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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유라시아의 합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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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유라시아의 합작품'이다

[유라시아 견문] 계몽의 변증법-교학상장

1. 중국의 충격 : 親中과 反中

동쪽의 선비들이 서쪽의 과학에 매혹되었다면, 서방의 문인들이 찬탄해마지 않은 것은 동방의 인문주의였다. 기독교에 의탁하지 않고도 고도의 문명국가를 이룬 나라가 있었다. 유럽의 몇 배에 달하는 영토와 인구를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이념과 제도가 훌륭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물질적으로도 더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기까지 했다.


기독교 신도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사태였다. 유일사상 체제를 동요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그 중국문명의 성취가 최신의 것도 아니라고 했다. 성서가 쓰여 진 시점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문명국가의 꼴을 갖추었던 것이다. 창세기의 천치창조론을 부정하는 각종 기록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성경을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믿었던 신앙에 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지중해를 맞대고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이슬람문명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충격이었다. 청천벽력,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중국 위협론'의 기원이다.

백가쟁명, 백화제방이 펼쳐졌다. 17~18세기 유럽의 걸출한 사상가들이 친중파와 반중파로 나뉘어 공론장을 달구었다. 위성척사파도 있었다. 유교는 사교이고, 신이 없는 중국은 사탄의 나라라고 했다. 절대자 없이도 윤리적인 인간과 도덕적인 사회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기독교문명과 중국문명의 상통성에 주목하는 중간파도 있었다. 중국인도 노아의 자손이며, 유교 경전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방의 하느님(天)이 서방의 하나님(God)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위정척사파와 서도동기론이 공히 기독교 내부의 입장 차이라면, 아예 기독교 밖으로 튀어나간 급진파도 있었다. 서구의 개화파이다. 이들은 유교 문명이 기독교 문명보다 더 앞선 것이라고 여겼다. 절대자에 순종하지 않고도 고도의 문명을 구가해 온 중국이 더 진보한 형태의 통치라고 접수했다. 신을 믿지 않더라도 도덕적 인간과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사회과학도 출현할 수 있었다.

▲ '유럽의 공자' 프랑수아 케네. ⓒwikipedia

최초의 경제학자 프랑수아 케네는 '유럽의 공자'라고 불렸다. 즉 급진개화파들은 중국을 모델로 삼아 유럽을 개혁하고자 했다. 전면적인 중국화, 전반동화(全般東化)를 외친 것이다.


그 "탈구입중"(脫歐入中)의 기수로 볼테르를 꼽을 수 있다. 종교에 구애됨 없이 세속정부를 운영하는 중국의 정치야말로 장차 유럽이 가야할 길이라고 했다. 그래야 구교국가와 신교국가로 아웅다웅하는 유럽의 고질병도 고칠 수 있었다. 철두철미 계몽주의로서 천하국가를 모방해야만 유럽통합이 가능하다고 여긴 것이다. 그럴수록 예수회 선교사들이 번역한 중국 관련 서적들을 탐하듯 읽어재꼈다. 그러고 보니 그리스의 현자들도 중국의 성현들처럼 기독교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소크라테스와 세네카의 반열에 공자와 맹자를 추켜올린 것이다. 중국 같은, 조선 같은, 월남 같은 나라를 만들자!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

볼테르의 이 유명한 언설 또한 서방의 제자백가 출현을 호소하는 절절한 발화였던 것이다.

2. 공맹과 계몽

17~18세기 중국학 열풍이 처음은 아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하여 호기심이 바짝 달아오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진국을 맛보는 차례였다. 한문을 습득하여 사서삼경을 독파한 마테오 리치가 상징적이다. 중국 문명의 정수를 익힌 예수회 선교사들이 속속 유교 경전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구텐베르크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유럽의 개별국가 언어로도 번역되어 갔다. 즉 서구의 성경만 자국어로 읽는 종교개혁만 있던 것이 아니다. 동방의 성경도 동시에 읽어나가는 '탈-종교'개혁도 있었다.


