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교체됐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9년 만의 정권 교체, 민주 정부 3기의 시작입니다.
새 정부에 거는 국민의 큰 기대는 높은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로 나타납니다. 지난 9년간의 퇴행에 신음한 각계가 새 시대로의 전환을 기대할 겁니다. 유독 대통령 공약에 관심이 높은 사회 분위기가 이를 반영합니다.
문화·출판계도 마찬가지일 듯합니다. 초유의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검게 물든 정부의 문화·출판 정책에 대대적 변화를 바라는 목소리가 큽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해당 분야 정책은 큰 틀에서 유사했습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큰 원칙이 유지되었습니다. 문재인 정부도 이 점에서는 이전 민주 정부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미 대선 후보 시절부터 이전 민주 정부의 큰 틀을 따르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표지 너머 책 세상'은 새 정부 출판 정책에 거는 기대의 목소리를 정리해 봤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집권기 어느 하나 위기 아닌 분야가 없었습니다. 출판 분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블랙리스트 사건과 송인서적 부도 사태는 위기의 출판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였습니다.
'표지 너머 책 세상'은 문 대통령의 대선 당시 공약을 정리해 보고, 이를 바탕으로 출판계가 바라는 새 정부의 출판 정책을 정리했습니다. 물론, 이들 정책을 정부가 모두 수용하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출판계의 요구가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책과 가까운 지식 사회로 나아가는 데는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를 겁니다.
지난 17일 오후 서울 마포구 출판문화연구소에서 열린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와 이홍 한빛비즈 편집이사의 대담을 정리했습니다.
문 대통령, 독서 리더가 되어 주길
-큰 국민적 기대를 업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출판계가 새 정부에 거는 기대도 남다를 듯합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당시와 이명박, 박근혜 정부 당시를 비교하면, 적어도 문화·출판 분야에서는 민주 정부 시기가 훨씬 좋은 세상이었다는 이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문 대통령의 대선 당시 공약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크게 정리하자면, 문 대통령의 문화·출판 정책 방향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와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을 이전 민주 정부와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도 밝혔습니다.
문 대통령의 출판 관련 주요 공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철저 진상 조사-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독립성 보장-완전 도서정가제 적용에 원칙적으로는 동의하나, 출판계 합의가 우선-출판 관련 창작기금은 다른 분야와 형평성을 고려해 책정
출판계로서 아쉬운 건 출판 정책과 관련한 구체적 공약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사실 이는 문 대통령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한겨레>가 대선 당시 주요 대선 후보에게 문화·출판 공약 질의서를 보낸 바 있는데요, 대부분 후보의 관련 공약은 다른 분야에 비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이 분야가 정치, 경제 등 다른 현안에 비해 유권자의 관심을 크게 얻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직 문재인 정부 1기 내각이 출범하지도 않은 상황이라 이른 감이 있습니다만, 우선 문 대통령 공약에 관한 두 분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이홍 : 공약만으로 구체적 정책상을 그리기는 어렵습니다. 내각이 출범하고 문화, 예술, 출판 등 관련 정책이 구체화 되어야겠죠.
사실 역대 정부의 출판 정책 중 제대로 된 정책이라고 부를 만한 게 딱히 없습니다. 정부나 정치권 입장에서 출판이 정책 우선순위가 아니었습니다. 출판계가 정치권에 구체적 관심을 요구할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장은수 :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출판계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 종사자 중 이 원칙을 거부하는 이는 없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문 대통령에게 바라는 점 하나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독서 리더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미국의 경우, 오바마 전 대통령이 휴가 때마다 독서 리스트를 발표해 대중 독서 열기에 불을 지핀 바 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책을 가까이 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어릴 적부터 책을 가까이 한 문 대통령도 독서 리더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홍 : 사회 지도층의 책 읽는 모습이 일반 대중에 미치는 정서적 영향은 크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도 상당한 애독가였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영향은 잠시뿐이었어요. 책 읽는 대통령의 모습은 대단히 바람직하지만, 그 자체가 본질적인 촉매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공공도서관 살찌우자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출판인회의, 한국작가회의, 책읽는사회문화재단 등 20개 출판·문학 관련 단체는 지난 3월 29일 새 정부에 바라는 '출판 진흥을 위한 6대 정책 제안'을 발표했습니다. 이 정책이 대체로 출판계의 바람을 정리했다고 보고, 해당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공공도서관 확충 제안이 있습니다. 향후 10년 내 공공도서관을 2015년 말 현재 978개에서 3000개로 늘리고, 도서관의 연간 도서구입비도 3000억 원으로 증액해달라는 내용입니다. 왜 공공도서관을 늘려야 하나요?
