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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청춘이여!

[김민웅 인문 정신] 민주정부 제3기를 만들면서

제르미날의 약속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은 광산노동자들의 분투기를 담은 역작이다. 프랑스 민중소설가로서의 역량을 탁월하게 뿜어낸 혁명문학의 힘 자체다. 파업은 끝내 실패하고 말지만, 그 체험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리는 '역사의 근육'이 된다. "제르미날(Germinal)"은 프랑스 혁명 이후 바뀐 달력이 4월과 5월을 새롭게 부른 이름으로, "땅에 씨앗을 뿌려 새 생명이 태어나는 계절, 봄"이라는 의미다. 우리도 그처럼 실패했었고, 무너져 내렸으며 희망의 뿌리가 이미 삭아버리고 말았다는 탄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한 사이에 씨앗은 힘겹게 싹을 틔우고 어느새 벌목이 불가능한 울창한 숲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제르미날이 약속한 풍경이다. 봄이 오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세력은 기어이 퇴각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때로 이 자명한 현실을 내다보지 못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배반과 이탈은 이렇게 태어나고, 뒤늦은 변신과 변명은 기회주의자들의 몫만으로 그치지 않는 까닭은 땅 속 깊이 이글거리는 역사의 불덩어리를 알고 있다 해도 그걸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해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에밀 졸라는 그의 <위대한 작품 L'Oevre>에서 뛰어난 화가 클로드 랑티에라는 인물을 통해 평생의 친구 폴 세잔의 천재성을 격찬한다. 그럼에도 소설의 결말은 세잔과의 오랜 우정에 비수를 꼽고 말았다. "실패한 천재"라는 말로 세잔의 미래를 우울하게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오해였다는 졸라의 해명이 있긴 했어도 이미 벗 세잔의 마음은 분노와 슬픔의 덫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세잔은 실패한 천재가 아니라 시대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거장이었던 것이다. 에밀 졸라마저 이러했던 것은 혹시 그가 작가로서의 명성에 취해, 인생의 후반기에는 가난하고 남루한 민중의 바다를 떠나 안락한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해버렸던 탓은 아니었을까?

생 빅뚜아루 산으로 가는 길

빅토르 위고를 존경했고 드레피스 사건을 변호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대변했던 에밀 졸라도 내다보지 못했던 한 천재의 내면에는, 그가 온통 힘을 기울여 그린 엑상 프로방스의 "생 빅뚜아르 산"이 꿈쩍도 않고 버티고 있었다. 자연에 담긴 감수성과 정신을 태양 아래 드러내려 했던 세잔의 고투(苦鬪)는 제르미날의 노동운동 현장이 겪어야했던 고뇌와 사실 다를 바 없었다. 성취의 여정에 수없이 마주하는 비난과 조롱, 실패와 좌절은 인간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만이 아니라 목표와 희망에 대한 의지를 끊임없이 꺾어버린다. 세잔은 굴복하지 않았다.

졸라나 세잔 모두 그런 참담한 고통을 거쳤고, 자신이 가고자 한 목적지에 다다른 시간의 순서만이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과녁으로 삼은 지점에 도달했다고 여긴 순간, 숨겨진 함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쭐거리며 조심성 없이 발을 내딛기도 한다. 궁핍한 시대의 기억을 잊은 이들의 고꾸라짐이다. 두 차례의 민주정부 1기 김대중 정부와 2기 노무현 정부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그런 계곡에서 해맨 아픔을 지니고 있다. 생 빅뚜아르 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은 미답(未踏)의 능선이었고, 서투른 행군은 그 다음 본부 캠프를 차리는데 패배의 빌미가 되었다.

가면들의 병기창

역사에서 망각은 죄악이 된다. 진실이 유배되고 허위가 권력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기억의 정치학"은 다만 발터 벤야민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상과 대치하기 위해 그의 기억은 유년기로 돌아가 "가면들의 병기창"을 떠올렸고, 그 가면은 격동하는 정치사에서 자칫 지워지기 쉬운 예술의 정신적 전투성을 의미했다. 병기창은 이 힘을 회복하는 작업현장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병기창"이 있을까? 당연히 촛불광장의 시민혁명이다. 우리의 제르미날이자 생 빅뚜아르 산은 광장의 함성과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았던 촛불이다. 그 힘이 만들어낸 대선에서 이 기억은 마치 전술적 후퇴를 요구받은 처지처럼 되었다. 권력으로 가는 경로에 이 기억이 불편해진 것이리라.

영국의 세계적 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망각의 정치학(politics of amnesia)"을 경고한 까닭은 지배 권력이 행사한 여러 가지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함이며, 우리의 의식이 현실정치의 이해관계에 의해 조종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미래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파묻어버리는 행위는 모두 망각의 정치학이 부리는 요술(妖術)이다. 과거는 대안의 발상을 위한 미래를 미리 설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좌표이다. 지나간 것을 말하는 것은 자꾸 옛일을 들추어 가던 길을 가로막고 발목을 붙잡자는 것 아니라, 앞으로 올 시간에 대한 지혜의 우물을 파내려가는 동작이다. 미래의 대안적 경로는 그 과정에서 학습의 효력을 발휘하여 정밀하게 짜진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패전을 예비하는 오류에 무지한 자들이 내리는 엉터리 전투명령을 포착하기 위한 절차다. 오늘의 현실을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체험을 의식의 변방으로 밀어낸다면, 남는 것은 권력의 술책과 역사를 배반할 태세를 갖춘 세력의 기만뿐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불편한 "과거"는 제거해버린다면 역사를 사체(死體)로 만드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일까? 당장의 전투에서 이기느라 정작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면, 애궂은 희생만 외로운 묘비명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정치의 청춘이여!

당연히 투표함을 열어야 확인할 수 있겠으나, 지금의 정세는 민주정부 제3기의 출범을 예상하게 준다. 벅차고 설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들뜸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수도 있다. 미래에 머리를 숙인다면서, 정작은 회개하지 않는 자의 연출된 결단은 언제나 악의 반복을 허용하고 뻔뻔함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정부가 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미래담론의 토대를 만드는 기본체력의 육성과정이다.

어설픈 통합의 깃발을 들고 촛불시민혁명의 함성을 점차 침묵시키려 든다면 그건 또 다른 반동의 시작이 될 것이다. 포장만 바꾼 정치공학이 주인 노릇하는 나라다.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직접 민주주의의 꿈과 갈망이 현실정치를 움직이는 사상과 철학의 국가, 문학과 예술의 정치가 풍성한 사회, 정신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큰 힘을 기울이는 정부, 그래서 의식과 교육의 격이 달라지는 미래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적대적 분단을 극복하고 자본의 폭력을 제압하며 세계적 책임을 지는 정치윤리의 길을 뚫어낼 수 있다.

5월의 볕이 축복처럼 내리는 들판에서 우리는 씨앗을 뿌리며, 저 멀리 높은 산을 향해 힘차게 걷고 있다. 그 산은 엑상 프로방스에만 있지 않다. 각자의 병기창에서 자기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연장을 꺼내 녹슬지 않게 할 일이다. 역사를 후퇴시킨 자들의 변신은 무쌍하니, 우리의 정신은 은화처럼 맑고 바위처럼 우람할 일이다.

아, 이 화려한 봄날 "정치의 청춘"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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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미국 진보사학의 메카인 유니온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동화독법>, <잡설>, <보이지 않는 식민지> 등 다수의 책을 쓰고 번역 했다. 프레시안 창간 때부터 국제·사회 이슈에 대한 연재를 꾸준히 진행해 온 프레시안 대표 필자 중 하나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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