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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자 박근혜는 자신이 폭압한 '운동권' 덕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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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수형자 박근혜는 자신이 폭압한 '운동권' 덕을 보고 있다

[6월항쟁 30주년 특집 인터뷰 ①] 이석태 전 4.16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사복을 입고 재판에 출석할까?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재판정에 사복을 입고 선다면, 그건 굳이 이야기하자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이하 민변) 동료 변호사들의 덕이다. 이들이 한 일의 혜택을 박 전 대통령이 보게 됐다는 짓궂은 말에 이석태 변호사(전 4.16세월호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는 웃으며 답했다.

"처음 문제를 제기 한 지 시간이 꽤 지나기는 했지만, 민변 동료 변호사들이 재소자 인권 문제를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 온 것과 연관이 있어요. 서준식 선생이 1991년 발생한 강기훈 사건과 연관되어 다른 혐의로 성동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때 미결수도 헌법상 무죄 추정이 적용되므로 사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거죠. 기본권 침해를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그 이후로 법무부에서 교정 규정을 바꾸어 지금처럼 재소자가 원하는 경우 사복 차림으로 공판정에 출석하게 된 거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변은,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옹호를 위하여 애쓰는 변호사들이 모인 법률가 단체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민변이 30년 전 6월 민주항쟁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문호를 활짝 연 6월항쟁, 그 이듬해인 1988년 5월 창립된 민변은 사법 제도 민주화를 위해 끊임없이 달려 왔다. 민변의 창립 멤버인 이석태 변호사는 사무국장, 회장직을 역임했다.

▲ 이석태 전 위원장. ⓒ프레시안(서어리)

이석태 "6월항쟁은 내 삶의 큰 변화"

때문에 이 변호사에게 6월항쟁은 "삶에 큰 변화를 가지고 온 사건"이다. 6월항쟁 직후 자연스럽게 민주주의 발전을 요구하는 사회적 흐름에 합류해 왔고, 민변과의 인연도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변호사는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2년간의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1985년 변호사가 되었다. 연수원 시절부터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는, 연수원 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던 로펌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연수원 생활 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에 가 있었어요. 선배 변호사들을 돕고 하다 보니 연수원 수료 후 그 사무실 변호사가 됐죠."

이 변호사가 처음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던 로펌은 당시 국내외 큰 기업이 고객인 곳이었다. 대학생 시절 "학생 운동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대학신문> 기자였기 때문에 그 언저리에서 놀았"던 이 변호사에게는 어쩌면 맞지 않는 옷이었는지 모른다.

"소송을 하면 대개 대리하는 당사자가 당시의 대기업일 수밖에 없는데, 제가 보기에는 법리적으로 노동자들의 주장이 옳은 경우가 많았어요. 제 생각이 사무실의 방향이랑 좀 어긋나 있던 거죠."

이런 일 등으로 생각이 많던 때 6월항쟁이 터졌다. "당시 변호사들도 국민운동 본부 등에 직접 참여해 호헌 철폐 등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저는 보통의 변호사로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참여했어요." 6.10 항쟁 당일에도 거리에 있었던 것 같다고 이 변호사는 기억을 더듬어 말했다.

"제가 일하던 법률 사무소가 당시 남산 초입에 있는 도큐호텔이라고 부르는 높은 건물 내에 있었어요. 그 건물 8층에 법률 사무소가 있었고, 그 사무소 내에 남대문 시장이 보이는 쪽으로 제 방이 있었죠. 거기서 보면 서울시청까지 보여요. 그 부근에서 매일 시위를 하니까 자연히 구경삼아 들락날락거리게 되고, 그러다가 광장으로 나가게 됐죠. 연세대에서 이한열 군 사망 사건이 터졌을 때(6월 9일 연세대 앞에서 최루탄에 피격돼, 7월 9일 사망)도 시위 대열에 합류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지금은 제가 넥타이를 거의 안 매고 살지만, 그때는 늘 넥타이에 정장하고 있을 때니까 다른 사람이 보면 넥타이 부대라고…. 아무튼 자주 나갔어요."

