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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울창창 맑은 숲! 장쾌한 지리 주능선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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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울창창 맑은 숲! 장쾌한 지리 주능선에 서다

2017년 6월 백두대간종주 10구간 <지리산권역 노고단구간>

백두대간학교(교장 이철승, 백두대간전문가) 2017년 6월 산행은 제70강으로 백두대간종주 10구간입니다. 6월 17일(토), <백두대간 지리산권역 노고단구간>입니다.

백두대간학교 제70강 2017년 6월 산행은 백두대간종주 열 번째 산행입니다. 백두대간학교는 2016년 9월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으며, 참가자 전원이 2016년 9월 <천왕봉 구간>, 10월 <벽소령 구간>, 11월 <금산 구간>, 12월 <만복대 구간>, 2017년 1월 <수정봉 구간>, 2월 <고남산 구간>, 3월 <봉화산 구간>, 4월 <중재 구간>, 5월 <백운산 구간>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완주했습니다.

▲벽소령이 기다린다.ⓒ백두대간학교

[산행지안내]
백두대간학교 제70강 2017년 6월 산행은 백두대간종주 열 번째 산행입니다. 산행일은 6월 17일(토), <백두대간 지리산권역 노고단구간>입니다.

백두대간종주 6월 산행은 국립공원 봄철 산불방지기간 탐방금지로 이어가지 못한 벽소령에서 성삼재까지의 <노고단구간>을 찾아갑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고개에 올라 천왕봉으로 이어진 장쾌한 지리의 주능선을 걷습니다. 흔히 말하는 지리산종주 구간입니다. 함박꽃 은은한 향기와 함께 울울창창한 맑은 숲을 걷는 일정입니다. 신록이 뿜어내는 명징함이 가득한 6월, 어머니의 산 지리산, 지리의 주능선에서 바람결에 실려 오는 마고할미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리종주의 대미를 완성합니다.

▲노고단 가는 길ⓒ백두대간학교

[구간소개]
-산행월일 : 2017년 6월 17일(토)
-산행출발 : 2017년 6월 16일(금) 오후 11시
-산행코스 : 성삼재-노고단-반야봉-삼도봉-토끼봉-연하천-벽소령-음정마을
-산행거리 : 약 22.7km(도상거리)
-소요시간 : 약 11시간
-난 이 도 : 상중(★★✫)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월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어머니의 산’이라고 불리는 지리산은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입니다. 경상남도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과 전라남도 구례군, 전라북도 남원시에 걸쳐져 있으며 최고봉인 1,910m의 천왕봉에서 성삼재로 이어지는 주능선은 약 29km에 이르고, 천혜의 원시림을 간직한 칠선계곡을 포함해 아흔아홉 계곡을 실핏줄처럼 거느리고 있습니다. 또한 요즈음 걷기 좋은 길로 각광을 받고 있는 지리산둘레길은 총 길이가 274km에 이릅니다. 6월 백두대간학교는 장중한 지리산의 주능선, 그 부드러운 품속으로 들어갑니다.

삼한(三韓)시대 진한의 세 장수가 지켰다는 성삼재에서 알싸한 새벽 공기와 함께 지리의 넓은 품으로 발을 디딥니다. 성삼재탐방지원센터를 지나 노고단으로 오로는 길은 넓은 임도로 이어져 있습니다. 삼삼오오 나란히 걸어도 넉넉한 길이 노고단까지 이어집니다. 검푸른 미명 속, 발을 옮기는 발자국 소리에 숲속의 새들이 소란해지기 시작합니다. 여명을 밝히는 새들의 이야기가 귀 속으로 내려앉습니다. 여러 가지 새들의 합창을 들으며 시나브로 걷다 보면 노고단대피소의 불빛이 아른거립니다. 대피소의 불빛을 뒤로하고 취사장을 돌아 노고단고개로 향합니다. 노고단고개까지는 돌로 쌓아 만든 가파른 오르막입니다. 헉헉 가쁜 숨을 내쉬며 올라서면 노고단고개입니다.

