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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언론이 제대로면 나라가 함부로 되지 않는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⑤]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내란 수괴'로 잡혀갈 수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서 '안종범 수첩' 50여 권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실을 입증한 핵심 증거가 된 것처럼, 한 장의 메모가 불러올 후폭풍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의 상임집행위원 겸 편집실장을 맡았던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의 이야기다.

"6월항쟁에 앞장선 사실은 내란 혐의에 해당되는 행위를 한 거라고 볼 수도 있죠. 실패했으면 수괴 혐의로 감옥에 가는 거죠. 고등학교 동창 중에 하나가 경찰 정보계통에 있었는데 나에 대한 정보보고가 계속 올라오더라는 이야기를 했어요. 어떤 친구는 살아남은 것도 다행이라고 그래요.

최근의 이야기인데, '지금도 경찰이나 다른 수사기관에 내 파일(정보보고)이 있느냐'고 물어봤어요. 파일이 존재한다는 건 계속 감시한다는 것이거든요. 뭐라고 대답했을 것 같아요? '파일이 한 번 생기면 사라지지 않는다'고 그래요. 겁나겠죠?(웃음) 그래서 1980년대 그때에는 우리가 메모도 안 하고, 기록을 안 남겼어요. 그게 다 증거가 되고 문제가 생기는 거니까."

6월민주항쟁이 아직 오지 않은 시절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서슬 퍼렜고, 옴짝만 해도 ‘내란 음모’였다. 사무실 앞에는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현 국가정보원)부터 경찰, 치안본부에 이르기까지 각 정보기관에서 나온 요원이 적어도 셋이었다. <말>지를 통해 독재 정권의 언론 통제 실상인 '보도 지침'을 폭로했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주시민언론연합의 전신, 이하 언협)가 당시 정상모 이사장의 사무실이었다. 단행본으로 묶어낸 <보도지침>이 30여년이 흐른 지금도 그의 옆에 놓여 있었다.

▲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바꿈

책상 위에 여전한 보도지침

정상모 이사장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직후 MBC에서 해고를 당한 해직 언론인이다. 정보기관은 그가 해직당한 이후부터 그의 동태를 살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도지침' 보도 직후인 1986년 말, 언협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말>지 발행 때문에 일주일가량 구류를 살고 나온 상황에서 그는 87년 3월 20일, 또 다른 기사를 통해 독재 정권의 폭압을 고발한다.

"80년대에는 학원에 정보 수사 기관원들이 수시로 드나들면서 사찰을 했어요. 학생들 동태를 감시하고 필요하면 잡아가고 그런 건데, 심지어 군 보안대원까지도 왔다 갔다 했어요. 많은 돈은 아니지만, 학교 측에서는 올 때마다 돈을 줬어요. 그냥 주면 교직원의 착복이 되잖아요. 근거를 남겨야 책임을 안 질 수가 있으니까 날짜별로 얼마를 누구한테 줬는지를 기록해 둔 거죠. 대학생들이 점거 농성을 하다가 그걸 발견해서 우리한테 들고 왔어요. 그대로 실어버렸죠. 사실대로 실었는데, 저쪽에서 발끈했어요. 보안대가 제일 발끈했어요. 감히 우리를?

당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85년 구성된 재야 민주세력 결집체, 약칭 민통련)의 다른 사무실들은 다 폐쇄돼서 사무실도 없이 지내던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언협은 닫았던 사무실을 오히려 다시 열고, <말>지뿐만 아니라 <말 소식>지(재판 과정, 석방 운동 등의 소식을 담은 별지)까지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저쪽에서 완전히 뚜껑이 열린 거죠.

해당 호 <말>지를 넘긴 그날 경찰이 바로 집으로 들이닥쳤어요. 나 한 명 잡으려고 전경 버스 한 대와 형사 2명, 전경들이 왔어요. 내가 버티며 난리를 폈어요. 군중들이 몰려들고 해서, '정보과장을 불러라. 그와 함께 가겠다. 전경 버스 당장 돌려보내라'고 외쳤죠. 이렇게 버스를 보내고 형사 2명이랑 다방으로 들어가서 솔직하게 다 말했죠. '곧 언협 총회가 예정돼 있는데, 사무국장인 내가 잡혀 들어가면 총회를 못 치른다. 상부에는 때 되면 들어갈 테니, 지금은 못 들어간다고 보고하라' 그랬죠. 그러니까 형사가 '오늘부터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국가보안법으로 수배가 됐어요."