장은수 : 공공도서관의 절대 수가 적습니다. 인구 5만 명당 1개 꼴입니다. 미국은 인구 2만 명당 1개, 프랑스는 1만5000명당 1개의 공공도서관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웃 일본도 4만 명당 1개의 도서관을 확보하고 있죠.
공공도서관이 보유한 장서 수도 매우 부족합니다. 일본의 경우, 공공도서관 수는 많지 않지만 보유 장서는 한국의 두 배 정도입니다.
공공도서관이 많아야 국민의 보편적 도서 접근권을 확보 가능합니다. 돈이 없어서, 혹은 거리가 멀어서 지식과 정보 접근권이 떨어지는 국민을 최소화하는 건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공공도서관이 성인에게 2차 교육기관 역할을 하는 기구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한국 성인이 시민으로서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평생 얻을 수 있는 공적 채널을 더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공도서관은 지역 사회 시민 문화의 근간으로서 풀뿌리 민주주의 강화에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함양하기 위한 공적 인프라를 더 확충하는 건 중요합니다.
공공도서관을 읍면동 단위에 하나씩 빠짐없이 확보한다고 가정하면, 그 수가 3000개입니다. 정책 목표치가 나온 근거입니다.
이홍 : 물론 이는 장기 목표치입니다. 우선 지역별 획일적인 공공도서관 확대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각 지자체마다 지역민의 연령대 분포, 직업군 등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고령 인구가 전체 주민의 70%가 넘는 지역에 공공도서관을 설립한들, 출판계 기대를 충족할 효과를 내긴 어렵습니다. 공공도서관 운영 예산 확보도 어렵습니다. 태부족한 지자체의 예산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지자체의 재정 자립도가 낮으니, 결국 상당한 비용을 국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공공도서관 신설보다 더 중요한 건 기존 도서관의 도서구입비 확보입니다. 한국 공공도서관 예산 중 도서구입비 비중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 수준입니다. 반면 일본의 경우 도서구입비 비중이 매우 크죠. 한국 공공도서관의 국민 1인당 장서량은 1.75권인데, 일본의 절반 수준에 불과합니다. 공공도서관이 책을 살 돈을 확보하지 못하니, 전적으로 출판사의 기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운영 중인 도서관의 정상화부터 요원한 게 현실입니다.
(*국가도서관통계시스템에 따르면 지자체별 공공도서관 도서구입비는 2014년 604억 원에서 2015년 550억 원으로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는 OECD 최저 수준이다.)
미래 도서관 형태가 기존 종이책 중심의 대여 모델에서 지식과 정보를 교류하는 지역 정보문화센터 형태로 바뀐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장서 자료의 디지털화는 앞으로 더 급속히 진행될 겁니다. 공공도서관 확대가 무조건 종이책 환경에 우호적이리라는 기대는 무모합니다.
공공도서관 확대가 당장 어렵다면 정부, 공공기관, 공기업 등이 가진 유휴 공간 등을 특화된 북센터 등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점의 대형화, 복합화가 반드시 정답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고 특색 있는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면, 시민의 삶과 책의 밀착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장은수 : 도서구입비 확충이 중요한 건 맞습니다. 지난해 한국 출판사가 낸 책이 약 6만8000종인데, 한국 공공도서관이 연평균 구입하는 장서 수는 9000종 수준입니다. 참고서 등을 제외한 수치를 약 3만 종으로 잡는다손 쳐도, 공공도서관이 확보 가능한 책은 신간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 비중을 키우려면, 공공도서관 도서구입비가 연간 3000억 원은 되어야 할 겁니다. OECD 평균 수준이죠.
