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섬학교 외연도행은 배편 관계로 개강일을 6월 4(일)~5(월)일로 변경코자 합니다. 착오없으시기 바랍니다
신비함이란 한 자락 안개에 싸인 섬과 같습니다. 안개 걷히면 섬 또한 고단한 삶의 터전. 그럼에도 사람은 끊임없이 신비로움을 추구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신비가 없다면 삶은 더 이상 신비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사람은 현실에 눈 떠야 살 수 있는 존재인 동시에 신비에 눈 감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신비란 삶의 고통으로부터 삶을 견뎌내게 하는 빛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또 섬의 신비, 삶의 신비를 찾아갑니다. 여름으로 가는 길목, 서해바다 섬들은 자주 안개 속으로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는 합니다. 그 모습은 선계의 풍경처럼 신비롭습니다.
6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는 제60강으로 6월4(일)-5일(월) 1박2일 일정으로 서해 바다 신비의 섬, 외연도(外煙島)로 갑니다. 이름처럼 외연도의 해무는 서해 어느 섬보다 아름답습니다. 외연도는 또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당산숲이 있는 섬이기도 하지요. 천연기념물 제136호 당산숲의 상록수 거목들은 신령함이 가득합니다. 이 숲의 수호신은 2천 년 전 중국의 한나라 왕 유방에게 쫓겨 외연도로 망명했던 제나라 왕의 동생인 전횡 장군입니다. 당산숲은 역사와 전설의 무대이기도 하지요.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가고 싶은 섬’, 외연도는 KBS ‘1박2일’ 등 방송매체를 통해 유명세를 치르고 있으나 여전히 순박한 인심을 잃지 않고 사는 섬이기도 합니다. 초여름, 삶의 신비를 찾아 떠나는 섬 여행에 초대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6월 답사지인 <보령 외연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대천항, 어시장
유람 떠났던 배가 대천항으로 돌아온다. 생의 봄날을 다 소진해버린 노년의 유람객들, 가는 봄의 끝자락이라도 잡으러 나왔다. 어떤 이는 오늘 유람이 생의 마지막 유람이기도 할 것이다. 생이 지속될 수 없는 것처럼 유람 또한 계속되지 않는다. 이제 선착장에 발 디디면 노인들은 다시 무거워진 발 이끌고 온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마음은 평생을 떠다니면서도 몸은 떠돌 수 없었던 서러운 생애들. 어느새 바다 위를 흐르던 경쾌한 유행가 가락은 간데없고 구슬픈 단가가 흐른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을 찾아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 하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한들 쓸데가 있느냐.....사후에 만반진수는 불여생전 일배주만 못하니 세월아, 가지마라."
대천항 어시장은 쏟아져 들어오는 수산물과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활력이 넘친다. 수협 어판장에는 경매가 끝난 아귀들이 산처럼 쌓였다. 횟집 수족관마다 철만난 물고기들이 철없는 물고기들과 나란히 잡혀와 가쁜 숨을 헐떡인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왔다가 영문 모르고 사라지는 것들이 물고기뿐이랴. 어판장 고무대야에는 광어, 우럭, 놀래미, 농어, 문어, 도미들이 안간힘으로 퍼덕이며 탈출을 시도해 보지만 부질없다. 죽음에서 탈출할 수 있는 자 누가 있겠는가. 물고기들의 운명을 쥐고 생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는 저 장사꾼들도 생사의 판관 앞에서는 한낱 물고기에 지나지 않는 것을.
어판장 한 편에는 산 채로 팔리지 못하고 그물에서 말라가는 생애들이 널려 있다. 대체 퍼덕퍼덕 헤엄치던 생의 바다를 앞에 두고 널어 말려지는 물고기들의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 사람 또한 어느 순간 삶을 누리던 생애의 벌판에 버려져 저처럼 말라가게 될 것이다. 허기가 몰려온다. 회 한 접시 하고 가라는 상인들의 호객은 끝이 없고 생사의 바다를 헤엄치는 나그네의 의문도 끝이 없다.
배를 타기 전에 끼니를 채울 생각이지만 온통 횟집뿐인 포구에서 혼자 몸의 나그네는 밥 한 그릇 사먹기도 쉽지 않다. 관광객들의 시대, 이 시대는 더 이상 나그네가 환영받는 시대가 아니다. 시장통을 몇 바퀴 돌아도 반기는 식당이 없다. 반겨주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아는 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번번이 입구에서 퇴짜 맞는다. 단체 관광객들을 상대하는 장사꾼들에게 걸망 맨 나그네는 손님이 아니다.
