루어 볼 때, 19C 후반의 건물로 추측됩니다. 관아건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소박한 건축형식으로 그다지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현존하는 유구가 드물기 때문에 조선시대 관아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청안향교는 조선 초기에 창건된 건물로 추정되며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이고 대성전인 청안문묘(淸安文廟)에는 공자(孔子)를 주향(主享)하고, 공자를 중심으로 양편에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의 4성을 배향(配享)하고, 동벽과 서벽에는 동국18현을 종향(從享)하고 있습니다.

현재의 청안향교 건물은 1979년에서 1981년 사이에 모두 해체 복원한 것으로 대성전, 명륜당을 두고 외삼문에 담장을 둘렀고 입구에 교직사(校直舍), 홍살문, 하마비가 있으며 명륜당의 편액은 1733년(영조 9)에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안사마소는 조선 숙종 때 청안현의 생원, 진사 50여 명이 이미 사마방에 급제하여 1703년(숙종 29)에 사마소를 설치하였다 하며, 청안향교에서 생원시에 합격한 생원과 소과(小科)에 합격한 진사, 그리고 대과(文科)에 급제한 선비를 제명(題名)한 사마재(司馬齋)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마소(司馬所)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즉 사마방에 급제한 자가 50인 이상이 나온 읍에 설치되는데, 그 급제자들이 지방유림으로서 뛰어난 인물이라 하여 후배와 후손들이 제사하며 유학을 강론하고 정치를 의논하던 곳입니다.

지금까지 독립된 건물로 남아있는 사마소는 청안사마소와 옥주사마소(옥천), 경주사마소 등 그 수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연풍동헌은 1628년(인조 6)에 장풍현(長豊縣)이 연풍현(延豊縣)으로 이름이 바뀐 후 1663년(현종 4)에 현감 성희위(成熙胃)가 조령 아래 지금의 연풍면 삼풍리에 동헌을 처음 지었다고 하는데, 이후 건물이 퇴락하여 1766년(영조 42) 현감 이덕부(李德溥)가 동헌의 남쪽에 새로 동헌을 짓고 ‘풍락헌(豊樂軒)’이라 하였습니다.

1912년에 개교한 연풍보통학교가 1920년부터 교사(校舍)로 사용하면서 ‘흥영관(興英館)’이란 편액을 붙였는데, 1965년 중수하고 1972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여 연풍초등학교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연풍향교는 1515년(중종 10) 경에 창건되어 여러 번 중수되었고, 한국전쟁 때 명륜당과 동재, 서재가 소실된 것을 1978년 대성전을 중수하고, 1979년 명륜당 등 건물을 재건하였습니다. 건물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으로 대성전에는 5성 22현을 모시고 춘추로 향사하고 있으며, 이밖에 명륜당과 교직사가 있습니다.

연풍향청(延豊鄕廳)은 본래 조선 초 지방관의 행정을 보좌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유향소(留鄕所)였으나 1489년(성종 20)에 향청이란 이름으로 개칭하고 지방관의 감독 하에 운영되었는데, 풍기를 단속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면장(面長), 풍헌(風憲), 약정(約正) 등을 추천하며 조세, 요역의 부과분배 등의 자문에 응했습니다.

괴산동헌은 조선 초기에 창건되어 여러 번 중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구조는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관청 건물로 사용하면서 변경되어 그 원형을 잃었으며, 근년까지 괴산엽연초생산조합의 관사로 사용해오다가 1996년 보수할 때 동헌 건물로 복원되었습니다.

괴산향교는 조선 초기에 창건되고, 중종(中宗)때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그 후 여러 번 중수하였으며 규모와 형식이 향교의 전형적인 격식과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배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과 동무, 서무,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동재, 서재, 부속 건물로 고직사(庫直舍) 등이 있습니다. 지금의 명륜당은 1569년(선조 20)에 지었는데, 1647년(인조 25)에 중건하였으며, 1683년(숙종 9년(1683)에 중수하고, 1981년에 크게 보수하였습니다.

봉서재(鳳棲齋)는 사설교육기관으로 달리 ‘백운서당(白雲書堂)’으로도 불리는데, 1778년(정조 2)에 창건된 것으로 전하고 1915년 중수되었으며 어린이들을 위한 서당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방학을 이용한 한자교육과 의성 김씨 종중의 제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많은 각판이 걸려있는 애한정ⓒ괴산군

애한정과 만동묘

애한정(愛閑亭)은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왕을 의주까지 호가(扈駕)하여 그 공으로 별좌(別座)에 올랐다가 광해군 때 낙향한 박지겸(朴知謙)이 1614년(광해군 6)에 지은 학재(學齋)인데, 1674년(현종 15)에 그의 손자인 박연준(朴延俊)이 군수 황세구(黃世耉)의 도움을 받아 새로 짓고, 숙종, 영조 연간에 여러 번 중수하였으며 최근에는 1979년에 중수하였습니다.