▲노고단에서 반야봉과 천왕봉을 보다.ⓒ백두대간학교

손에 닿을 듯한 반야봉 뒤로 장중한 지리산의 주능선을 수평선 삼아 장엄한 일출이 서서히 연출됩니다. 노랗고 붉은 여명이 동녘하늘을 시시각각으로 뒤바꿔 놓으며 수줍게 홍조를 띤 아침을 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동녘하늘에서 잠시 눈을 돌려 노고단을 올려다봅니다. 오전 10시부터 개방하는 노고단을 눈에 담습니다. 노고단으로 향하는 탐방로의 계단 위로 노고단의 돌탑이 아스라합니다. 5월 노고단이 진달래의 평원이라면 6월 노고단은 원추리의 평원입니다. 아침이슬을 머금은 샛노란 원추리는 청초함 그 자체입니다. 원추리군락의 일렁임과 여명의 홍조로 아쉬움을 달래고 천왕봉으로 이어진 주능선으로 들어갑니다.

지리의 주능선은 원시림처럼 울창한 숲이 반겨줍니다. 숲의 정령들이 소곤소곤 인사하며, 맑고 청량한 숲의 기운을 나누어 줍니다. 왕시루봉갈림길을 지나면 곧 돼지령입니다. 돼지령에서는 구름의 바다가 반겨줍니다. 구례와 하동으로 이어지는 섬진강이 만들어주는 운해(雲海)입니다. 구름위에 둥둥 떠다니는 산들은 마치 다도해를 연상합니다. ‘지리십경’ 중 하나인 노고운해(老姑雲海)를 돼지령에서 대신합니다.

피아골갈림길을 지나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시원하고 달큰한 샘물을 내어주는 임걸령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옹기종기 모여 아침식사 나눕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다시 배낭을 여밉니다. 노루목을 지나 반야봉갈림길까지는 완만한 능선이 이어집니다. 반야봉갈림길에서 선두그룹은 반야봉을 다녀옵니다.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벗어나 있는 1,732m의 반야봉에 올라 마고할미와 반야의 이야기를 듣고 갈림길로 돌아와 지리의 주능선에 올라서면 삼도봉입니다.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가 만나는 삼도봉에는 뾰족한 창 같은 표지석이 삼도의 경계를 알리고 있습니다. 넓은 아름 위에서 잠시 다리쉬임하고 화개재로 향합니다. 나무계단을 정신없이 내려서면 화개재입니다. 화개재에서 왼쪽으로 내려서면 뱀사골계곡입니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조금씩 그 고도를 높입니다. 완만한 오르막이 계속됩니다. 토끼봉 아래 팔백능선 계곡은 남부군 이현상이 최후를 맞이한 곳입니다. 가슴 아픈 동족상잔의 비극은 어느새 전설이 되고 무심한 바람에 나뭇잎만 살랑거립니다. 꽃이 진 철쭉군락으로 이어진 능선길을 따라 무심한 발길을 이어갑니다. 총각샘을 지나 명선봉에 올라서면 곧 숲속 나무계단길이 이어집니다.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연하천대피소입니다. 연하천에서 점심식사로 산행의 허기를 날리고 재충전합니다.

연하천대피소와 작별하고 다시 마루금으로 발길 이어갑니다. 심정산갈림길을 지나 형제봉에 섭니다. 촛대봉, 제석봉,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또렷합니다. 천왕봉을 가슴에 담고 산길을 재촉하면 작고 앙증맞은 빨간우체통이 반겨주는 벽소령입니다. 벽소령에서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지리의 맑은 기운을 담아봅니다. 6월 청명함과 명징한 지리의 기운을 가득 담고 벽소령에서 지리의 주능선, 백두대간의 마루금과 작별합니다. 벽소령에서 음정마을로 이어지는 임도로 내려섭니다. 가파른 돌길을 조금 내려서면 음정으로 이어진 너른 임도와 만나게 됩니다.

음정마을까지 이어지는 임도 길은 지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주의해야 합니다. 음정마을로 이어지는 심심한 길을 약 2시간 정도 내려서면 커다란 백두대간 표지석이 있는 음정마을주차장입니다. 이곳에서 지리산과 인사 나눕니다. 버스를 타고 마천으로 이동합니다. 장거리 산행의 피로를 지리산흑돼지와 시원한 막걸리 한 잔으로 날려버립니다. 함께한 도반들과 못 다한 산행의 이야기 나누며 지리산 종주의 완성을 자축합니다.