어시장에서 허드렛일로 연명하는 일용노동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음식점은 관광지에서 천대받는 자들의 유일한 급식소다. 일꾼들은 짜장면과 소주를 시키고 나그네는 짬뽕 한 그릇을 시킨다. 얼큰한 짬뽕 국물을 기대했으나 쇼팅 기름에 버무려진 국물은 느끼하다. 어쨌거나 짬뽕 한 그릇에 나그네의 뱃속은 든든해진다. 온갖 산해진미에 대한 갈망도 짬뽕 한 그릇이면 족하다. 이제 어시장의 값비싼 해산물도 배부른 나그네에게는 무심한 물건일 뿐. 삶의 허기란 것도 고작 이런 것일까. 짬뽕 한 그릇으로도 꽉 채워지고도 남는.
파도 속에서는 파도가 되고
오후 두 시, 외연도행 여객선은 정시에 출항한다. 대천항을 떠난 배는 호도, 녹도를 들러 4시는 돼야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파랑에 배가 심하게 흔들린다. 나그네의 뱃속도 울렁인다. 섬에서 오래 살았지만 느린 배만 타고 다녔던 나그네에게 쾌속선은 여전히 낯설다. ‘버스는 앞자리, 배는 뒷자리'란 격언이 있다. 배멀미를 피하는 데는 기관의 무게로 안정적인 뒷자리가 유리하다. 자리를 옮기니 조금 낫다. 그도 잠시, 먼 바다로 나가자 울렁임은 다시 커진다.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바다에서 사람이 파도를 이길 도리란 애초에 없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한 노력은 부질없다. 어쩔 것인가. 한동안 허둥대던 나그네는 중심을 잡으려는 몸부림을 그만둔다. 그저 파도에 몸 맡겨보자. 파도가 출렁이는 대로 몸도 따라 출렁이며 가자. 파도 속에서는 파도가 되고, 바람 속에서는 바람이 되어 가자. 파도는 거세지고 배는 더 심하게 요동을 처도 나그네의 몸은 점차 평온을 되찾아 간다.
외연도 당산숲, 산신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사람은 걷기 위해 자주 섬으로 가야 한다. 이 나라에서 자동차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길은 섬뿐이다. 외연도처럼 카페리호가 다니지 않는 먼 섬일수록 걷기의 천국이다. 외지인들이 섬으로 차를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섬에게도, 섬을 찾은 사람들 자신에게도. 나그네에게 섬의 시간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다. 느릿느릿 걷고 또 걸어도 작은 섬에서는 시간이 모자라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남아돌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남는 시간을 그저 걷는다. 오로지 걷고 또 걷는다. 섬에서는 차에 대한 기억을 철저하게 잊는다. 한 번도 땅에서 발 떼어본 적 없는 것처럼 걷는다. 호흡조차도 발로 한다. 어느 순간 섬은, 대지는 온 몸을 열고 나그네를 받아들일 것이다. 4시, 여객선이 외연도항으로 입항한다. 외연도항은 들고나는 어선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하다.
외연도는 대천항에서 서쪽으로 53km. 충남 보령시 70여 개의 섬들 중 가장 먼 섬이다. 외연도를 비롯해 청섬(대청도), 작은 청섬(소청도), 수수떡섬(수도), 밧갱이(횡견도), 느래(황도) 등 10여 개의 유·무인도로 구성된 외연열도의 중심이다. 나그네는 선창가 민박집에 여장을 풀고 숲으로 간다. 섬에 와서 해변이 아니라 숲으로 가는 것은 섬의 당산 나무들 때문이다. 초등학교 뒤에 외연도의 당산숲이 있다. 3ha의 당산은 동백나무, 후박나무, 팽나무, 식나무, 찰피나무, 고로쇠나무, 돈나무 등 수백 년 된 늘 푸른 나무와 잎 지는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 숲의 수호자는 산신이 아니다. 장군이다. 섬사람들의 뱃길을 지키기에는 당산 산신령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외로운 섬 먼 바닷길은 험하기도 했겠지. 마을사람들은 그 옛날 이 섬으로 망명했다고 전해지는 중국의 한 장군을 신으로 추대해 당산숲에 모셨다. 사당의 주인은 진시황 사후 제나라를 세워 왕 노릇을 하다가 한고조 유방에게 패망한 전횡 장군이다.