당장 연행될 상황에서는 벗어났지만, 경찰은 그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제가 도망을 갔더니 경찰이 밤 10시만 되면 제 집에 전화를 해요. 내가 거꾸로 새벽 1시에 담당 형사 집에 전화를 했어요. 그 다음부터는 전화를 못 걸더라고."

"국민이 앞장서니 정치권이 겨우 끌려왔다"

▲ 언협의 정 이사장 석방 관련 논평.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런 내용을 실은 <말>지 10호(87년 3월 20일)가 발행된 뒤, 정 이사장은 요주 인물에서 국가보안법 위반한 수배자로 신분이 업그레이드 됐다. 하지만 그는 또다시 앞줄에 섰다. 국본에서 언론과 문화단체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상임집행위원을 맡은 것이다. 국본에 참여했던 정 이사장에게 가장 또렷하게 기억되는 장면은 무엇일까? 그는 가장 많은 시민이 운집했던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을 떠올렸다.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였던 진관스님과 같이 최루탄을 맞으면서 시위를 하는데, 스님도 별 수 없더라고. 눈물 흘리고…."

눈물만 흘렸냐는 장난기 어린 질문에 정 이사장은 "콧물도 났죠"라고 웃으며 답했다. 그는 30년 전 그날,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이 들썩였노라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말>지 특집호를 내려고 기자들을 전부 지방으로 출장을 보냈어요. 그래서 서울보다도 지방이 훨씬 역동적이고, 거의 혁명적인 상황이 전개됐다는 걸 알게 됐죠. 서울만 막으면 된다고 (판단)해서 전투경찰이 서울로 집결하는 바람에 지방에는 병력이 별로 없었어요. 대전도 그렇고, 천안도 그렇고, 진주에서도 경찰이 손을 못 썼어요. 6월10일이 수뇌부 운동가 중심이었다면, 6.26은 범국민적인 항쟁이었어요."

범국민적 항쟁이라는 표현에서 2017년 촛불집회가 떠올랐다. 정 이사장은 30년 전이나, 이번에나 "말리는 쪽이 정치권이었다"면서 "이번에도 국민이 앞장서니까 정치권이 겨우 끌려왔다"고 지적했다.

"87년 6월 18일에 최루탄추방대회가 대규모로, 격렬하게 벌어졌어요. 상당히 위협적인 시위였죠. 제 기억에는 다음날인 19일인데, 성공회성당에 여성단체연합 사무실이 있었어요. 거기에 제가 아침 일찍 갔어요. 국본 상임집행위원들과 대표들하고, 당시 대변인이었던 인명진 목사도 기억이 나요. 당시 군부대 투입설이 막 나돌고 흉흉할 때인데 그 자리에서 '군 투입되면 우리는 내란 혐의로 감옥에서 만나게 될 거다. 그래도 이판사판 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면서 6.26을 하기로 결정을 했어요.

그런데 정치권이 반대를 했어요. 전두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거죠. 24일에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가 전두환을 만났는데, 전두환이 '논의해 보자'고만 했어요. 논의해보자는 건 나중에 이유 하나 달아서 결렬시키면 되는 거예요. 사실상 결렬이죠.
그때 저는 국민운동신문 창간을 준비하고 있었어요. 굴레방다리 근처에 사무실을 빌려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8면짜리 신문에 다른 기사는 다 만들어 놓고 1면 머리기사만 빼놓고 있었어요. 기사는 6.26이 결정된 것, 그리고 무산된 것 다 준비해 놓고요. 24일 밤 마리스타 수도원에서 6.26 대행진을 한다고 최종 결정이 돼서 바로 머리기사 집어넣고 제작‧배포했어요."

"빈사상태 빠진 '보수', 정신 차리면 더 세진다"

정 이사장은 6.29 선언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단일화에 실패한 데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하면서, 정치권에 대한 감시를 늦추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때의 노태우와 같은 인물이 지금은 없지 않느냐고 의문을 제기하자,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지금도 잘 보면 표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야권은 보수 흉내를 내려고 하고, 반대쪽은 진보 흉내를 내려고 해요. 박근혜도 대선 후보 시절에 경제민주화 하겠다고 했어요. 표가 되면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들이에요. 정치적인 철학과 소신이 없이 표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거기서 바로 제2의 노태우가 나타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사드 배치 찬성하겠다고 떠드는 것처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표변하는 세력들을 주시하라는 그의 경고는, 자유한국당으로 대표되는 지금의 '말도 안 되는 보수' 세력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지난 9일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생시킨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가 24%라는 득표율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그의 이야기는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박근혜가 없어도 그런 사태는 또 생겨요. 제 2의 박근혜도 수두룩하게 많거든요. 또 다른 독재가 무수히 많고요. '보수' 세력이 지금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어마어마한 사태를 맞아서 빈사 상태에 빠진 것 같지만 이들이 정신을 차리면 오히려 단련 받은 셈이 돼서 더 강력한 '보수' 세력, 더 괴물인 '보수'가 나올 수가 있어요.