함께 걷는 백두대간학교는 도반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학교입니다. 혼자 걸으면 나만의 길이 되지만, 함께 걸으면 모두의 희망이 됩니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두륜산이자 어머니의 산 지리산, 노고단에서 벽소령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의 장쾌함 속으로 떠나는 6월 백두대간학교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마고할미상ⓒ백두대간학교

[산행계획]
여유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여러 전문가이드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 그리고 중간에서 함께 하며 평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6월 16일(금) 오후 11시
23: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역 2번출구)
23:30 사당역 공영주차장 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출구)
23: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출구)
23:5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승차장
6월 17일(토)
01:05 경부고속도로 신갈(하행)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4:20 성삼재 도착/산행 준비 & 스트레칭
04:30 성삼재 출발
05:20 노고단대피소
05:30 노고단고개
06:10 돼지령
07:00 피아골갈림길
07:10 임걸령 – 아침식사
08:00 반야봉갈림길 – 선두는 반야봉 다녀옴
08:20 삼도봉
08:50 화개재
09:20 토끼봉
10:30 총각샘
11:00 연하천대피소 – 점심식사
12:10 삼정산갈림길
12:40 형제봉
13:30 벽소령
15:30 음정마을 – 산행 마감/스트레칭 - 버스 이동
마천흑돼지촌(경남 함양군 마천면/055-962-6689)
지리산흑돼지삼겹살과 막걸리로 뒤풀이
17:30 마천 출발
20:30 서울 도착(예정)
*상기 시간 일정은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백두대간종주 10구간 <노고단구간> 산행도Ⓒ백두대간학교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자켓,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아침-행동식, 점심-도시락 등

▲함박꽃을 만나다.ⓒ백두대간학교


▶백두대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2017년 7월 백두대간종주 11구간 산행 안내]
-산 행 지 : 백두대간 백운산권역 영취산구간
-산행일시 : 2017년 7월 15일(토) - 무박 산행
-출발일시 : 2017년 7월 14일(금) 오후 11시
-산행코스 : 무령고개-영취산-민령-깃대봉-육십령
-산행거리 : 약 11.8km
-소요시간 : 약 7시간
-난 이 도 : 중중(★✫)
*상기 일정은 현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산행자료]
[지리산(智異山)]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887년) 최치원 선생의 쌍계사의 진감선사 비문에 등장하는 ‘智異山’이다. 다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가 최초인데 <삼국사기>의 기타 기사에도 地理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오늘날과 같이 智異山으로 표기되어있다. 고려시대 이후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으로 개인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들에 의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데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덕산(德山),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다.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 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과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다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곳이다.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은 <청학동 변증설>에서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말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진 배경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권역에 자리하였던 것이다.
국토의 남쪽에 크게 둥지를 틀고 있는 지리산의 입지적 무게는 중심지에 대한 변방지역의 독립성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장소성을 띤다. 따라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견지에서는 반역지의 속성이 있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기도 했다. 구산선문의 2개 산문이 지리산에서 일어난 통일신라 말 불교의 변혁과정도 그랬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운동도 그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리산의 호칭이 불복산, 반역산이라는 것도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에 대한 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드러내어 주는 단면이다.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과 의로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재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해, 조종도, 정인홍, 김효원, 최영경 등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 등의 위정척사운동과 3월 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 모성적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지리산 이름의 뜻
1. 신라 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智異山이라 하였다.
2.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4.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지리산과 역사적 인물
지리산은 경남의 산청, 함양, 하동군과 전북의 남원시, 전남의 구례군에 걸쳐 있으면서 오만 가지 삶을 아우르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 20여 개가 펼치는 산자락 둘레만도 800여 리에 이르는 산답게 많은 시인 묵객들의 작품을 낳기도 했다.
고운 최치원을 시작으로 고려 때는 이인로, 조선시대에는 서경덕, 김종직, 김일손, 정여창, 남명, 서산대사 등이 지리산에 올랐다가 느낀 바를 작품으로 남겼다.
고운은 지리산 곳곳에 글과 글씨를 남기고 가야산에서 영원히 입산하며 “스님이여 산 좋다 말씀마오/이렇게 좋은 산을 낸들 어이 떠나겠소/뒷날 내 자취 찾아 보시구려/한번 들면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니”를 읊고는 약속대로 산에 들어갔다고 한다. 또 이인로는 고려 무신정권 아래서 참담한 생활을 하다 이상세계를 찾아 지리산에 들어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 아닌 곳이 없구나/천암(千巖)이 다투어 솟아 있고/온갖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소리 내어 흐르는데/대나무 울타리와 떼를 입힌 집들이/복숭화꽃 살구꽃에 어리어/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 하구나”라고 노래했다.
화담은 반야봉에 올랐다가 “지리산이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올라가 보매 마음의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바위는 장난하는 듯 솟아 봉우리를 이루니/아득한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랴/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산은 나를 위해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천리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인가”라는 시를 읊고는 즐거워 했다고 <화담집>에 기록하고 있다.
점필재 김종직과 그의 제자 김일손은 각각 17년의 간격으로 지리산을 오르면서, 점필재는 <유두류록(流頭流錄)>을, 김일손은 <속두류록(續頭流錄)>을 남겼다.
김일손은 정여창과 지금의 중산리를 거쳐 천왕봉으로 올랐는데 천왕봉 일출을 보면서 “햇살에 비친 계곡과 하늘이 온통 구리쇠를 갈아 뿌린 것 같구나/세상의 모든 것이 차츰 눈에 들어오는데 대지의 모든 산이 개미집이요/지렁이가 흙을 물어 쌓은 듯하다”고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천왕일출 감상을 적고 있다. “흰 구름이 산골짜기에 자욱하니 푸른 바다 물결은 포구를 이루었고, 흰 파도가 눈을 몰아내니 산뜻한 섬이 되어 점점이 깔린 듯하다. 돌담에 몸을 기대고 위아래를 바라보니 정신도 마음도 한가지로 막막하여 몸이 태초의 공간에 안긴 채 하늘과 땅과 더불어 흘러가는 듯 했다.”

