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V토론 촌평
4번에 걸친 대통령후보 TV토론 이후 각 후보별 손익계산서를 보자.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는 뛰어난 토론능력으로 진보정당의 존재감을 높였다. 어느 후보도 심 후보와 정의당에 대한 디스를 하지 않는 토론구도는 앞으로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2차 토론에서 문재인후보를 직격했고, 3차 토론에서는 문 후보와 공조를 택했다. 민주당과 공조 하의 경쟁을 할지 경쟁을 기조로 한 공조를 택할 것인지 정의당의 진로를 둘러싼 고민의 일단이 읽혀졌다.
바른정당의 유승민 후보는 토론에서는 호평을 받았으나 지지율을 의미있게 끌어올리는 데는 실패했다. 두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새로운 보수를 내세운 유 후보가 기존 극우 보수와 완전히 다른 신상품이라는 점을 보여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주적론이나 사드 배치 찬성론 등에서 보듯 낡은 냉전 보수를 뛰어넘지 못했다. 신상품인 줄 알았는데 리퍼비시 제품(중고를 손질한 제품)이었다.
둘째는 그가 소구하는 청중들과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그는 보수적인 유권자들이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자신을 선택해 주기를 바란 듯하다. 그런데 그동안 구(舊) 새누리당을 지지해왔던 보수세력은 이른바 6.25세대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60~70세대로 상징되는 이들은 한국전쟁의 트라우마와 극우 파시즘적 가치관을 가진 세대다. 이들이 갑자기 개혁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다.
낮은 지지율의 여파로 바른정당에서 유승민 후보를 주저앉히려는 시도가 본격화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유승민 후보에게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을 벤치마킹할 것을 권하고 싶다.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위해 죽음을 무릅썼다.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우직스럽게 실패로 예정된 도전을 거듭했다. 대한민국의 극우를 바꾸겠다는 유 후보의 장정은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자신의 정치철학과 어젠다를 되돌아보고 단기적인 승부에 연연하기보다 긴호흡으로 나서길 권한다. 누군가는 극우 보수를 개혁보수로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는 '돼지발정제를 사용한 강간모의 공범' 이야기까지 나오면서 드디어 갈 데까지 갔다. 그는 평소에도 여성과 약자를 조롱하는 마쵸스타일의 언동을 해왔다. 그러나 그의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샤이홍준표 유권자의 존재가 주목된다. 대부분의 극우 유권자들은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겠지만 홍준표 지지를 부끄러워 하지 않을 것이다.
홍 후보는 처음부터 타겟이 명확했다. 그는 오로지 구 새누리당 핵심지지층만을 겨냥한 메시지와 주장을 일관성있게 펼쳐왔다. 동성애 찬반, 사형제 폐지여부, 친북좌파 딱지붙이기 등의 모든 메시지가 극우유권자의 입맛을 겨냥한 것이다. 마침 안철수 후보의 부진으로 말미암아 그의 전략은 효과를 보고 있는 중이다. 악재(?)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꾸준히 오르고 있다.
국민의당의 안철수 후보는 예상과 달리 TV토론의 최대 패배자로 보인다. 문재인 후보에게 1대1 토론을 공격적으로 제안해왔기 때문에 그는 태풍의 눈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정반대였다. 대통령은 전쟁을 결정할 수 있고,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 국민의 생명과 재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자리다. 따라서 냉철하고 안정감있는 리더십의 소유자여야만 한다.
그런데 텔레비전에 비친 그의 모습은 냉철함 또는 안정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화난 듯한 표정, 계속 불안정한 표정과 제스추어로 보는 사람마저 불안케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조금씩 개선되고 있지만, 안 후보는 문재인 후보를 압도해야만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기대에 미흡했다.
더 심각한 것은 토론 내용의 좌충우돌었다. 사드배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입장을 변경한 부분에 이르러 그의 딜레마는 절정에 달했다. 상황변화를 내세우는 그의 논거도 빈약했다. 한눈에도 보수표를 얻기위한 정치공학이라는 것을 눈치챌 정도였다. '새정치'를 브랜드로 내세운 안 후보였기 때문에 말바꾸기에 따른 타격도 그만큼 컸다. 호남과 보수표를 동시에 얻고자 하는 그의 선거전략은 난관에 봉착했다. 안 후보는 양쪽으로부터 동시에 불신받고 지지율이 급락하는 재앙에 직면했다.