기업을 대리하는 로펌이라면 눈치를 주지는 않았을까. "굳이 누구에게 말하지 않고 나가는 거죠. 당시 그 로펌은 엄금까지는 아니지만, 변호사가 근무 시간에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걸 바람직하다고 보기는 어려웠죠. 그래도 변호사는 좀 자유로우니까요." 6월항쟁의 한 복판에 섰던 이 변호사는 그해 가을, 로펌에서 나왔다.

"변호사 생활의 상당 부분을 민변 업무와 연관 지어 보냈다"

같은 해 겨울, 이 변호사는 민변 전신인 청년변호사회(청변)에 우연히 관여하게 됐다. 대학 동기들이 청변과 이 변호사의 연결고리였다.

그 무렵 태동한 시민사회 단체들이 대개 비슷했겠지만, 6월항쟁의 끝에 조직된 청변 또한 학생 운동권의 영향을 다소 받았던 것으로 이 변호사는 기억했다.

"변호사로서 억울한 사람을 돕는다는 보편적인 측면 외에 변호사일 자체를 사회 운동으로 생각했던 경향이 있었습니다. 변호사 부문운동이라고나 할까요. 사회 발전 과정에서 변호사가 기여할 바를 정하고, 그런 일을 다른 부문과 연관 지으면서 해 나가는 거죠. 처음에는 스터디 그룹 유사하게 10여 명의 변호사가 소규모로 같이 공부하면서 여러 방면의 논의를 했어요."

제대로 된 조직을 구성하자는 쪽으로 논의가 진행되자, 당시 주요 시국 사건을 변호하는 선배 변호사들이 만든 단체인 '정의실천법조인회'(정법회)와 합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청변이 해소되고 민변이 됐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건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경험이 없는 젊은 변호사들이 선배들로부터 배우고, 또 그 열정을 바탕으로 조직에 활력이 생기게 된 거지요."

그렇게 민변이 탄생했다. 민변이라는 이름은 조영래 변호사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베어스타운에서 창립모임을 가졌는데, 이름을 지어야 했습니다. 그때 50여 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무슨 협회라든가 하는 식으로 의론이 분분했죠. 대체로 좀 딱딱하고 경직된 이름이 많았는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하니까 뜻이 분명하고 부르기 쉽지 않습니까. 나중에 그 이름을 줄여서 민변으로 하게 된 거지요."

지금 민변은 회원 수가 1000명이 넘지만, 출범 초기에는 51명에 불과했다. "그 중에 젊은 변호사들이 절반쯤 되려나. 당시에 제가 젊은 변호사 축에서는 나이가 좀 많은 편이어서 간사 역할을 했는데, 민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서 일이 많았어요. 그 후 차츰 민변 회원 수가 늘어나면서 일을 분담하게 되었지만, 제 사무실 동료들 또한 민변 회원이어서 이래저래 민변 업무와 관련된 일을 계속하게 됐지요. 그러다보니 민변 회장도 했고, 그 전에는 사무국장도 했어요." 그는 “변호사 생활의 상당 부분을 민변 업무와 연관 지어 보냈다고 하면 되겠다"고 설명했다.
"박근혜, 운동권들의 혜택을 보고 있다"

6월항쟁의 결과 탄생한 민변은 법률 전문성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된 영역을 꾸준히 넓혀왔다. 민변 변호사가 헌법 소원을 제기했던 미결수의 수의 착용 문제뿐만 아니라, 감옥에서의 인권 문제 역시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 재판을 다수 할 때라 법정이나 감옥에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고, 재판 과정에서 기회 있을 때마다 개선을 요구하게 된 거지요. 그렇게 하다 보니 점차 여러 조건들이 나아지게 되었는데, 그 혜택을 우리가 변론한 사람들 외에 다른 피의자나 재소자들이 보게 된 거죠. 예를 들면 변호인 접견권의 보장, 텔레비전 시청이라든가 집필의 편이 등 모두 어느 날 거저 생긴 게 아니고, 일정한 투쟁을 통해 획득해 낸 거예요."

박근혜 정부가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배제시키고자 했던 이들, 이른바 '운동권'을 포함한 시민사회가 끝끝내 지켜낸 헌법적 가치가 오히려 이들을 단죄하려 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권에 까지 이르러 이를 지켜내는 상황(헌법재판소는 탄핵 결정문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서 "헌법 수호 의지가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역설에서 6월항쟁 이후 지난 30년 동안 진척된 민주주의를 새삼 목격하게 된다.