-지리십경(智異十景)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어느 산인들 해가 뜨지 않으랴만 천왕봉에서의 일출구경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보기가 어렵다,
제2경: 직전단풍(稷田丹楓)
피아골의 단풍. 피아골은 지리산의 울음주머니로 이데올로기 대립 때문에 이 계곡에 흘린 피가 많다. 피밭골(직전)에서 유래,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지리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게 산허리를 휘두른 구름인데 특히 노고단에서 바라보는 경관을 으뜸으로 칭한다.
제4경: 반야낙조(般若落照)
해가 떨어지면서 구름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불덩어리는 자연이 만든 화려한 잔치다.
제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벽소령은 예부터 화개에서 마천으로 넘나드는데 쓰이던 고개다. 이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밝은 달은 동양화처럼 아름답다.
제6경: 세석(細石)철쭉
해마다 5월말이면 지리산에서는 고운 분홍색 철쭉이 피어나 지상낙원을 이룬다.
제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지리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불일폭포에서 쏟아지는 물보라로 인해 지리십경에 들게 되었다. 냉기 때문에 한여름에는 한기를 느낄 정도다.
제8경: 연하선경(烟霞仙境)
연하봉의 이끼 낀 기암 사이에 가득 들어찬 고사목 숲은 기괴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천왕봉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려 급류를 이루는 이 계곡은 한여름에도 추위를 느낄 정도로 골이 깊고 수량도 풍부하다.
제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지리산을 남서로 감돌아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듯한 섬진강. 비록 열 번째 경치로 꼽히기는 했지만 지리산자락에서 내려 보는 섬진강 풍광은 조물주가 아니고는 그려낼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성삼재] 지리산 주능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다. 지리산 종주의 기점으로 이용된다. 861번 지방도로가 올라간다. 정상에는 휴게소와 식당이 있다. 이곳에 있는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서북능선인 만복대까지 관리한다. 일반 등산객들은 종석대를 거치지 않고 코재로 직접 올라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돌을 다듬어 바닥에 끼워 맞춘 돌포장도로가 길이 크게 꺾이는 지점까지 올라간다. ‘3개의 고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성삼재는 삼한시절의 전적지로, 마한군에게 쫓기던 진한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였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재,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남쪽은 성(姓)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 하였다 한다.

[종석대] 성삼재의 남쪽이자 코재의 서쪽에 올라앉은 봉우리다. 동은 지리산 주능선, 서는 시암재와 양미봉으로 연결되는 서릉, 남은 원사봉으로 이어지는 차일봉능선, 북은 만복대로 올라가는 서북릉이 종석대를 기점으로 갈라져 나간다. 탐방금지구간인 종석대는 암릉인데 ‘엎어놓은 종처럼 오뚝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코재] 종석대 동쪽이자 화엄사계곡에서 올라가면 만나게 되는 깔딱고개의 끝이다. 언젠가부터 이곳에 전망대를 만들어 여행자들이 섬진강을 멀리서 구경하고 지나간다. 성삼재로 차량이 올라가기 전에는 화엄사를 산행기점으로 삼아 이곳 코재를 경유했다. 화엄사에서 올라가자면 줄잡아 3시간 30분 소요된다. 화엄사에서 오르자면 코재를 앞두고 경사가 하도 급하여 ‘코가 땅에 닿는다’고 해서 ‘코재’라 부른다.