-정부에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것 아닐까요. 공공도서관이 책을 많이 보유하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출판사 책을 더 팔기 위해서라고 정리되어 버린다면 큰 지지를 얻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장은수 : 공공도서관이 책을 더 확보할 능력을 갖춘다면 어떻게 될까요. 적어도 상당수 신간마다 연 1000부의 판매를 출판사가 확보할 수 있다면, 그만큼 출판사는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더 다양한 책을 출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책의 다양성이 커지면, 우리 사회 지식 기반도 더 탄탄해집니다. 공공에 도움이 되는 길이죠.
독서 총괄 정책 집행 필요할 때
-독서, 출판 관련 정책을 총괄하는 가칭 ‘독서출판국’을 문화체육관광부 산하에 신설하고, 총괄 집행 조직으로 가칭 '독서출판진흥위원회'를 설치하라는 요구도 있습니다.
장은수 : 간단히 말해 그간 분리되었던 도서관 정책국과 출판 정책국을 통합하자는 겁니다. 현재 문체부 산하에 독서·출판 관련 실은 크게 3개 실로 나뉘어 있습니다. 문화예술정책실은 창작·독서·도서관 정책을 담당하고 콘텐츠산업실은 출판을 담당하는 식입니다. 각 분야에 적용되는 법도 제각기 다릅니다. 문학 정책은 문학진흥법 적용 대상이고, 독서는 독서진흥법, 출판은 출판진흥법 대상입니다. 이러니 통합적 정책 수립·집행이 불가능합니다.
지난 달 5일, 국회에서 '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는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새 정부 출판 산업 진흥안을 논의하는 토론회였습니다. 당시 나온 이야기 중 공통점을 하나만 꼽자면 '출판 진흥기구의 정상화'입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출판 관련 진흥기구가 오히려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정부의 도구로 전락했는데, 이들 기구가 실질적으로 국민 독서율을 끌어올릴 수 있는 정책 기관으로 성장해야할 것입니다.
-현재 정부 산하의 출판문화산업진흥원, 콘텐츠진흥원, 문학번역원 등이 각자 나뉘어 있다면, 현 상태로는 출판 진흥이 부족하다는 거죠?
장은수 : 그렇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독서출판국이 관련 총괄 업무를 시행하죠. '책 읽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토론회에서 유은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 같은 방향으로의 개편을 논의해보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출판사 지적재산도 보호하자
-출판계는 판면권 보장과 사적복제보상금제, 공공대출권제 신설도 요청했습니다. 도서구입비 세제 혜택, 공공기관의 상업출판·EBS-수능 연계 출제 금지도 요구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죠. 우선, 판면권에 관해 이야기해봐야 할 듯합니다.
장은수 : 음악과 비유하자면, 판면권은 저작인접권으로 설명 가능합니다. 저자의 저작권뿐만 아니라, 판면을 편집한 출판사 권리도 지적재산으로 인정하자는 거죠. 세계적으로 판면권을 도입한 나라는 많습니다.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저자뿐만 아니라 출판사의 노력도 분명 들어갔으니까요.
현재 한국 출판계에는 판면권 개념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다른 회사의 출판물을 가져올 때, 출판계는 자율적으로 규율합니다. 이를 법적으로 명확히 해 출판사 권리를 보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공대출권제는 어떤 개념인가요?
장은수 : 책의 공공재적 성격, 지식재산 성격을 인정해 공공도서관이 시민에게 책을 빌려줄 때 책 대여에 따른 이익이 출판사와 저작권자에게 배분되도록 하자는 겁니다. OECD 26개국이 공공대출권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책을 빌릴 때마다 국가가 출판사와 저자에게 대여료를 지급하죠.