<대학>이 처음 번역된 것은 1592년이다. 핵심 개념인 '明德'(명덕)을 'Humanae Instituionis Ratio'라고 풀었다. 인간 교육의 원리쯤으로 옮길 수 있겠다. 理는 ratio(이성)로, 性은 natura(자연, 본성)로, 德은 virtus(덕)으로 옮기면서 성리학의 세계에 입문한 셈이다. 그 합리주의의 초석을 닦은 공자에 대한 책도 발간되었다. <중국의 철학자, 공자>가 출판된 것이 1687년이다. 입문 단계를 지나 심화 과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의 재상이었던 장거정의 <사서직해>(1573)에 근거한 책이기 때문이다. <四書直解>는 주자학의 개념과 체계를 계승하면서도 송-원-명에 이르는 500년의 절차탁마를 거쳐 독자적인 관점을 덧붙인 개신 유학서였다. 그 최신 이론이 극동에서 극서까지 옮아가는데 100년의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선교사가 불철주야로 옮겨 썼던 <사서직해> 필사본은 오늘날 파리국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공자>가 지식인의 필독서로 꼽히면서, 중국학 번역서에 대한 수요도 크게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1711년 프라하에서 출간된 <중화제국의 육고전(六古典)>(Sinensis Imperii Libri Classici Sex)이 유명하다.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주자의 주석에 충실했다는 점이다. 주희가 세운 신유학의 체계,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이 비로소 제대로 소개된 것이다. 무엇보다 <맹자>의 번역이 눈에 띈다. 혁명을 설파하는 불온서적이었다. 왕보다 인민이 위에 있다는 주권재민을 설파했다. 군주가 천명을 방기하고 민생을 보살피지 않으면 그 작자를 방벌하고 추방시켜야 한다는 서릿발 같은 기상을 처음으로 접한 것이다. 나아가 성선설을 통하여 원죄론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인의예지의 존중으로부터 인권과 민권에 눈을 뜬 것이다. 교황과 군주에서 벗어나 '새 정치'를 궁리하던 유럽의 개화파들에게 참신하고 청신한 가르침이었다.


전위에 선 이는 라이프니치이다. 송명의 '이학(理學)'으로부터 유럽의 이성(Reason)을 도출해냈다. 남다름이라면 <공자>에 소개된 <주역>의 궤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복희씨의 음과 양으로 전개되는 태극세계가 신통하고 방통하다고 여겼다. 이로부터 고안해내 낸 것이 2진법이다. 극동의 음과 양이 극서의 0과 1로 진화한 것이다. 2진법이란 현재 컴퓨터 기술의 근간이 되는 기초 이론이라 하겠다. 동방 고전 <주역>과 21세기 인터넷 사이가 그리 멀지 않은 셈이다. 이처럼 다른 문화와 철학의 융합을 골똘하게 궁리한 끝에 라이프니치는 모나드론이라는 독자적인 세계주의 사상을 확립한다. 다만 중국 경전을 직접 인용하며 논의를 전개한 경우는 드물었다. 하더라도 표절로 깍아내릴 것까지는 없겠다. 주체적 포섭, 창조적 융합으로 평가해주고 싶다. 말년에 집필한 마지막 저서가 <중국자연신학론>(1716)이었음이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그가 평생을 거쳐 수집한 중국 도서 60여권은 하노버대학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번역되는 족족 죄다 모았지 싶다.

▲ 하노버 라이프니치대학교. ⓒ이병한

라이프니치를 계승한 이로는 크리스티안 볼프(Christian Wolf)가 있다. 독일의 초기 계몽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다른 문명을 이해하고자 하는 개방적 태도를 이어받았다. 1679년생, 소싯적부터 마을에서 신교(루터교)와 구교가 다투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30년 종교전쟁의 후과로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생활한 것이다. 양자가 불화를 그치고 조화를 이루는 보편 이론으로 수학 연구에 매진했다. 그러다 2진법과 음양론이 상통하는 라이프니치를 접하며 중국사상에 입문한 것이다. 그 또한 <육고전>을 비롯하여 구할 수 있는 모든 중국 관련 서적을 독파했다.


