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무한경쟁의 치열함 속에서 하루하루가 다르게 새로이 거듭나고자 애쓰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의 역사만 거꾸로 흐른다. 삼일절 기념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성공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의 꿈을 이뤄냈"다고 자랑하던 그의 입은 침이 마르기도 전에 '장미꽃 한 송이도 피울 수 없다'던 그 쓰레기통의 역사를 재생해 내고 있다.
정책안이 마련될 때부터 기득권의 저항에 이리 치이고 저리 받혀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세종시 문제가 국무총리의 처세술 단계에서 한나라당내의 권력다툼의 국면으로 이동하더니 이제 이명박 대통령의 '중대결심'이라는 대국민 협박의 수준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청와대의 일각에서는 그것이 국민투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지만, 말 바꾸기가 일상처럼 되어 버린 그 쪽의 관행들을 기억한다면 이 또한 마음 놓고 믿기에는 뭔가 예후가 좋지 않다.
국민투표에 대한 헌법적 논의는 이미 끝났다
실제 이 시점에서,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헌법적으로 가능한 것인가 내지는 합헌적이냐에 대한 논의는 별로 의미 있어 보이지 않는다. 헌법재판소가 이미 헌법 제72조에 의한 국민투표는 최소한으로 좁게 해석해서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함부로 실시하여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이 이를 남용하여 어떤 정치적 떡고물을 누리고자 한다면 그 대통령은 탄핵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엄포(?)까지도 던져 놓았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 입법조사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언론들에 의해 우리나라에서 내노라 하는 헌법학자들의 의견들까지도 모두 취합되어 그 어이 없음이 입증됐다.
세종시 문제는 입법자인 국회가 판단할 사항이지 국민투표로 물어볼 사안은 아니라는 의견에서부터, 설령 국민투표에 회부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미 존재하는 세종시 특별법의 내용을 바꾸기 위해서는 국회가 그 법률을 개정하여야 하기 때문에 국민투표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의견, 더 나아가 이로 인해 헌법해석을 비롯하여 세종시 문제, 국토의 불균형발전의 문제 등등 정치·사회·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야기되는 극심한 국론분열의 양상들은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는 묵시론적 비관론까지, 대세는 부정적 입장에 고착되어 더 이상 첨언이 불필요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헌법 위에 있는 '떼법'들고 나오려고?
요컨대, 대통령이 내어놓는 국민투표라는 대국민협박은 적어도 헌법적으로는 술 한 잔의 안주거리도 되지 못하는 아이템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국민투표라는 카드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가 취임초기에 즐거이 언급하였던 '헌법 위의 떼법'에 다름이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이 '떼법'에 있다. 차 한 잔의 여유만 가지고 생각을 해 봐도 위헌이라는 결론이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이 국민투표라는 발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세상의 이목들 앞에 당당히 내어 놓을 수 있는 대통령과 그 일행들의 후안무치한 행태가 문제의 핵심이다.
"하면 된다"라는 군사문화에 익숙해서인지 아니면 불도저식의 막개발에 중독이 되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무엇이든 걸림돌이 있으면 그냥 밀어 붙이거나 혹은 각개격파 내지는 우회공격의 수순으로 공략해버리는 저 폭력적 사고방식이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의 머리를 채우고 있다는 점이 걱정인 것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자기 사람들로 채워져야 하는 인사에서부터 "강남"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의 수도사수론을 그대로 복제해내는 세종시 수정론에 이르기까지 위법과 탈법과 권한남용으로 점철하면서 법치주의와 입헌주의의 이념을 철저하게 유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리가 탐이 나면 검경이라는 무시무시한 권력을 이용하여 먼지를 털고 협박해서 자리를 뺏으며 그것도 안 되면 없는 일도 만들어 징계퇴직시켜 그 자기를 자기 사람으로 채워 넣고, 야당이건 친박이건 반대세력이 강하여 국회를 좌지우지 하기 어려우면 아예 국회라는 입법절차를 우회하여 국민투표라는 편법을 동원, 국민들의 의사를 왜곡시키고자 하는 그 무리한 권력의지가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기시감, 1공화국의 반복인가?
우리는 이런 질곡의 양상들을 이미 목도하고 그 처참한 결과에 몸서리 친 바 있다.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랴"라는 외신기자들의 비아냥 대상이 되었던 지난날 제1공화국의 헌정사가 바로 그 것이다.