제나라가 멸망한 뒤 전횡은 50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황해의 섬으로 도망쳤다. 후환을 없애기 위해 유방은 사자를 보내 전횡을 소환했다. 한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향하던 도중, 전횡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전횡의 부하들도 모두 따라 자결했다. 전횡이 숨어 살던 섬이 오호도(嗚呼島)라고 전한다. 고려 말 문장가 이숭인은 오호도에 대한 시를 남겨 전횡을 기리기도 했다. 그 오호도가 지금의 어느 섬인지 확실한 증거는 없다.
외연도의 전설은 그 섬이 외연도라 한다. 외연도에서 남으로 15km 떨어진 군산의 어청도 사람들은 어청도를 오호도라 한다. 중국 청도 부근 즉묵시 앞바다에는 전횡도가 있다. 그곳 사람들은 그 섬을 전횡의 섬이라 한다. 전설은 전횡 일행이 망명한 것으로 전하지만 망명이 아니라 점령일 것이다. 패주한 군사들이라 하나 500의 큰 군사 집단이 작은 섬 하나쯤 차지하는 일은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2000년도 전에 일어난 사건을 오늘의 우리가 확인할 길은 없다. 그 섬사람들이 그렇게 믿으면 그렇다. 전설이란 본래 진위를 따질 것이 못 된다.
외연도 사람들은 전횡 사당에 제사 지내기 전에 먼저 산신에게 제를 지낸다. 장군 신에게 밀려난 산신에게 미안함이 남았던 것일까. 섬사람들은 장군 신을 주신으로 모시지만 나그네는 권력 다툼에서 패망한 장군보다는 한때 이 숲의 주인이었던 인자한 산신에게 마음이 더 끌린다. 산신에게는 산과 바다의 나물 등 간단한 제물을 올린다. 고기는 올리지 않는다. 산신은 절대 고기는 받지 않는다.
이 땅의 산신들이야말로 진정한 평화의 신이었다. 산신들은 호랑이가 호환을 입힌다 해서 벼락을 내려 응징하지 않았다. 사나운 호랑이마저 온순하게 길들여 타고 다녔다. 이 산하의 산신들은 생명을 해치고 그 피로 연명하는 유일신교의 신처럼 잔인한 신이 아니었다. 생명을 살리고 키우는 신이었다. 그런데 그 많던 산신들, 해신들, 평화의 신들은 다들 어디로 간 것일까. 나그네는 숨어버린 외연도 산신을 만나기 위해 외연도의 밤길을 잠행한다.
물고기는 어부들이 잡고 이익은 상인들이 얻고
섬은 새벽부터 분주하다. 사내들이 어선을 타고 나가 밤새 잡아온 물고기와 해산물들이 갑판에 산처럼 쌓였다. 사내들은 광어, 우럭, 꽃게 따위 활어들을 골라 수족관에 살리고, 여인들은 아귀와 꼴뚜기, 낙지, 문어, 밴댕이, 장대, 각시볼락, 넙치새끼 따위를 추려낸다. 멸치와 아귀는 박스로 담겨 쌓인다. 150여 가구가 사는 이 섬에만 70여 척의 크고 작은 어선이 있다. 섬에서 잡힌 물고기와 해산물들은 전부 대천항의 수협 위판장을 통해 뭍으로 팔려 나간다. 안강망 어선들은 밤 열두 시 경부터 고정식 안강망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들을 거두기 시작한다. 적어도 새벽 다섯 시까지는 섬으로 돌아와야 한다. 수송선이 기다리고 있다가 수산물들을 취합해 대천으로 싣고 간다.
같은 활어도 낚시로 잡은 것이 더 비싸고 그물로 잡은 것은 값이 싸다. 신선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활어 시세가 많이 떨어졌다. 우럭이 킬로 당 7~8천원, 농어는 킬로에 4천원도 못 받는다. 광어는 7천5백 원. 낚시로 잡은 것은 그것보다 일이천 원 더 받는다. 아귀는 30킬로 한 상자에 비싸야 2만원, 쌀 때는 1만3천 원을 간신히 받는다. 수협 위판 가격이다. 어민들은 이렇게 싼 값에 활어와 선어들을 내다 팔지만 뭍의 최종 소비자들은 값 비싼 자연산 활어를 먹을 엄두도 못 낸다.