안 후보 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또 다른 원인이 있어 보인다. 그는 사회생활 전부를 기업의 오너로 지냈다. 기업을 운영할 때 그는 회의에서 결론을 내리기보다 고독한 결단을 내린 다음 이메일 통지를 즐겨 사용했다 한다. 다시 말해 제왕적 오너 생활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가 민주주의적 사고와 훈련을 익힐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정치권에 입문하고서도 그를 만나본 많은 사람들이 '테이블 민주주의’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5년 전 독단적인 대선후보 철수, 3년 전 독단적인 통합 결정, 그리고 작년 총선을 앞둔 독단적인 탈당. 그러니 토론에서 그가 보인 모습이 이해가 될 수 밖에. 아마도 그는 수평적 진검 토론을 이번에 처음 해보았을 것이다. 과연 남은 2주일동안 이 평가를 뒤집을 수 있을까?
민주당의 문재인 후보는 이번 토론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선두를 달리는 후보는 실점만 하지 않아도 본전을 하게 되어있다. 1차 2차 토론에서 무난하게 선방했고, 3차 토론에서는 안정감에 더해 토론의 공격포인트와 수비포인트를 제대로 짚어내는 능력을 발휘했다. 4차 토론에서는 약간의 실점을 기록했다. 유승민 후보가 거듭 추궁한 공공부문 일자리 81만개 창출에 관련한 재원 문제에 대해 속시원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또 홍준표 후보의 동성애 질문에 말려들거나 평정심을 잃고 감정을 표출하는 순간도 있었다.
그럼에도 네 후보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으면서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오히려 선방함으로써 선두주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혔다.
2. 현상과 이미지 vs. 본질과 컨텐츠
다수의 유권자들은 1~3차에 걸친 토론회를 시청하면서 만족감보다는 불만과 짜증이 커졌을 것이다. 미국식 스탠딩 토론회를 모방했지만, 토론의 내용이 다음 5 년 동안 이 나라를 운영할 선장의 자질과 비전을 검증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되는 토론이었다. 4차 토론회에 이르러서 비로소 토론회다운 토론회가 이루어졌는데 3차까지의 문제점을 짚어보자.
지엽말단적이고 단편적인 사실에 대한 공방이 주를 이루었고, 경제난, 남북전쟁위기, 정치개혁, 양극화 해소 등 굵직굵직한 주제를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다.
생산적인 토론이 될 수 있도록 토론의 진행방식을 주도권토론방식으로 바꾸거나 사회자의 재량권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보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보완하더라도 TV토론이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텔레비전은 매우 쿨한 매체다. 비록 SNS가 매우 발달한 시대라 하나 수천만의 대중들에게 동시에 이미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텔레비전이 여전히 매스미디어의 황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텔레비전은 심층적이기보다는 현상적이고, 본질적이기보다는 이미지 전달에 더 적합한 매체다.
이번 대선은 대통령을 파면·구속시킨 상태에서 치러지는 시민혁명이라는 사이클의 하이라이트이기 때문에 이 부분이 대선의 핵심 쟁점이자 시대정신이 되어야 하지만 텔레비전 토론은 이런 면을 제대로 부각하기에는 부적합하다.
3. 4번의 군사반란과 5번의 시민혁명
이번 대선은 지난 60년간 대한민국을 지배해온 양상레짐을 탈피할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대선이다. 대륙판과 해양판이 부딪혀 쓰나미가 일어나듯이 촛불항쟁에서 조기대선까지 온 지금의 정치적 쓰나미는 극우파시즘판과 민주주의판이 대충돌을 일으켜서 일어난 것이다. 이 충돌의 역사를 4번의 군사반란과 5번의 시민혁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
4라는 숫자는 박정희와 그 후계들이 일으킨 군사반란을 일컫는다. 61년의 5.16쿠데타, 72년의 유신쿠데타, 79년의 12·12 하극상 쿠데타, 80년 5월 17일의 쿠데타가 그것이다.
5라는 숫자는 민주주의를 절규한 시민혁명을 일컫는다. 60년의 4.19혁명, 79년의 부마항쟁, 80년의 광주항쟁, 87년의 6월항쟁, 그리고 작년가을부터 지금에 걸쳐 현재 진행 중인 촛불항쟁을 말함이다.
우리 현대사의 기본 구도가 어찌 이리 단순명료할까? 6월항쟁에서 군부독재체제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오늘날 촛불항쟁을 다시 불러왔다. 촛불항쟁은 바로 이 낡은 구체제를 혁파하는 것이 시대적 사명이다. 텔레비전 토론회에 가려진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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