이 정자에는 ‘애한정(愛閑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안에는 1614년(광해군 6)에 애한정주 박지겸이 지은 <애한정기(愛閑亭記)>와 <애한정팔경시(愛閑亭八景詩)>를 비롯하여, 1674년(현종 15)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애한정이창기(愛閑亭移創記)>와 <제애한정기첩후(題愛閑亭記帖後)>, 1712년(숙종 38)에 조천(鳥川) 정당(鄭棠)이 지은 <애한정중수기>, 1718년(숙종 44)에 송병선이 지은 <애한정중수기>, 1820년(순조 20)에 박의화가 지은 <애한정게판기> 등 많은 각판이 있습니다.

만동묘(萬東廟)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유교(遺敎)에 따라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1704년(숙종 30)에 건립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견한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던 곳입니다.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는 만동묘의 사적을 기록한 비로 1814년(순조 14) 이재(李縡)가 비문을 짓고, 안진경(顔眞卿)체에서 집자하여 세웠습니다.

1917년 일제가 만동묘의 제사를 금지하고 이를 반대하는 유림을 구속하였으나 유림에서는 춘추계(春秋契)를 조직하여 몰래 제사를 지냈는데 일제는 1937년에 이들을 체포하고 위패와 제구를 불사르고 묘정비를 징으로 쪼아 훼손하더니 1942년 건물을 불사르고 묘정비를 땅에 묻어버렸습니다.

▲홍범식고택ⓒ괴산군

위세 당당했던 화양서원

화양서원(華陽書院)은 1696년(숙종 22)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되었으며 창건되던 해에 사액(賜額)을 받고 1716년(숙종 42) 어필(御筆)로 편액(扁額)을 달았습니다.

전국의 사액서원(賜額書院) 중에서도 가장 이름 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제수전(祭需錢)의 봉납을 강요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의 폐단으로 좌의정 김좌근(金佐根)의 주청으로 1858년(철종 9)에 폐쇄되고 1870년(고종 7)에 건물이 헐렸다가 2004년 송자사, 승삼문 2동을 복원하였습니다.

묘정비(廟庭碑)는 1716년(숙종 42)에 건립되었으며,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복 후 찾아 다시 세웠는데, 비문은 윤봉구(尹鳳九)가 짓고, 전자는 옥편(玉篇)체에서, 비문은 안진경(顔眞卿)체에서 집자한 것입니다.

암서재(巖棲齋)는 1666년 건립됐는데, 우암 송시열이 만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여 화양동에 은거할 때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화양구곡 중 제4곡 금사담 옆 절벽 위에 있는데 주위의 바위 사이에는 노송이 울창하고 밑으로는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르며 층암절벽이 장관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권상하(權尙夏)가 쓴 <암서재기(巖棲齋記)>에 “우암 선생이 병오년에 계곡 남쪽에 정사를 신축하였다(庵先生於丙午年間築精舍於溪南)”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1666년 암서재를 신축하고 이곳에 거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산정(孤山亭)은 괴강(槐江)이 내려다보이는 제월대(霽月臺) 옆에 있는데, 조선 선조 때의 명현(名賢)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을 때 이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1596년(선조 29) 만송정(萬松亭)과 고산정사(孤山精舍)를 짓고 광해군 때 낙향하여 이곳에 은거하였습니다.

정자에는 이원(李元)이 쓴 ‘고산정(孤山亭)’이란 현판과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1606년(선조 39)에 쓴 ‘호산승집(湖山勝集)’이라는 편액, 그리고 명나라 사신 웅화(熊化)가 1609년(광해군 1)에 쓴 <고산정사기(孤山精舍記)>가 있으며 <고산정사기>는 명문으로 이름이 드높습니다.

취묵당(醉墨堂)은 1662년(현종 3) 백곡 김득신(栢谷 金得臣)이 만년에 세운 독서재(讀書齋)입니다. 김득신의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 구석산인(龜石山人)으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의 손자입니다. 영감과 직관을 통해 자연의 생명을 조화롭게 읊은 시가 으뜸이라고 칭해지고 있으며 김득신이 이곳에서 <사기(史記)>의 ‘백이전(伯夷傳)’을 1억 1만 3천 번 읽었다고 하여 일명 억만재(億萬齋)로도 불립니다.