이홍 : 우리가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를 때 저작권자에게 일정액의 돈을 노래방 이용요금에 포함해 지불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만 책은 노래와 다릅니다. 책에 담긴 정보는 공익적인 사회 자산 개념이 강해요. 이 때문에 공공대출권제는 그 정당성과는 별개로, 우리 사회 정서상 쉽게 수용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공공 지식의 값어치를 얼마나 중요하게 볼 것이냐는 우리 사회의 합의가 있어야만 적용 가능합니다.
장은수 : 아직 공공대출권제 도입이 쉽지 않다면, 방송사에서 시를 낭송하거나 소설의 구절을 소개할 때 출판사에 이용료를 지급하도록 강제하는 방안을 조속히 강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방송사가 음악을 소개할 때 돈을 지불하듯, 출판 저작물에 관해서도 그리 해야 합니다.
-사적복제보상금은 어떤 개념인가요?
장은수 : 개인이 출판물을 복제함에 따라 출판사와 저작권자에게 끼친 손해를 보상하도록 하자는 겁니다.
-대학가에서 복제물을 이용하는 경우가 아직 많긴 하죠. 하지만, 이를 일일이 찾아내서 보상하도록 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장은수 : 그래서 보상액을 미리 책정에 출판사에 주도록 하자는 게 사적복제보상금입니다. 정확히는, 복사기나 스캐너 등 잠재적으로 사적 복제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는 도구에 출판사 손해액을 일부 산정해 저작권자 등에게 지급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겁니다. 간단히 말해 출판 플랫폼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실제 외국 여러 나라에서 도입한 제도입니다.
완전 도서정가제 도입할 때
-무엇보다 출판계가 가장 중요하게 요구하는 정책은 완전 도서정가제 도입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전에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만, 완전 도서정가제 도입 여부는 출판계 내에서도 의견이 조금 갈리는데요.
장은수 : 현재로서는 원론적 차원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서정가제 없이는 지역 서점의 존립이 불가능합니다. 그만큼 독자 부담이 커졌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출판사와 서점은 이를 상쇄하기 위해 다양한 상품과 독서모임 제공 등의 새로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완전 도서정가제를 도입할 때입니다.
이홍 : 사실상 '15% 할인제'인 현 도서정가제가 장기적으로는 완전 정가제로 가야한다는 건 여러 이견에도 불구하고 출판계 내에 합의된 지점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시장이 어렵다보니 도서정가제 비판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재가격정책(할인정책)을 취할 여지를 완전히 닫아버리는 건 곤란합니다.
우선은 합의가 쉬운 부분부터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일정 규모 이상의 북 페어 등에 참여하는 출판사는 자율적으로 책 가격을 조정할 여지를 줄 필요가 있어요. 독자에게도, 출판사에도 이런 기회가 필요합니다. 정부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출판과 서점이 합의안을 만들어오라는 것이지요. 정부의 정책 탄력성에 맡길 문제가 아니라 출판계 스스로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완전 정가제도 아니면서 정가제 때문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몹시 부끄럽습니다.
-출판계는 초중고교에 '독서' 과목 신설도 요구했습니다.
이홍 : 독서 프로그램을 활성화해 독서율을 높이자는 생각에는 당연히 찬성합니다. 하지만, 학교에 독서 과목을 정규화하자는 의견에는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독서 인구를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릴 때부터 독서 습관을 길러주는 겁니다. 제도로 강제한다고 독서 인구가 늘어나지 않습니다. 정부가 취할 길은 국민 독서 습관을 강화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지, 수업으로 이를 강제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교육 여건상 모든 교과목은 반드시 그에 따른 평가를 수반합니다. 독서 과목이 만들어진다면, 학생의 독서 능력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자칫 잘못하면 사설 논술학원만 키우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한국의 모든 교육 정책은 필연적으로 사교육과 연결되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교육 제도의 대전환을 통해 평생 독서 습관을 붙이고 학생에게 의무가 아닌 재미를 얻는 방법을 찾아야지, 섣불리 독서를 과목화한다면 학생의 독서 염증과 공포만 키울 뿐입니다.