[노고단] 1,507m. 노고단이란 도교에서 온 말로, 우리말로는 ‘할미단’이며, ‘할미’는 국모신(國母神)인 서술성모(西述聖母.仙桃聖母)를 일컫는다. 서술성모를 마고할미로 존칭하며 부르게 된데서 노고단이란 지명이 유래됐다. 옛날 신라시대부터 지리산의 산신 서술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던 민속신앙의 영지였다.
산정부에 가까운 1,100∼1,200m 높이에는 원추리꽃으로 덮인 광활한 고원이 펼쳐져서 부근이 좋은 피서지를 이루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서양사람들의 별장지가 되었다. 노고단의 경관은 울창한 임상(林相)과 웅대한 산용(山容)의 경치가 훌륭하고, 정상부에서의 조망이 뛰어나다. 서쪽 계곡에는 화엄사(華嚴寺)가 있는데, 경내에 각황전(覺皇殿)을 비롯해 국보·보물로 지정된 전각(殿閣)·석등(石燈)·석탑 등이 많다.

<마고할미 전설(반야봉)>
지리산 산신 중 여신인 천왕봉의 마고할미는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이다.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던 중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다. 그리고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깨우침을 얻기 위해 외로이 수도하는 남편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남편이 입을 옷을 만든다. 그리고 마고할미는 딸들을 한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린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끝내 남편 반야를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만다. 갈기갈기 찢겨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는 이야기이다.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 것은 하늘이 저승에서나마 반야와 마고할미가 만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 한다.

[돼지령] 예로부터 멧돼지들이 좋아하는 둥굴레가 많이 나는 곳이어서 이름이 생겼다.

[피아골] 지리산 피아골 관문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19번 국도를 타고 북서쪽의 구례로 달리다가 화개장터 앞을 지나 2km쯤 더 간 외곡마을이 바로 그곳이다. 이 마을에서 섬진강 큰 물줄기와 헤어져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연곡천의 작은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피아골의 긴 골짜기가 주위의 풍경을 펼쳐 보이며 산길을 안내한다. 목아재와 촛대봉이 반원형으로 터준 골짜기를 오르면, 양쪽 산기슭에 기촌, 가락골, 중터, 조동 등의 마을들이 차례로 타나면서 외진 산길의 적적함을 덜어준다. 촛대봉 능선이 경남과 전남을 갈라놓았다. 옛부터 두 도(道)의 사람들이 오가던 길 줄기들이 등성이를 나란히 얽어 느랏목, 뒷골재, 새끼미재 등의 고개들을 만들어 놓았다. 목아재를 감돌아 산길 왼쪽으로 비스듬히 발길을 꺾으면 조선시대에 원집이 있었다던 원터에 닿는다. 더 오르면 피아골이다. 마을의 한자명은 직전(稷田), 여기에서 직(稷)이란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는 작물로 ‘피’라고도 불린다. 즉 피밭이다. 피아골 골짜기를 직전계곡이라고도 한다. 한국전쟁 등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이곳에서 피를 많이 흘려 ‘피의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피아골을 피와 관련지어 지명의 원뜻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6.25 전에도 ‘피아골’이라 불렸기 때문이다.