선거법, 헌법, 제도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의 문제에요. 저 '보수' 세력을 가만히 두면 또다시 제2, 3의 국정농단 사태가 생길 수 있어요. 아주 더 세련되게 나타날 거예요."

정 이사장이 말하는 '보수 세력'은, 정치 분야는 물론 학계, 군, 검찰, 언론 등을 포함해 ‘종북 척결’을 국시로 내세운 기득권층이다. 그는 "너도 나도 떠들지만, 잘 보면 자칭 '보수'일 뿐"이라면서 "제대로 된 '보수'를 세우거나, 최소한 분화시켜서 이들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면서, '보수'의 집권 전략에 주목하라고 꼬집었다.

'이 자칭 '보수'들은 자신들이 계속 권력을 잡기 위해서 대항세력, 경쟁세력을 무조건 빨갱이라고 낙인찍어요. 그리고 이게 또 먹혀 들어가죠. 크게 보면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세뇌를 시킨 탓입니다."

"언론이 제대로면 나라가 함부로 되지 않는다"

너도 나도 '보수'를 참칭하는 세상에서, '보수' 언론들 역시 저들에게 보수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동조했다. 해직 언론인 출신인 정 이사장은 진짜 보수를 세우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실은 제일 중요한 게 언론이에요. 언론만 제대로 돼 있어도 나라가 절대 함부로 되지 않아요. 언론이 잘못 하는 거예요. 허위 보도를 하거나, 여론 조작을 하는 언론 때문에 나라가 힘들고 어려워지는 거죠. 언론의 위기는 나라와 민족의 위기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거예요."

2017년 촛불 이후 언론개혁의 목소리가 높은 것처럼, 6월항쟁 직후에도 언론이 변해야 한다는 요구가 터져나왔다. 87년 말 MBC에서 노조가 구성됐고, 이듬해에는 KBS에서 노조가 출범했다. 국민주 모집을 통해 <한겨레신문>이 창간됐고, 89년에는 해직됐던 기자들이 MBC로 돌아갔다. 이때 정 이사장은 MBC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겨레>를 통한 언론 내부의 민주화 작업을, 그는 짊어졌다.

"당시 언론 민주화가 중요한 과제였어요. 언론 개혁이죠. 그래서 <한겨레>에 가자마자 제가 한 역할이 기자평의회를 만드는 거였어요. 언론민주화의 일환으로 편집권 독립을 부르짖으면서, 제도적 장치로 편집위원장 직선제를 내세웠죠. 일부에서 ‘저게 완전히 한겨레신문을 말아먹으려 하는 거 아니냐’는 오해와 갈등이 생겨났어요. '언론민주화와 편집권 독립’이라는 제도적인 장치의 노력을 하는 게 다른 언론사에 확산될 것'이라고 설득을 했더니, 결국 받아들여졌어요."

▲ 한겨레 기자평의회 의결사항.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언론사 내부 민주화와 함께, 정치‧경제 권력과의 유착 관계도 끊어내기 위한 작업이 진행됐다. 촌지 거부 운동. 다른 언론사 기자들의 눈총이 쏟아졌다. 정 이사장은 "기자들의 얼이 뒷받침돼야 편집권 독립이든 뭐든 하지, 정신도 없는 사람이 뭘 하겠냐"고 웃으면서 그때를 회고했다.

"촌지 거부 운동을 벌였어요. 특히 한겨레는 창간된 지 얼마 안 됐고, 또 최초의 진보 언론이다 보니 주목도 받고 영향력도 굉장히 가지고 있어서, 명절이 되니까 선물이 오기 시작하는데… 어마어마하더라고요. 이만한 갈비 궤짝이 오고 선물이 막 들어와요. 집으로도 오고요.

우리가 윤리위원회랑 윤리강령을 만들었어요. 식사는 3만원까지, 선물 받은 건 전부 회사에 반납. 그걸 모아서 양로원이나 보육원에 가져다주고 기사를 썼어요. 선물 받은 건 무조건 윤리위원회에 신고하고, 반납 안 한 건 윤리규정에 따라 처벌을 받는 거죠.