노수신적소(盧守愼謫所)는 조선 중기의 명신(名臣)인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이 유배되었을 때 거처하던 곳입니다. 노수신은 1543년(중종 38) 문과에 급제하여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같이 독서당(讀書堂)에 뽑혀 함께 학문을 연구하다가 을사사화(乙巳士禍)로 관직에서 파면되어 순천, 괴산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선조 즉위 후 복직되어 후에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이 건물은 노수신이 1545년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순천, 진도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괴산으로 옮겨져 1565년(명종 20)부터 2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괴산 연하동(煙霞洞)에 있던 적소인데 괴산수력발전소 댐을 만들면서 물에 잠기자 1957년 현 위치로 옮겼으며 건물명을 수월정(水月亭)이라고 하여 그대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순국지사 홍범식고택

홍범식고택(洪範植古宅)은 173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고가입니다. 경술국치에 항거하여 자결 순국한 항일지사 일완(一阮) 홍범식(洪範植) 선생의 고택이자 괴산 3.1만세시위를 준비한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홍범식(洪範植)은 구한말의 순국열사(殉國烈士)로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 본관은 풍산(豊山)이며 1888년(고종 25) 진사에 합격하고,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는데,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이후 자결한 민영환(閔永煥)을 존경하던 중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소식을 듣고 망국을 슬퍼하며 벽 위에 ‘국파군망 불사하위(國破君亡 不死何爲)’자를 써 놓고 목매어 자결하였습니다.

충민사(忠愍祠)는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의 주장(主將) 충무공(忠武公) 김시민(金時敏)과 문숙공(文肅公) 김제갑(金悌甲)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입니다.

김시민의 자는 면오(勉吾),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고 1591년(선조 24) 진주판관이 되었으며 이듬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을 때 진주목사(晋州牧使)로 사천, 고성, 진해에서 적을 격파하고 영남우도병마절도사(嶺南右道兵馬節度使)에 올랐으며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였고. 선조 37년(1604)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김제갑의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본관은 안동으로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에 올랐으며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 관군과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하였고,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부인 이씨도 순절하였는데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습니다.

김시민은 진주 충렬사에 제향되었으나 1866년(고종 3) 훼철되어 김제갑의 충열사에 합사하였는데 1976년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충민사를 세웠습니다.

함이재(咸履齋)는 조선 초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낸 이암(梨菴) 장륜(張倫)의 묘소 옆에 제향을 위하여 지은 건물로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수 없으며 대청, 부엌 등의 구조와 평면구성이 민가의 서당형식과 매우 흡사한 제실 건물입니다.

▲각연사 전경ⓒ괴산군

사연 깊은 각연사

각연사(覺淵寺)는 신라 법흥왕(法興王) 때 유일대사(有一大師)가 세웠다고 전해지며 <창건유래기(創建由來記)>에는 “법흥왕 때 어느 대사가 쌍곡리에 절을 지으려고 목수를 시켜 나무를 다듬고 있는데 까마귀 떼가 날아와서 나무 조각을 물고 날아가길 자주하므로 이상하게 생각한 대사가 그 까마귀 떼를 따라가 보니 깊은 산골에 있는 연못 속에 나무 조각을 떨어뜨려 연못을 살펴보니 그 속에 석불이 앉아있어 그 곳에 절을 세우고 ‘각유불어연중(覺有佛於淵中)’하였기 때문에 절 이름을 각연사(覺淵寺)라 했다”고 합니다.

각연사에는 비로자나불좌상, 비로전, 대웅전, 통일대사부도, 통일대사탑비 등 많은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림사(空林寺)는 신라 경문왕(景文王) 때 자정선사(慈淨禪師)가 수도하던 암자에 경문왕이 선사의 인물됨을 알고 국사(國師)의 존호(尊號)와 주석(住錫)하는 절에 이름을 지어 ‘공림사(空林寺)’라 쓴 현판을 내렸다고 합니다.

조선 정종(定宗) 원년에 함허당 득통화상(涵虛堂 得通和尙)이 폐사된 절을 중창하고 주석했으며 이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대웅전만 남고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인조(仁祖)때 중창했으나, 1950년 6.25전에 공비(共匪)들이 절에 출몰한다는 이유로 토벌군에 의해 전소되어 폐사되었던 것을 1965년 박삼주 스님이 극락전과 요사를 재건하였고, 1981년부터 13년간 탄성스님이 중건하였습니다.

공림사에는 부도(浮屠), 사적비(事蹟碑), 석조(石漕), 일주문(一柱門) 등의 유물이 있으며, 중건 때 세운 대웅전, 관음전, 삼성각, 감인선원 등 건물이 있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바지), 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이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 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