어민들 손에서는 킬로 당 몇 천원에 불과한 생선들도 도시의 횟집에서는 자연산이란 이름하에 10만 원을 훌쩍 넘겨받는다. 열 배 이상 값이 부풀리는 것이다. 어민들이 잡아온 물고기와 해산물들의 이익은 어민들에게 돌아오지 못한다. 고스란히 중간 유통업자들, 횟집 주인들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그럴수록 어민들은 더 많이 잡기 위해 어린 것들까지 싹쓸이 한다. 불법 어업이 어민들의 욕심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잘못된 유통구조 개선에는 노력하지 않고 손쉬운 단속에만 열을 올린다. 어민들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고 어민들을 범죄자로 만든다.
중국인 선원, 황지엔 쩡의 거룩한 밥상
안강망 어선 '오대령호'에서도 거둬온 수산물을 추리느라 분주하다. 이 배는 선장이 선주다. 선장 포함해서 선원이 다섯. 그 중 둘이 중국인이다. 한족 출신이라 언어가 통하지 않는 것이 서로간의 어려움이다. 선원들과 마을 여인들이 수산물 분류 작업을 하는 동안 요리사 출신의 선장이 아귀찌개를 끓이고 밴댕이를 굽고 갑오징어 김치볶음을 만들어 아침 밥상을 준비한다. 스물아홉 살의 중국인 선원 황 지엔 쩡은 생선 손질을 한 뒤 쌀을 씻어 밥을 짓는다. 손이 물에 불어 하얗다.
선장은 제주 김녕 출신이다. 해녀였던 누이가 물질 왔다가 외연도 남자와 결혼한 까닭에 선장도 누이를 따라와 열다섯 살 때부터 배를 탔다. 밥 짓는 화부 일부터 시작해 35년간 배를 탔으니 어느새 나이 오십 줄이다. 친형은 잠수하다 죽었고, 매형도 배를 타다 죽었다. 누이는 섬을 떠났으나 선장은 외연도 여자랑 결혼해 외연도에 남았다. 선장도 한때 고군산열도 근해에서 키조개잡이 다이버를 하다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으로 살았다. 의식을 회복하자 병원을 나와 민간요법과 운동으로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됐지만 후유증이 남아 여전히 하체에 힘이 없고 말이 어눌하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게 됐을 때는 절망에 빠져 농약을 먹었으나 경비정에 실려가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분류 작업을 하던 여인들이 아침을 먹고 나서야 선원들은 다 식은 밥을 먹는다.
"다 식었어. 뎁혀야지. 밥은 차도 국은 뎁혀야지."
"숟가락 다섯 개만 씻어와."
한국인 선원이 중국 선원 황지엔 쩡에게 심부름을 시키지만 황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한국인 선원은 화를 내며 욕을 한다. 그때 옆 어선의 선장이 건너오며 말린다.
"그러지 마. 내가 일본 배 탈찍에 서럼 많이 받아봐서 알어. 말 못알아 듣는 서럼이 얼마나 큰디 그랴."
중국인 선원 황지엔 쩡은 벌써 세 그릇째 밥을 먹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왼손으로 밥그릇을 받치고 찬 밥덩이를 입에 넣는다. 생애여! 눈물겹고 거룩한 밥상이여!
섬학교 제60강 <외연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6월4일(일)
09:00 서울 출발(아침 8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0강 여는 모임
-대천항 도착
-점심식사(<청기와식당> 우럭미역국)
-대천항 출항
-외연도 도착
-숙소 도착(어촌계민박)
-외연도 걷기(5km)
어촌계민박-초등학교-약수터삼거리-노랑배-마당배-어촌계민박
-저녁식사 겸 뒤풀이(<추억펜션식당> 생선회와 꽃게찜)
6월5일(월)
06:00 기상. 아침산책
-당산 및 고래금해변 산책(3km)
-아침식사(<어촌계식당> 아구탕 또는 매운탕)
-외연도 출항
-대천항 도착
-대천해수욕장 산책
-점심식사(<서씨네큰댁식당> 복국)
-어시장 장보기
-서울 향발. 제60강 마무리모임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접이식 우산),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미지참시 승선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1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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