[임걸령] 전설에 도적 임걸년은 팔도행상의 물건을 일부만 털었고, 또 그것을 모아 빈민을 구제한 의적이라고 하는데 실제 임란 당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선조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의병의 기록과 사회상 기록)에는 1594년 6월 “이때에 영남사람 임걸년이 또한 도당을 모아 지리산 반야봉에 둔쳐서 출몰하며 도적질을 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임걸년이 와전되어 임걸령이라 한다.
임걸령에서 노고단까지는 대체로 순탄한 길이라, 노고단에서 임걸령을 향해 화살을 쏘고 말을 타고 달렸더니 말이 먼저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주변에 키 큰 나무가 호걸처럼 많이 서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노루목] 1. 노루가 자주 다니는 길목. 2. 넓은 들에서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지역.
노루목이란 명칭은 이곳의 암두(巖頭) 모양새가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든 모습이란 얘기와, 노루가 지나다니던 길목이라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또한 문순태의 장편소설 <철쭉제>에는 ‘산에서의 세 갈림길’을 흔히 노루목이라 한다고 적혀 있는데, 많은 사람이 쉬어가는 길목인 노루목에서는 흔히 세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 것으로 보아 이 역시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또는, 땅의 모양이 넓거나 늘어졌다는 뜻으로 ‘널’자에 지점이라는 뜻의 ‘목’자가 합쳐져 널목→놀목→날목→너르목→노루목 등으로 변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반야봉] 1,733m. 주능선의 삼도봉에서 서북쪽으로 1.2km 정도 떨어져 있다. 독립봉으로는 천왕봉에 이은 두번째 고봉이다. 생김새는 달마대사의 머리를 닮았다. 심원과 쟁기소, 반선으로 오르내리는 등산로가 모두 북봉에서 갈라진다. 반야봉에는 남신의 상징인 반야와 천신의 딸이자 여신인 마야고 사이에 얽힌 러브 스토리가 전설로 내려온다.

<전설> 마야고(마고)는 어느 날 사모하는 반야의 옷 한 벌을 지어놓고 반야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고원에 핀 쇠별꽃이 바람에 일렁이며 물결칠 때마다 마야고는 행여 반야가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마야고는 마침내 신명나게 머리채를 나부끼며 그 꽃잎 물결 속으로 반야의 옷을 든 채 달려갔다. 그리고 무엇을 잡을 듯이 허우적거렸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리운 반야는 보이지 않았다. 쇠별꽃의 움직임을 착각한 마야고는 수치와 분노를 못 이겨 얼굴을 손바닥에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자신을 속인 쇠별꽃을 다시는 피지 못하게 하고 반야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버렸다. 또 매일 같이 얼굴을 비추어보던 산상의 연못은 신통력을 부려서 메워 없앴다.
이 전설의 흔적은 지금도 지리산에 남아 있다. 그녀가 메워버린 못을 누군가 천왕봉 밑 장터목에서 찾아내 ‘산희샘’이라 부르고, 찢겨져 흩어진 반야의 옷은 소나무 가지에 실오라기처럼 걸려 기생하는 풍란으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지리산 풍란은 ‘환란’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삼도봉] 1,449m. 남한쪽 대간의 세번째 삼도봉이다. 반야봉의 남동쪽이자 화개재의 서쪽에 있다. 정상부는 심하게 주름진 암릉이다. 남쪽으로 뻗어내리는 불무장등능선이 전마로가 경남을 가르는 경계이고, 그 끝에 화개장터가 매달려 있다. 불무장등능선은 쌍계사와 연곡사의 중간을 가로지르는 형상인데 이곳을 등반하면 지리산은 졸업했다고 할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다. 찾는 여행자는 거의 없다.

[594계단] 화개재와 삼도봉 구간에 1999년 설치한 나무 계단으로, 폭 1.5m 길이 240m.

[화개재] 삼도봉과 토끼봉 사이의 허리목이자 뱀사골과 화개골을 연결하는 노루목이다. 지리산 능선에 있었던 장터 중 하나로, 경남에서 연동골을 따라 올라오는 소금과 해산물, 전북에서 뱀사골로 올라오는 삼베와 산나물 등을 물물교환하던 장소였다.

[뱀사골] 뱀이 많아서 뱀자가 들어간 지명이 붙었을 수도 있으나, 뱀의 골짜기란 뜻이라면 ‘뱀골’이 되어야 하는데, 뱀의 뜻을 지닌 ‘사’자가 또 들어간 ‘뱀사골’은 의문이 간다. 지금은 사전에도 없고, 쓰이지도 않는 말이 되었지만 심하다는 뜻의 ‘배다(베다)’가 있었다. 따라서 ‘비탈이 배다(베다)’라고 하면 비탈이 매우 심하다는 뜻이 된다. ‘밴+샅(사이)+골 → 뱀샅골 → 뱀사골’로 비탈이 심한 골짜기란 뜻에서 나왔다고 가정해볼 수 있다.