당시 이승만대통령은 자신을 추대한 한민당의 요구를 저버리고 자기 사람을 국무총리의 직에 오르게 했다. 이 바람에 한민당이 지배하던 국회가 자신에게 대립각을 세우게 되자 그는 이 걸림돌을 피해가는 우회술을 도모하였다. 국회라는 정상적인 정책결정과정을 저버리고, '국민의 이름으로' 주요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 '국민의 이름'을 내 걸기 위해 전국의 부녀단체, 농민단체, 종교단체, 심지어 예술단체까지도 관변화, 어용화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동원하고자 갖은 수순들을 다 동원하였다. 대통령이 직접 국민의 의사를 조종하고 국민의 지지를 가공해 내고자 하였던 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정책안이 있으면 그것을 심의하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관변단체들이 데모를 하고 시위를 하도록 획책하였다.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국회프락치사건을 일으켜 국회의원 자체를 갈아 치우는 한편, 개헌이라는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대통령선거를 국회를 통한 간선제에서 국민에 의한 직선제로 바꾸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부패와 무능함, 독재정부라는 악명 속에서 자신의 일생을 마무리하여야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삼일절 기념사에서 언급한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성공적으로"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는 바로 이런 아픈 역사를 극복하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그 "민주화"의 밑받침이 되었던 4.19혁명과 광주민주화항쟁과 6월항쟁은 너무나 많은 기억용량을 요구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이 "산업화와 민주화"를 입에 침을 바르며 찬양하였지만, 정녕으로 그가 원하는 것은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대통령이 밟았던 전철의 반복인지. 방송국을 접수하고 관의 입김이 작용하는 이런 저런 기관·단체의 집행부를 접수하고 심지어 예술학교까지도 자기 사람으로 못 박아 두면서 신문사까지도 개정된 방송법에 따른 종합편성채널 선정이라는 이권을 빌미로 다잡아 둔다.
대통령이 직접 국민을 동원할 수 있는 이런 기초토대가 구축된 시점에서, 말 많고 성가신 국회 정도는 언제든지 국민투표 운운의 협박으로 타 넘을 수 있게 된다. 제1공화국이 보였던 그 야만의 역사가 이제 새삼 생생한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수순에는 의연히 "좌익척결" "멸공통일"을 외치는 틈틈이 "각하 시원하시겠습니다"라는 말도 내뱉을 여유를 가진 지지층이 존재한다. 예의 국민투표론은 이런 지지층으로부터 연유되었거나 혹은 이들을 겨냥한 전술일 것이다. 이들이 아젠다를 점거하고 여론을 조작하면 좌파와 친박이 설쳐대는 국회 정도는 얼마든지 우회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MB가 국민투표 이겨본들
실제 세종시에 사는 사람보다 그렇지 않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이런 확신을 더욱 강화한다. 그 국민투표에 현정권의 신임을 걸든 걸지 않든 어쨌든 국민투표에서는 이길 수도 있을 것이고 강남의 땅값은 지금의 시세를 여전히 보전할 수 있게 되며 자칫 레임덕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던 임기 후반부를 보다 견고한 권력으로 버티어 나갈 수도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굿 뉴스'는 그것이 전부다. 헌법이 유린되고 국민의 의사가 왜곡되고 역사가 변질되는 국면에서는 언제나 보다 강력한 국민적 저항이 나타난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성공적으로"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우리 역사는 이를 증명한다.
권력이 법에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법을 압도하려고 할 때, 정권이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만을 강요하고자 할 때, 그리고 역사의 교훈에 귀 기울이지 않고 역사 자체를 정치의 수단으로 삼고자 할 때, 대중들은 비로소 변혁의 주체로서 각성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과거로 회귀하고자 몸부림치는 만큼 그들의 "잃어버린 10년"이 재현될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더 커져만 가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예의 국민투표론은 헌법해석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주권을 거스르는 현 정권의 폭력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무기력한 헌법학자들의 법리논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부패와 독재에 기반하였던 과거의 영광을 이 순간에 재현하고자 하는 현정권과 그를 둘러싼 기득권자들의 헌정유린을 직시하고 길길이 분노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 주니까요. 덕분에 저는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았답니다"라던 기형도 시인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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