"불과 20년 전에는 피고인들이 재판정 가운데 서서 수갑이나 오랏줄에 묶여 재판을 받기도 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변호사와 피고인들의 노력으로 피고인들의 손이나 팔에서 수갑과 오랏줄을 풀게 하고, 자리에 앉히고, 그리고 변호사 옆에 앉게 된 거죠. 말하자면 이게 다 역사가 있는 겁니다. 6월항쟁의 성과가 모든 면에 미치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잘못된 구태를 지적하여 고치고, 형사소송법이 바뀌고 해서 지금처럼 어느 면에서는 미국 영화에서 보는 것과 큰 차이가 없는 모습이 됐습니다."

이 변호사는 "예전에는 수사 기관에서 피의자가 조사를 받을 때 변호사가 참여를 하지 못했어요. 접견 시에도 교도관 등이 옆에서 듣는데 하기도 했죠"라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 변호사의 말에 박 전 대통령이 변호사와 함께 검찰 조사를 받고, 7시간 동안 조서를 검토했다는 뉴스가 곧바로 떠올랐다.

"이런 잘못된 제도나 관행이 고쳐진지 불과 10년이 되지 않았어요. 조사가 끝난 후에야 변호사를 따로 만났고, 조사 때는 변호사가 입회를 할 수 없었어요. 조서의 도장도 본인이 혼자 내용을 보고 찍었습니다. 지금은 조사 자리에서 변호사가 다 보고 확인하지요."

이 변호사가 언급한 '변호인의 피의자 신문 참여권'은 지난 2007년 6월 형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법률에 명시됐다. 지금은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권리가 법률에 보장된 지 만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 역시도 6월항쟁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이 법률의 개정을 이끌어낸 대법원 판결(2003년, 송두율 교수 사건)을 담당한 김형태 변호사도 청변을 거쳐, 민변의 회원이다. 두 변호사는 함께 법무법인 덕수를 이끌고 있다.

▲ 이석태 전 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강기훈 사건, 더 나은 변호사가 실무를 담당했더라면…"

이 변호사는 매향리 미공군 사격장 소음 피해 소송, 동성동본 금혼 폐지와 호주제 폐지 헌법소원, 일본군 '위안부' 헌법 소원 사건 등 각종 사회적 관심이 큰 재판에도 참여했다. 6월항쟁이 "사법부의 독립에도 좋은 영향을 줬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결과라고 이 변호사는 설명했다.

1987년 이후 활발하게 전개된 시민사회운동과의 결합 또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성과를 이야기하면서 이 변호사는 계속 "좋은 동료들과 해서 얻어낸 결과"라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저희가 6월항쟁 이후에 민변을 만들었어요. 또 중요한 사회적 의미가 있는 소송들은 변호사 혼자 할 수 없어요.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협력해야 하는데 그게 컸죠. 일례를 들면, 호주제 폐지문제는 초기에 변호사들이 기획했지만, 여성단체는 말할 것도 없고 계속 진행 해 나가면서 점점 더 많은 시민사회단체의 도움을 얻어서 된 거예요. 이들 시민사회 단체는 대개 6월항쟁의 산물이었죠."

하지만 6월항쟁은 군사 독재 세력인 노태우 씨에게 대통령 자리를 또다시 내어 주며 미완의 혁명으로 종료됐다. 그 한계는 여기저기에 상흔으로 남았다. 이 변호사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30년의 변호사 활동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묻자, 그는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1991년)을 꼽았다. 6월항쟁 이후에도 교체해내지 못한 군사 독재 정권의 연장, 노태우 정권에서 벌어진 비극이다.

강기훈 씨가 누명을 벗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4년. 지난 2015년 열린 재심 공판에서 대법원은 강기훈 씨에게 최종 무죄를 선고했다. 이 변호사는 20여 년 동안 변호인단의 일부로 강 씨의 변호를 맡았다.

"글쎄… 결국 본인은 늦게나마 무죄를 받아서 다행이긴 한데요, 비록 노태우 정권 하라고 해도, 제가 조금 더 경험이 있고 주도면밀했더라면 초기 재판 당시 무죄를 받지 않았을까, 강기훈씨의 억울함을 좀 더 일찍 덜어드리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제 역할이 당시 변론을 이끈 작고한 김창국 변호사님과 박연철 변호사님을 도와 실무적인 일을 하는데 있었지만요."