[토끼봉] 반야봉에서 방위가 묘향이라 하여 묘봉이라 불리다 토끼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숨어든 빨치산들이 덕평봉 전의 봉우리에 꽃이 만발한 모습을 보고 꽃대봉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명선봉] 1,586m. 연하천 발원지의 남서쪽 봉우리다. 정상에는 이정표와 쉼터가 있다. 대성리 의신마을과 삼정마을(마천리 삼정리가 아님)이 계곡 안에 묻히듯 가라앉은 모습이 내려다보인다. 명선봉에서 연하천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형제봉과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촛대봉이 묘하게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형제봉] 1,115m. 지리산 자락 가장 남쪽에 있는 최고봉. 우뚝 솟은 봉우리가 우애 깊은 형제와 모습이 비슷하여 형제봉이라 한다. 정상에는 철쭉이 군락을 이루어 매년 5월에는 철쭉제를 개최한다. 형제봉 등산로 주변에는 통천문, 신선대, 봉수대, 고소성군립공원 등의 관광지가 있다. 고소성군립공원에서 내려다보면 <토지>의 주 무대인 평사리가 한눈에 보인다. 또한 악양팔경(岳陽八景)이라는 악양의 주요 경치를 구경할 수 있다.
형제봉의 정확한 지명은 부자바위 즉 부자암(父子巖)이다. 형제봉 아래 사는 마천의 삼정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부자암을 형제봉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지역민들이 형제봉을 부자암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설화 때문이다.

<부자암 설화> 조선시대에 지리산 마천의 삼정마을(양정, 음정, 하정)을 끼고 흐르는 광대골에는 전래설화 ‘선녀와 나무꾼’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하늘에서 일곱 선녀가 목욕을 하러 왔다가 그 장면을 몰래 엿본 나무꾼이 한 선녀의 옷을 훔침으로서 하늘로 돌아가지 못한 선녀는 어쩔 수 없이 나무꾼과 하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여기까지 스토리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과 거의 비슷하나 선녀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후편에 가서는 조금 각색이 되어 부자암의 전설을 잉태시켰다.
선녀는 지아비와 두 아들을 두고 하늘로 올라가 버리고 삼부자는 날마다 지리산에 올라가서 하늘을 향해 돌아오지 않는 아내와 어미를 기다리다 화석이 되어버렸다. 훗날 사람들은 화석이 되어버린 바위덩어리들을 부자바위라고 불렀다. 선녀이름은 ‘아미’이고, 나무꾼 ‘인걸’은 옛날 하정부락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인물이라고 전설은 전하고 있다. 산 아래 하정마을 쪽에서 보이는 부자암의 모습은 꼭 삼부자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는 형상이라고 하나 속인의 눈에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정마을 사람들은 전설의 주체가 되는 부자암을 기리기 위해 1976년에 ‘석문암계’라는 친목계를 조직해 선녀와 나무꾼이 살았다는 부락의 계곡에 선유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매년 초복이면 전설속의 나무꾼인 인걸 삼부자를 위해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한편, 부자암에서 발원한 광대골 물길의 상부 골짝을 지역민들은 ‘부자바위골’이라고 한다.