▲ 크리스티안 볼프. ⓒwikipedia
1721년, 볼프는 당시 독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던 할레(Halle)의 마틴 루터 대학의 학장 임기를 마치고 기념 강연을 연다. 총장을 비롯해 1천명 관중 앞에서 사상적 커밍아웃을 했다. 공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하는 인물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보다 인민의 복지를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하여 천하를 주유하며 사상을 확립한 공자를 더 높이 친 것이다. 계몽주의의 정수로서, 합리주의의 지존으로서 공자를 추킨 것이다. 강연장은 곧장 아수라장이 되었다. 구교도 신교도 이구동성으로 볼프를 맹비난했다.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망발이고 막말이었다. 파장과 파문은 대학 밖까지 미쳤다. 프로이센 국왕에까지 일러바친 것이다. 군주 또한 격노했다. 공맹은 자신의 목을 겨누는 비수가 될 수 있는 불온 사상이었다. 국기문란에 국가보안법이 가동되었다. 교수형에 처하든가, 나라 밖으로 떠나라고 명령했다. 상아탑도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주지 못한 것이다. 볼프는 결국 망명객이 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계몽의 출발은 공맹이다. 고독하지만은 않았다. 유럽의 신청년들이 볼프에 열광한 것이다. 우상에 맞서 이성을 세운 '시대의 은사'로 모셨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선사해준 것이다. 그가 할레 대학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에 러시아제국의 표토르 대제까지 솔깃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 아카데미의 부총장으로 모시겠다는 파격적 제안을 한다. 하지만 볼프는 칩거를 선택했다. 천상 학자, 글로써 저서로써 승부를 보고자 했다. 고별 강연이 된 <중국인의 실천철학> 초고에 4배 분량의 주석을 덧붙인 <중국 실천철학 강연>을 출간한다. 오로지 자연법, 이성의 힘으로 도덕국가를 확립할 수 있음을 논증해 보이려 했다. 그것도 고대 그리스처럼 도시국가 수준이 아니라 제국적 지평에서도 가능함을 중국이 보여준다고 역설한 것이다.


"고대 중국의 황제는 나라를 잘 통치해야 했기에 그에 앞서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리고자 했다. 가정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에 앞서 자신의 몸을 잘 단련시켜야 했다. 자신을 몸을 잘 단련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각부터 연구해야 했다. 감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태도부터 갖추어야 했다. 올바른 태도를 갖추기 위해서는 지력부터 완성시켜야 했다." <중국 실천철학 강연>의 한 대목이다.

눈치 빠른 이들은 단박에 <대학>의 8조목을 차용한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이상론과 격물치지의 방법론이 독일어로 번안된 것이다.

볼프를 '시대의 은사'로 모셨던 제자 가운데 비르핑거(Georg Bernhard Bilfinger)가 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고 또 정치가였다. 독일 철학사의 '라이프니치-볼프 철학'이라는 학술 용어를 처음 고안해낸 사람이기도 하다. 친중파를 독일 계몽주의의 적자로 확립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장본인이다. 그 비르핑거를 청년 시절부터 열독한 인물이 바로 칸트이다. 일생토록 고향 쾨니히스베르크(오늘날 러시아의 칼리닌그라드)를 떠나지 않았던 칸트였지만, 그의 정신세계만은 극동까지 활짝 열려 있었다. 라이프니치가 <주역>에 빠져들었다면, 청년 칸트를 매혹시킨 것은 <중용>이었다. 비르핑거가 1724년 간행한 <고대 중국인의 도덕과 정치>에서 <중용>을 처음 접했다. 특히 중용 6장, 순임금의 지혜에 탄복했다.


子曰 舜其大知也與 舜好問而好察邇言 隱惡而揚善 執其兩端 用其中於民 其斯以爲舜乎

"공자 말씀하시되, 순임금은 매우 지혜롭도다. 순임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묻기를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아주 일상적인 말도 그냥 넘기지 않고 잘 생각해 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나쁜 점은 묻어 주고, 좋은 점은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양극단을 파악하여 그 가운데를 취하여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사용했다. 이러한 점이 순임금다운 점이다."

▲ 중용의 사상가, 칸트(고향 칼린그라드의 동상).ⓒ이병한
'執其兩端 用其中'(집기양단 용기중)! 청년 칸트는 눈이 번쩍 뜨였다 전통 논리학의 배중률을 돌파할 수 있는 새 길이 보이는 듯 했다. 배중률은 참과 거짓 사이에 제3의 영역은 없다는 원칙이다. 시시비비를 명백하게 가리도록 시비를 거는 논리이다. 따라서 완전한 참도, 완전한 그릇도 아닌 중간 영역이 부재하다. '기우뚱한 균형', 그 중간 항을 개척하는 것이 칸트의 평생 과제였다. 선악논리,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진리의 정도 여부를 따지는 발상의 전환을 이룬 것이다. 그래서 완성한 저술이 바로 그 유명한 비판 3부작이다.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 비판>(1790). 이 세 저작은 <중용>의 독일어 해설서이자 최신판 주석서이기도 했던 셈이다. 실제로 이성, 비판, 실천, 판단 등 기본 개념에서부터 성리학 냄새가 물씬하다. 칸트의 비판은 비난이 아니다. 일방에서 타방으로의 공격을 뜻하지 않는다. 양자의 중간에서 서로 대립하는 양자를 공평하게 음미하는 것이다. 남에게 들이대는 바로 그 잣대로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비판이다. 너의 일리(一理)와 나의 일리(一理) 사이에 합리(合理)를 찾는 것이다. 비판 3부작은 공히 공평무사와 공명정대로 일관되었다.