장은수 : 학교에서 독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원칙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독서를 가르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정부와 학교가 고민할 일은 학교에 다양한 독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학생의 독서 습관을 키우는 겁니다. 'OO대 추천 고전 200선' 식의 리스트를 만들어 학생에게 독서가 악몽이 되게끔 강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저는 학교보다 대중 매체에 독서 관련 프로그램 편성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중파가 공공 지식을 뒷받침할 독서 관련 프로그램 제작에 인색합니다.
예산 지원은 긴 안목으로
-결국 앞서 이야기한 모든 정책의 실현을 위해서는 예산이 마련돼야 합니다. 출판계는 출판 예산 증액과 진흥기금 조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용 예산에는 한계가 있고, 정책 우선순위라는 걸림돌도 있습니다. 기존 예산을 더 효율적으로 활용할 방법도 현실적으로 고민해야 할 듯 싶습니다.
이홍 : 출판 정책은 기금 쪼개주기, 생색내기가 아니라 시장과 저변을 키우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현재 출판은 과포화 상태입니다. 다수 출판사에 푼돈을 나눠주는 게 진흥 정책의 골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 세종도서사업의 경우, 기껏 개별 출판사에 연 1000만 원 어치 책을 사주는 정책에 불과합니다. 기금을 쪼개다보니 이렇게 되죠. 이제는 출판기금이 미래를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출판계도 대승적 차원에서 정부를 바라봐야 합니다. 지금 출판의 위기는 책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시장에 좋은 책이 나와도 책이 돌지 않아서입니다. 정부는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출판 인프라 개선에 기금을 투자하고, 출판계도 기금이 거시적으로 사용되게끔 해야 합니다.
독서 등 문화 활동과 지역이 연계된 소비에 대한 세제 혜택도 중장기적으로 연구가 필요합니다. 독일의 바이로컬 정책처럼 지역 경제 활성화 등으로 연결시킬 수 있습니다. 지역의 특성을 살리는 지역 출판 환경 조성과 지원에 기금이 관심을 가졌으면 합니다. 지역 대학 및 연구소, 기업 등과 연계되는 프로그램과 사업 활성화도 필요합니다.
예민한 문제이긴 합니다만, 출판 관련 기관의 독립성과 신뢰받는 리더십 구축, 운영 모델 변화도 필요합니다. 기존 정부 산하 조직이 개별 출판사의 신뢰를 잃었다는 지적을 아프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장은수 : 기존 기금을 잘 쓰는 것도 물론 중요합니다만, 더 근본적 문제는 출판 관련 기금의 절대 금액이 너무 적다는 겁니다. 약 330억 원 정도 되는데, 이 중 세종도서 구입 예산액만 142억 원입니다. 나머지 예산의 대부분은 당연히 진흥원 인건비입니다.
결국,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 사주는 것밖에 없죠. 적은 금액으로 할 수 있는 정책 자체에 한계가 뚜렷하니까요. 절대예산 증액이 우선 필요한 이유입니다.
우리 출판 진흥을 위해 정부가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우선 기금을 확충한 후, 이 기금으로 선진 유통 시스템을 구축하는 겁니다. 도서 관련 정보 인프라가 전무합니다. 한국은 책의 유통 정보가 아예 없는 거의 유일한 OECD 국가일 것입니다. 우선 출판 유통 정보가 쌓여야 합리적 출판 산업 정책 마련이 가능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9년의 보수 정부보다 책에 훨씬 가까운 정부일 것입니다. 당장 청와대에 들어서는 이들의 면면만 봐도 책에 가까운 인물이 많습니다. 그만큼 청와대가 출판 현실을 잘 이해하리라 기대합니다. 부디 좋은 정책으로 한국 출판·독서 현실을 개선 가능한 5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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