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대선이 문재인 후보의 당선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여러 이야기들을 남겼지만 에너지 정책 측면에서는 탈핵 정책으로의 선회가 큰 기대를 모은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문재인 후보를 포함하여 당선 유력 후보 대부분이 노후 원전 폐쇄와 신규 원전 건설의 철회 또는 신중한 검토를 약속했고 재생가능에너지의 대폭 확충에 공감의 뜻을 여러 차례 밝혔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세먼지 대책의 일환으로 석탄화력 발전의 축소 또는 가동 조절까지 언급되었다. 에너지 정책에 이렇게 많은 비중이 실리고 언론에 노출된, 그것도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의 핵발전 중심 정책 기조까지 뒤집는 방향에 큰 동의가 이루어진 것은 이례적인 일임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은 몇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한국의 핵발전 의존 에너지 정책은 후쿠시마 사고라는 큰 펀치를 맞은 이후에도 그다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밀양과 청도 송전탑 반대투쟁, 삼척과 영덕 그리고 기장의 주민투표, 이어진 핵발전소 비리와 크고 작은 사고 같은 작은 잽들이 누적되었고 경주 지진이 마무리 펀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영남권 기반의 보수 후보들조차 부산, 경주, 울산, 영덕의 지진과 핵발전소 위험 우려에 따른 지역민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북핵 위기론이 퍼지면서 남한 핵무장론이 일각에서 나오기도 했지만 그다지 힘을 얻지는 못했다. 탄핵 정국 이후 이른바 '거꾸로 기울어진 운동장' 대선 국면에서 무리한 핵발전 확대 정책과 핵무장 정책은 '적폐'의 일부로 인식되기도 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경제성장과 에너지 공급을 중시하는 홍준표, 유승민 후보가 대선 과정에서 급격한 에너지 전환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탈핵 정책에 나서서 반대하지 않은 것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핵발전 체제와 핵발전 지지 세력이 그렇게 쉽게 물러설 리는 없다. 어떤 후보가 '소신 투표'를 외치고 어떤 후보가 '샤이 보수'의 존재를 기대했다면, '탈핵 포퓰리즘'에 빠져버린 유력 후보들의 발언을 걱정하면서도 앞에 나서서 핵발전 확대에 찬성하는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는 이른바 '샤이 친핵'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탈핵 포퓰리즘?
일반적으로 포퓰리즘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무책임한 선심성 정책을 쓰는 정치 행태를 일컫는다. 아르헨티나의 에바 페론이 전형적인 경우지만 한국에서는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너무 넓게 쓰이고 있긴 하다. 아직 한국에 탈핵 정책과 운동에서 어디 구름같이 모인 대중과 열화 같은 성원이 있었는지, 그것이 이번 조기대선의 표심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찬핵 언론은 불만을 표시한다. 예를 들어 <주간동아>의 "대선후보 탈핵 주장에 원자력계 뿔났다"라는 제목의 5월 3일자 기획기사는 "반핵은 누구나 해도 친핵은 아무나 못한다"라는 자극적인 문구가 눈에 띈다. "원자력 전문가도 아닌 대선후보들이 탈핵을 주장한 것은 전적으로 표 때문"이며, "유권자들이 원전 사고에 대해 갖는 우려에 편승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마침 핵발전소 사고를 묘사한 영화 <판도라>까지 개봉해서 이 포퓰리즘을 부추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5000만 명 넘은 인구에 발전량의 1/3을 핵발전에 의존하는 한국에서 탈핵은 무책임한 것이며, 핵발전을 포기할 때 전기요금이 최대 79.1%까지 상승할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인다. 이 기사 외에도 후보자 정책검증의 일환으로 에너지 정책을 비교 검토하면서, 후보들의 탈핵 정책들이 구체적인 실현 방안이 없거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보도들이 있었다.
찬핵을 주장해야 할 후보들이 응당 내야 할 목소리를 내지 않으니, 답답해진 찬핵 학계 인사들이 직접 나서기도 했다. 지난 3월 29일 한국원자력학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치권이 정치적 논리로 탈핵을 바라보고 있다며 우려를 표한 것도 한 사례다. 황주호 한국원자력학회장은 "최근 원전에 대한 비과학적 주장과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에 편승해 정치권에서 대안 없는 탈핵 주장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 원자력 전문인들은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말하며, 김대중 정부가 핵발전 확충을 늦추는 바람에 2011년에 전력 부족 사태가 벌어졌고, 반면에 노무현 정부는 핵발전소 4기 건설을 허가해서 현재는 전력 예비율이 좋아졌다고 구체적으로 지적하기도 했다. 대선 과정에서 탈핵이 정책 기조로 굳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한편, 차기 정부에게 미리 경고를 보내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논쟁은 없었다
탈핵운동에서 제출한 "탄핵 이후 탈핵"이라는 구호는 그럴 듯 했고 촛불 시민들의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오히려 대선 국면에서 탈핵-찬핵의 두드러진 논쟁이 부재했던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한국의 핵발전 산업 규모나 에너지 정책과 관련된 이해 관계들을 생각하더라도, 이번 대선에서 에너지 이슈에 관한 논쟁은 확실히 두드러지지 않았다. 탄핵 정국, 적폐 청산, 낡은 색깔논쟁 같은 더 큰 프레임이 압도한 탓이 컸지만, 달리 생각하면 탈핵을 포함하는 에너지 정책들이 그다지 코앞의 현실로 다가오지 못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탈핵 약속도 충분히 치열하거나 진지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것이고, 반대 편에서 보면 핵발전 이슈를 먼저 꺼내어 대중의 주목거리로 만드는 것이 핵발전 업계에게도 그리 좋을 게 없는 국면이었다는 뜻이다. 때문에 한국의 조건에서 실제로 재생가능에너지를 에너지 믹스에서 몇 퍼센트까지 설정할 수 있는지, 전기요금 체계와 에너지 세제를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전력산업 구조를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등과 같은 정말 중요한 문제들은 여전히 잠재적 논점으로 남아 있다. 탈핵의 입장에서든 찬핵의 입장에서든 언론사들 스스로도 대선 시기 유행했던 '팩트 체크'에 소홀했다.
어쨌든 원자력 업계는 뿔이 났을지언정 대체로 조용한 로비에 주력했고,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 자신들의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여 고삐를 더욱 죌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인 논점이 전개되고 새 정부의 에너지 전환 의지도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4월 14일 지역 탈핵운동 조직들이 함께 문재인 후보와 체결한 정책 협약서에는 현재 건설 중인 신고리 4호기와 신울진(신한울) 1, 2호기의 건설을 잠정 중단할 것과 사회적 합의를 통한 운영 여부 결정이 포함되어 있는데, 에너지 당국과 핵산업계에서는 27% 정도 공정이 진행된 신고리 5, 6호기의 건설 중단조차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논점이 구체화되면 정부 여당과 언론들도 흔들고 흔들리는 상황에 처할 것으로 예상된다.
탈핵은 소신이었고 찬핵은 샤이였을까? 결국 탈핵이 소신이었는지 선심이었는지, 찬핵이 언제까지 샤이 찬핵으로 조용히 있을 것인지 아니면 스트롱 찬핵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인지를 알게 될 싸움은 이제부터 새로 시작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소신과 정치세력으로서의 정강이 있겠지만, 어차피 그것을 정치를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만 맡겨 둘 일이 아니다. 탈핵을 소신으로 굳히게 하고 나아가서 눈앞의 현실로까지 함께 만드는 것이 '탈핵정치'다. 새 정부와 함께, 때로는 그에 맞서서 탈핵을 위한 논쟁과 데모에 더욱 주저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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