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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빠'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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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빠'를 위한 변명

[사회 책임 혁명] 파시스트 '문빠'의 민주주의

열렬한 문재인 지지자를 뜻하는 '문빠'와 이른 바 진보언론 간에 묘한 긴장이 연출되고 있다. 예송논쟁이란 표현이 차용됐을 정도로 얼핏 논란의 쟁점은 사소하다. 문재인이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문 대통령 지지자들을 화나게 한 이 사건에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고의성이 개입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문 대통령 지지자들은 모종의 의구심과 피해의식을 드러내며 해당 언론사나 기자를 SNS를 이용하여 공격하고 있다. '문빠'들의 과도한 공격에 일각에서는 홍위병이란 용어를 들이대며 이들을 파시스트로 몰아가고 있다.

속물스런 관점에서 어쩌면 같은 진영으로 분류될 '문빠'와 '한경오(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간의 갈등의 원인은 무엇이고 이 사태를 어떻게 봐야할까. 먼저 '문빠'들이 의심하듯 '한경오'에게 '문재인 폄훼' 의도가 있었을까부터 살펴보자. 내부자가 아닌 이상 100% 자신할 수 없지만 선거기간을 포함하여 문 대통령 취임 이후에 이르기까지 '한경오'나 '한경오' 기자들이 그러한 의도를 가졌으리라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이 판단이 논리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나의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판단이란 점은 양해 바란다.

내가 과거 대학을 졸업하고 27살에 기자가 되었을 때 언론계 문화 중에서 가장 놀란 것은 '님'자 없는 호칭이었다. 사장에게도 '김 사장'이라고 불렀고, 야근 중인 1~2년 차 사회부 기자는 책상에 발을 올려놓은 채 담배를 피웠으며, 편집국장이나 간부가 옆으로 지나가도 발을 내리지 않았다. '님'자 호칭은 밖에서도 생략되었다. 출입처 사람들은 그런 '기개'에 으레 그러려니 했다. 쓰고 보니 참 옛날얘기다. 요즘엔 그런 문화가 사라지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유교 문화가 온전한 우리 사회에서 이렇게 파격적이고 '버릇없는' 문화가 기자 사회에 자리 잡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초년병 기자라 해도 취재과정에서 주눅 들지 말고 용감하게 맞서란 취지였을 것이고, 내부의 권위주의를 타파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권위주의에 맞선 싸움을 격려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굳이 이렇게 떠들썩하게 태도를 바꾸도록 강제해야 할 만큼 우리 사회의 유교적이고 권위적인, 또한 장유유서의 문화가 뿌리 깊었다는 징표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내고 보니, '님'자 없는 외양과 달리 언론사 내부의 권위주의가 그 자체로 외부의 권위주의를 능가하는 구조적 철옹성이었다. 또한 사회 전체의 권위주의에 맞선 싸움은 때로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였지만 보다 중요하고 상시적으로는 외부적으로 표방된 명분 아래, 선출되지 않은, 즉 자처한 또는 독선적인 자신의 권위주의 구축으로 귀결하였다는 게 나의 판단이다. 이번 '예송(禮訟) 논쟁'은 일견 사소해 보이지만, 본질적인 문제에 닿아 있다.

과거 독재정권 아래 주로 동맹자 또는 하수인으로 복무하며 부분적으로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도 한 언론이 민주주의의 진전과 함께 스스로 권력화하였고, 권력화하는 수구언론에 맞서 태동한 이른 바 진보언론 역시 언론 내의 대립구조를 활용하며 실질적인 동업자로서 권력분점 기제를 작동시키고 있다. 진보언론이든, 보수언론이든, 결국은 그들이 권력화하며 기득권의 확대재생산에 기여하는 동시에 스스로 기득권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게 현재 언론의 본질적 문제점이다.

언론산업은 그 자체에 내포된 영리적 성격 때문에 '비영리적' 결과물을 통해 그 영리활동의 정당성을 끊임없이 검증받아야 한다. 또한 언론에게 부여된 막강한 사회적 기능은, 애초에 절차적 정당성이 담보되지 않았기에 상시적이고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시민 권력의 감시하에 놓여야 함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명시적 폭력이 존재한 시대의 언론은 언론산업에 종사하는 각성되고 선도적인 지식인집단의 판단과 결의에 의해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최소한 명시적 폭력이 사라진 민주주의 시대에서는 민주시민들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그 기능을 지속적으로 조정하며 수행해야 한다. 무엇보다 시대정신이 강림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시대정신이 과거엔 언론계에 종사하는 일부 지식인들에게 계시로 나타났다면, 지금은 민주시민들과 대화하고 토론하여 부단하게 진화하는 '소통의 거버넌스'로 나타나게 된다.