<중용>과 조우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도 더욱 두텁게 읽을 수 있었다. 용기는 무모와 비겁의 중간이다. 무모는 과다한 것이며, 비겁은 과소한 것이니 어느 쪽도 덕이라고 할 수 없다. 어느 쪽에 치우쳐도, 치우친 것은 결국 모자란 만 못한 법이다. 즉 덕이란 양자 사이의 균형을 취하는 데 있다. 그 중간 또한 항상 똑같은 것이 아니다. 역동적인 균형, 중용을 취해야 한다. 고로 중용은 기계적이고 평균적이지 않다. 창조적이고 예술적이다. 비판이 곧 중용이고, 중용이 곧 비판이다. 비판적 중용, 중용적 비판이라고 하겠다. 즉 이율배반의 논리를 넘어서 진리의 법정을 세우고자 했던 칸트의 필사적 노력은 <중용>의 근대화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고로 칸트 또한 동시대 연암과 다산과 그리 멀지 않는 서양의 군자, 서사(西士)로서 대접해야 마땅하다.


칸트를 이은 거물은 헤겔이다. '이성적인 것은 곧 현실적인 것(理卽性)이요, 현실적인 것은 곧 이성적인 것(性卽理)이다.'라는 <법철학>의 서문부터가 성리학의 변주였음이 확연하다. 즉 유럽의 계몽주의 또한 자가발전, 내재적으로 발전했던 것이 아니다. 'Made in Eurasia', 동서 문물 교류, 융복합과 통섭의 소산이었다. 마치 뉴턴이 이슬람문명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가 근대과학의 법칙을 세운 것처럼, 칸트와 헤겔은 중화문명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근대철학의 원칙을 이룬 것이다. 유라비아와 유라시아가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빛나는 결정체였다.

3. Post-Truth, Post-West : "執其兩端 用其中"

역사는 승자가 쓴다. 한때의 국지적인 승자가 사피엔스의 세계사를 온통 고쳐 썼다. 아편전쟁 이후의 사태이다. 공자 열풍은 까마득하게 잊혀졌다. '서구의 충격'이 '중국의 충격'을 지워버렸다.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도 올챙이 적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중국이 아니라 그리스에서만 서구 근대의 기원을 구하는 대서사가 확립되었다. 고대-중세-근대라는 진보사관도 정립되었다. 실증사학을 표방한 독일의 랑케를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 후예인 막스 베버와 칼 마르크스는 좌/우로 갈라졌으되, 동방 문명을 높게 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본주의도 민주주의도 사회주의도 출현할 수 없는 동양은 역사가 정체된 곳이었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산 자의 몫은 먼저 간 자를 올바르게 기리는 것, 역사 바로 세우기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서양사' 자체가 가짜 역사(Fake History)이다. 그 대타항으로 세워진 동양사 또한 거짓말이다. 르네상스부터가 지중해 건너 서아시아의 충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슬람이 그리스 고전을 유럽에 전수해주었다. 유럽과 아라비아의 공진화, 유라비아의 합작품(Made in Eurabia)이었다. 계몽주의 또한 인도양 건너 동아시아의 충격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선교사들의 중국 고전 번역으로 탈주술화와 합리화, 소위 '근대화'에 진입하게 된 것이다. 즉 유럽과 아시아의 공진화, 유라시아의 합작품이었다. 고로 자폐사관에 갇혀 있는 유럽사는 물론이요, 자학사관과 자만사관을 오고갔던 아시아사 또한 전면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동양사와 서양사를 가르고 담을 높게 쌓아둔 분과학문 자체가 '거짓 지식'을 구조적으로 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세말의 교회인양 조선말의 서원인양, 대학의 위기가 운운되는 것이다. 탈서구, 탈진실 시대. 이제야 서세동점의 초입기, 메이지유신을 주도하며 서구문물 번역에 앞장섰던 이들의 거개가 유학자였다는 사실이 이해가 된다. 이성, 양심, 지각, 형이상, 형이하 등이 대저 유교 경전에서 비롯한 개념들이었다. 중국에서 변법자강운동을 펼치며 계몽사상을 전파했던 학자들 역시도 서구의 과학(Science)을 '격치'라고 번역했던 바이다. 격물궁리, 격물치지에서 따온 말이다. 경전을 소리 내어 읽으며 몸으로 각인시켰던 그들 또한 어쩐지 기시감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어디선가 이미 읽었던 것 같은 느낌, 영어와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적힌 문장이 왠지 익숙한 느낌.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착시가 아니었다. 유라시아 극동의 학문이 극서로 이동하여 숙성된 뒤 재가공 되어 되돌아온 것이었다. 즉 19~20세기 동아시아의 서구 번역은 재번역이자 이중번역이었다. 중역(重譯)의 사상이었다.