이 변호사와 강기훈 씨가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도, 이 사건을 조작해 낸 이들은 승승장구했다. 주임검사였던 신상규 씨와 검사 안종택 씨는 모두 검사장을 지냈고,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김기춘 씨는 국회의원과 청와대 비서실장까지 요직을 두루 거쳤다.

당연히 누구도 처벌 받지 않았다. 국가와 당시 주임검사 신상규 씨, 강 씨의 필적을 감정한 김형영 씨 등을 대상으로 한 민사 소송만이 진행 중이다. 이 변호사는 "국가 책임, 김형영 씨 본인의 책임은 물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검사들 책임은 어떨지…"라고 말했다. 형사상 책임은 공소시효가 만료돼 묻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거짓을 만들어 내고, 책임지지 않는 김기춘과 같은 권력들은 그렇게 적폐로 쌓였다. 그리고 김기춘이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던 2014년, 세월호에 과적된 적폐는 결국 참사로 이어졌다.

지난해 9월 박근혜 정부에 의해 강제 종료된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특조위) 위원장을 맡았던 이 변호사는 이 대형 비극을 어떻게 봤을까. 이 변호사는 일본에서 중고 배를 수입해온 때부터 해운 관련 규제 완화 그리고 구조 과정에 이르기까지 각종 문제들을 단계별로 지적했다. 그리고 참사 당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행실 문제를 지적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참사 당일 오전에 뭘 했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요. 오후에는 머리를 하고, 세월호가 이미 다 가라앉은 뒤인 오후 5시에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갔습니다. 총체적으로 재난을 예방하고 참사 발생 시 구조해야 할 국가 재난 관련 기구가 부실한 겁니다. 사회적 신뢰가 무너진 거고요."

세월호 참사를 말하는 이 변호사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다행히도 무너진 신뢰가 회복되는 모습이 보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집회에서였다. "변호사로서 종종 시민사회 단체 활동가들과 협력해서 일을 해온 저는 대규모 집회 때는 사실 좀 걱정이 있어요. 저러다가 혹 폭행이나 폭력 사태가 발생하여 대의에 손상이 되지 않을까. 이번에도 보니 촛불집회 초기 시민들이 경찰 버스 위에 올라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서로 자제하고, 오히려 차벽에 꽃이나 재미난 내용이 들어 있는 스티커를 붙여 평화적인 집회를 유도하더니, 나중에는 스티커 등을 떼 말끔하게 하는 등, 저 스스로 이번 촛불 집회는 참여 자체가 새로운 경험이고 공부가 됐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도 맨 앞에서 집회를 이끌었지요. 때문에 저는 이번 촛불 집회로 박근혜 정부 4년을 지나면서 어려움에 처했던 우리 사회의 민주적 시민 의식이 커다란 진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이 변호사는 "만약 6월항쟁 같은 것이 없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 같다"고 현재 진행형인 6월항쟁의 의미를 설명했다. "더 이상 독재로 회귀하거나 국민들의 민주적 바람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는 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죠. 촛불은 보다 발전된 형태에요."

6월항쟁의 미래가 촛불집회로 나타났다면, 2017년 촛불집회는 어떤 모습으로 평가해야 할까. 촛불을 들고 나선 시민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을까. 난해한 질문에 이 변호사는 웃었다.

"우선 이명박, 박근혜 정부 10년을 겪으면서 기초가 손상된 사회 정의와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또 그것이 무엇이든 각자가 하고 있는 일을 민주적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해나가야 하겠지요. 그리고 공화국 헌법 1조, 국민 자신이 주권자라는 것을 늘 자각하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정부가 잘못할 때에는 자기 스스로 먼저, 그리고 동료들과 연대해서 나서고 외쳐야 할 준비를 위해서 말이지요."

이 변호사의 답변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과 무척 흡사해 보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연대를 강조한 이 변호사와 잘 어울리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그의 사무실 입구에 걸려 있는 액자에는 故 신영복 선생님께서 써 주신 문구 '함께 하는 삶'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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