"덤벼라 문빠"라고 한 어느 언론인의 페이스북 글이 본인이 해명한 대로 취중실수였을 터이고, '악의'가 없었으리란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그 기자를 포함하여 논란의 당사자가 된 다른 기자들까지, 또한 한국의 언론과 기자들이 채 의식하지 못한 점은 그 '기백'에 우월의식과 배제, 확인되지 않은 탁월함에 대한 자신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특정 언론사가 정한 보도의 원칙과 관행은 독자, 혹은 더 적나라하게 뉴스소비자에게 문제 제기를 불허하는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토론과 요청은 거부할 수 없으며 보도 자체는 물론 보도 관행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여야 한다. "덤벼라"나 "따르라"는 지금 언론에 합당한 원칙이나 관행이 될 수 없다.

가끔 나의 과거 기자 생활을 떠올리면 낯이 뜨거울 때가 있다. 지금 현직 기자들의 기자 생활을 지켜보아도 낯이 뜨거울 때가 있다. 기사로서 사명감과 선의는, 그 자체로 자기충족적이지 않으며, 시대정신을 수용하고 그게 따른 구체적 방법론을 고민하는 가운데 실천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식으로 뉴스소비자를 '호갱'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단 그러한 고민 가운데서 시대정신을 수용한 사명감과 기자적 양심은, 바라건대 어떠한 외압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지켜져야 함을 재삼 강조하고 싶다. 지금 논란이 되는 '예송 논쟁'이 꿋꿋함의 대상이 아니어서 많이 안타깝다. 계시나 소통이 없고, 오만과 군림만이 목격된다.

언론은 쉽지 않더라도 최우선적으로 자본으로부터 자유를 모색해야 하고, 공자님 말씀 같지만 정말로 '사실 확인(팩트 파인딩)'과 진리추구의 본령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올바른 결과물로부터 부여의 정당성이 확인된다는 전제가 따라붙는 언론의 사회적 기능에서 전제를 떼어내고 그 기능을 마치 천부인권인 양 막무가내로 사용하는 언론은, 다시 말하지만 올바르지 않다. 무엇보다 언론 종사자들은 변화한 시대정신을 직시하여야 한다.

이제 자연스럽게 '문빠'의 행태에 대해 논해 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스스로를 권력화하고 앞서 말한 대로 전제 충족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 기능을 천부인권인 양 내세우는 언론에 대한 문제 제기는 파시즘이 아니다. 물론 '문빠'의 행태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거칠고 때로 폭력적이며 약간의 정제되지 않은 집산주의적 분위기까지, 나에게도 마뜩지 않는 점이 많이 눈에 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빠'가 시대정신과 함께 걸어간다면 '문빠'는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두 가지 지점에서 '문빠'는 '친박'과 달라야 한다. 먼저 문재인과 박근혜 중 누가 시대정신의 편에 섰는가를 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문재인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마치 극중에서 대통령 연기라도 하는 듯 모자람 없이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고 있다. 당연히 앞으로 더 지켜보아야겠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시대정신의 편에 섰다면 '문빠' 또한 시대정신에 선 것이다.

다음으로 만일 가정해서 나중에 문 대통령이 시대정신에 반하게 된다면, 그때 '문빠'가 문재인을 비판한다면, '문빠'는 문재인을 떠나서도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겠다. '문빠'에게 후자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고, 문 대통령이 잘해서 영영 확인될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반면 비리가 백일하에 드러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아직도 추앙하는 '친박'은 전자는 물론, 후자의 관점에서도 시대착오적인 집단임이 입증되고 있다.

'먹물아비투스'에게 '문빠'는 분명 불편하다. 불편하지만, 자발적으로 광화문에 모이고 온라인에 모이는 그들은 동원되지 않았기에 원천적으로 파시스트일 수는 없다. 물론 디테일에서 파시스트로 간주될 수 있는 행태가 목격될 수 있겠지만, 파도 위에 떠 있는 약간의 쓰레기로 인해 파도 자체를 쓰레기 취급할 수는 없지 않은가. '쓰레기'란 디테일의 설정 또한 타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빠'는 집합적으로 축구경기를 하지 개별적으로 골프를 치지는 않으니 말이다. 다중이 참여하는 정치는 축구경기에 가깝지 몸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골프와는 거리가 멀다.

사악함을 쫓아내고, 새로운 변화를 끌어내는 광장에 어쩌면 이런저런 관점에서 수다한 흠결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광장은 시대정신을 불러왔고 확산시켰다. 우선은 광장의 핵심에 '문빠'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게 순리일 듯싶다. '문빠'와 문재인이 시대정신과 함께 하는 한, 언론과 언론인들은 '소통의 거버넌스'를 통해 시대정신을 더불어 논의하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만들어내고 확산시킨 주범은 언제나 기득권에 속한 지식인이었다. 파도 머리에 얹힌 사소한 부유물들을 지적하며 거대한 파도처럼 도도하게 밀려드는 민주주의의 활력을 비난하는 이들이야말로 민주주의 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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