촌지의 경우에는, 대게 장관이나 이런 사람들이 무슨 행사를 앞두고, 보도자료 준답시고 프라자호텔 같은 데서 점심식사를 하자고 해요. 안 가도 보도자료는 보내줘요. 그러면 왜 가냐. 보도 자료를 각대봉투에 담아주는데, 그 안에 또 하나 봉투가 있어요. 20만 원 정도 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다 그냥 가는데, 저는 여러 사람 있는 데서 그 작은 봉투를 끄집어내요. '우리는 윤리 규정상 못 받게 돼 있는 데요.' 딱 빼서 주는 거죠. 다른 기자들이 볼 때, 미운 오리 새끼가 되는 거예요. '너만 잘났냐?' 하는."

6월항쟁 이후 언론 민주화는 그렇게 진척되는 듯 했다. 하지만 2017년의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역사의 퇴보가, 민주주의의 역행이 가장 여실히 드러난 분야가 언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언론 윤리는 골방에 처박혔고, 기자는 '기레기'가 됐다.

그의 친정인 MBC는 단연 군계일학. 정 이사장은 30년 넘게 언론운동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MBC 이사회인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의 이사를 맡았던 시기(2009~2012년) 를 꼽았다. 방문진은 청와대와 여당이 각각 3인, 야당이 나머지 3인을 추천해 총 9명의 이사로 구성된다.

"엄기영 사장이 있을 때(2010년)인데, 엄기영이 나중에 새누리당에 갈 정도로 굉장히 보수적인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를 쫓아내려고 여당 이사들끼리 만나서 별 모의를 다 한 거예요. 자기들이 추천한 이사를 받아주면, 사장 자리를 유지시켜준다는 둥 장난을 쳤는데 들통이 났어요.

내가 이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했어요. ‘당신들끼리 밀실 야합해서 사장 허수아비로 만들고, 야합꾼이냐’, ‘나는 여기 왜 앉아있냐. 이사로서의 내 권한을 완전히 뺏어갔다!’ 이렇게 내가 소리를 치고 난리를 부렸어요. 하도 소리를 지르고 그러니까 다들 도망가 버리더라고요. 나라고 방법이 있겠어요? 그래서 나도 나왔죠.

회의실 밖에 나오니까 <연합뉴스> 기자가 눈이 왜 그러냐고 물어요. 되물었더니 ‘눈이 빨개요, 피가 나요.’ 내가 깜짝 놀라서 화장실에 가서 보니까, 하도 소리를 질러서 눈에 실핏줄이 터져서 피가 고여 있는 거예요. 영화에서만 봤지 눈에서 피가 난 건 나도 처음이에요. 눈에서 피가 났으니 망정이지, 뇌가 터졌으면 큰 일 나는 거죠.

그렇게 아무리 떠들어도 '우리(여당 이사)는 도장 찍어' 이러면 되니까… 폭력을 쓸 수도 없고, 방법이 없잖아요. 김재철(당시 MBC 사장)이 <뉴스타파>의 최승호, 박성제 등 굉장히 많은 후배들 모가지를 잘라 내는데, 나도 해직기자로서 눈 뜨고 못 보겠더라고요."

▲ 정상모 평화민족문화연구원 이사장. ⓒ바꿈

그렇게 MBC는 자꾸 뒤로만 갔다. 정 이사장은 현재 MBC의 상황은 80년대보다도 후퇴했다고 말했다.

"제가 해직을 당한 80년만 해도 보도국에서 상당히 미안하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일부는 울고 그랬죠. 당시 MBC가 독재정권을 옹호하는 데 가장 앞장 선 언론이었는데, 제작거부를 두고 투표를 하니까 1표 차이로 지기는 했지만, 비슷비슷하게 나왔어요. 유신정권의 억압을 워낙 당했기 때문에 내부에서도 청산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막 일어난 거죠. 그런데 지금은 인적 구성이 더 악랄해졌어요. 리모델링이 아니라 재건축을 해야 해요."

정 이사장의 이야기는 초지일관이었다. '진짜 보수를 세워야 한다'. 앞서 그가 말한 대로 업그레이드 된 '보수'가 장악한 MBC를 보자니, 제2의 박근혜, 최순실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빨갱이' 장사로 성공한 '가짜' 보수가 1/4의 표를 가져간, 동시에 광장 가득 타오른 촛불이 세 번째 민주정부를 출범시킨 2017년. 지금이 바로 그 ‘진짜 보수'를 찾을 적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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