2017년 유럽을 견문하노라니, 재차 중국이 유럽의 사상적 과제로 부상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주요 도시와 대학마다 공자학원이 들어서고, 자유주의/민주주의 없이도 초강대국의 지위로 올라선 중국에 대한 논쟁이 다시금 치열하다. 기독교 없이도 문명국가가 가능하단 말인가? 에서 서구화=근대화=민주화 없이도 강대국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로 달라졌을 뿐이다. 중국을 타산지석 삼아 유럽의 장래를 논구하는 17~18세기의 풍경이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속세의 자유주의 근본주의자들이 반중파로 결집해 있다면, 바티칸의 교황이 친중파의 최전선에 서 있음이 역설적인 변화라고 하겠다. 천주교는 진화했건만, 계몽교는 도리어 정체되었다.


꼬박 100년 전 <서구의 몰락>(1918)을 펴낸 이가 문명사학자 슈펭글러였다. 유럽의 도시와 도시를 잇는 기차에서 틈틈이 읽어나가고 있다. 2018년에 읽어야 훨씬 실감에 와 닿는 SF 역사서, 아니 예언서이다. 그러나 서구의 몰락 다음이 동양의 시대라는 자기 최면은 극구 피해야 할 것이다. 동인가, 서인가 라는 구획 자체가 진부하고 식상한 것이다. 양극단을 배제하고, 중용을 취하라 일컬었던 칸트의 비판 정신을 깊이 되새긴다. 한 손에는 자사의 <중용>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칸트의 <비판>을 쥔 채 동서고금을 횡단하고 주유하는 탈주의 모험을 감행해야 하겠다.

정녕 우리가 알고 있는 과거는 한줌이다. 고로 과거는 박제된 화석이나 유물이 아니다. 항상 팔팔하게, 펄떡거리며 살아 숨 쉬며 진화한다. 그래서 오늘이 바뀌면 당장 과거사부터 달라지는 것이다. 미래만큼이나 역사 또한 거듭 재창조되는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다른 백년 또한 다른 천년사의 서술에서 출발할 것이다. 하기에 역사에 종언이 있을 리 만무하다. 20세기형 자유민주주의 또한 인류의 마지막 제도일 리가 없다. 도리어 끝물에 들어선 것 같다. 또 한 번의 '앙시앙 레짐'이 붕괴하고 있는 모습을 파리에서 지켜보았다. 구(舊)민주주의의 아성, 프랑스의 장미 대선 현장으로 간다.

▲ 중국의 철학자 공자.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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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

20대는 사회과학도였다. 서방을 선망했고, 새로운 이론의 습득에 골몰했다. 30대는 역사학자였다. 동방을 천착하고, 오랜 문명의 유산을 되새겼다. 자연스레 동/서의 회통과 고/금의 융합을 골똘히 고민했다. 그 소산으로 1000일 <유라시아 견문>을 마무리 짓고 40대를 맞이했다. 개벽학자이자 지구학자이며 미래학자를 지향한다. 인간 이전의 자연적 진화는 물론이요, 인간 이후의 자율적 진화에, 인간만의 자각적 진화를 두루 아울러야, 지구의 진화에 일조할 수 있는 미래학자의 자격이 갖추어진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공진화, 하늘과 땅과 사람의 공진화, 생물과 활물과 인물의 공진화, 만인과 만물과 만사의 공진화, 개벽학과 지구학과 미래학의 공진화, 이 모든 것을 아울러 깊은 미래(DEEP FUTURE)를 탐구하는 깊은 사람(Deep Self), 무궁아(無窮我)이고 싶다. www.byeongh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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