[벽소령] 지리산 허리춤에 위치한 벽소령은 화개재나 장터목과 함께 지리산의 남북을 넘나드는 고개 중의 한 곳이다. 벽소령의 달밤은 여러 문장가들에 의해 시와 소설이 되었고, 동란 중 빨치산도 벽소령을 넘을 때 달빛 때문에 고향을 그리며 울었다고 한다. 밝다 못해 푸른빛이 도는 지리산 달밤의 운치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푸른밤’ 이란 뜻의 벽소령은 언제부터 ‘벽소령’이라 불렸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전해오는 고서 및 고지도에 표기되어진 것을 보면 대개 1750년경이 아닌가 추정한다. ‘벽소(碧푸를벽宵밤소)’라는 단어는 1751년에 쓰여진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나온 듯하다.
“지리산의 북쪽은 함양 땅이다. 영원동, 군자사, 유점촌이 있는데 남사고는 이곳이 모두 복지라고 했다. 또 벽소운동과 추성동은 모두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이중환이 말한 ‘벽소운동’이 지금의 백무동이 아닌가 추정이 가지만 정확히 규명할 수는 없다. 다만 마천 쪽의 벽소령 자락에 있었던 마을임은 분명하다.
태초에 길이 생겼을 때부터 주로 이 고개를 이용했었던 사람들은 고개의 이쪽저쪽에 사는 민초들은 물론, 등짐 진 보부상들, 혹은 지리산에서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던 의병들과 수 많은 절집의 스님들이었겠지만 조선시대에 지리산을 찾은 유산객들도 이 고개를 넘나든 흔적이 많아 보인다.
조선시대의 유산기에서 벽소령을 최초로 언급한 사람은 진주선비 하익범이다. 1807년 중산리-천왕봉-벽소령-칠불암 코스로 산행을 한 그는 “망암(칠선봉으로 추정됨)을 따라 벽소령 냉천(선비샘으로 추정됨) 역참까지 70리였는데 여기서부터 비로소 길이 아래로 꺾였다”고 <유두류록>에 기록했다.
당시 양쪽 산자락의 고갯길이 시작되는 지점인 의신쪽의 삼정리와 마천쪽의 양정마을에는 주막까지 있어 지나는 길손들이 요기와 함께 숙박까지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군사정권시절(1972년) 작전도로가 생기면서 그 옛날 오솔길들은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아직도 흔적은 있어 최근에는 등산객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오솔길이 빗점골 상부의 천내골, 오리정골, 광대골 상부의 소금쟁이길 등이다.
벽소령의 원래 이름은 ‘초료조(鷦鷯鳥)재’였다. 추강 남효온이 쓴 지리산기행문인 <지리산일과>(1487년)에 ‘초료조재’가 등장한다. 초료조는 우리가 흔히 촉새 또는 때까치라고 부르는 뱁새의 학명이며, 한국의 텃새이다.
한편 고개 밑의 의신마을 사람들은 벽소령을 ‘뱁실령’이라 부르고, 벽소령샘을 ‘뱁실샘’이라 부른다. 500년경의 기록물에 보이는 벽소령의 옛이름 ‘초료조재’, 즉 ‘뱁새재’가, 어원의 근거지인 옛날 의신사가 있었던 의신쪽 사람들이 부르는 ‘뱁실령’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보아진다. (자료출처 : 아름다운소통(협), 백두대간학교, 한민족문화백과 등)

[백두대간학교]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교장선생님은 오랜 동안 백두대간학교 수석가이드로 활약해주셔서 낯익은 얼굴입니다. 산행 경력 30년의 저명한 M.T.디자이너이며 국가공인 숲길체험지도사(산림청), 응급처치법 강사(대한적십자)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낭 하나 메고 지리산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얼굴이 환해집니다. 천상 산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연이어 정맥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백두대간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산악회 가이드, 기업체 가이드, 목적산악회 가이드 등으로 활약하며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가이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인문학습원 백두대간학교 개교부터 가이드로 동분서주했습니다.
백두대간 교양강좌, 트레킹학교 등의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고, 아이들과 뚜르드몽블랑(TMB), 몽블랑 일주 트레킹을 다녀왔으며, 흥덕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대 <백두대간 하늘길를 걷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백두대간 숲길을 거닐며 바람과 햇살, 구름, 안개, 곤충과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종주를 시작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진 산줄기 ‘백두대간’ 총 길이 1,625km의 백두대간은 단순한 산줄기가 아닙니다. 이 땅 모든 산줄기와 강줄기의 시원입니다. 또한 한반도 허파이자 생태계의 보고입니다. 이 땅에 기대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의 근간입니다. 백두대간 줄기 따라 물이 흐르고, 마을이 생겨 사람들이 깃들어 살았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고 문화가 생성되었습니다. 백두대간은 우리의 삶이며 우리의 문화의 결정체입니다.

생명의 근간인 백두대간을 찾아가는 백두대간 종주는 우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인문학의 보따리를 찾아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지난 6년간 60강에 걸쳐 백두대간 아름다운 산하를 걸었던 백두대간학교는 백두대간의 결정체인 백두대간 마루금을 걷습니다. 총 길이 1,625km의 백두대간 중 우리가 걸을 수 있는 남측 구간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강원도 고성 향로봉까지 701km입니다. 이중 비법정탐방로 79.9km를 제외하면 도상거리 621.1km입니다. 접속구간을 포함하면 실제 백두대간 종주거리는 약 1,000km에 이릅니다.

2016년 9월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를 찾아 떠납니다. 마음 한켠 간직해왔던 꿈을 찾아 떠나는 희망의 발걸음입니다. 백두대간 종주는 힘든 여정이지만 도반들과 함께라면 거뜬하게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혼자 걸으면 나의 길이 되지만, 함께 걸으면 모두의 희망이 됩니다.” 모두의 희망인 ‘백두대간 종주’ 힘차게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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