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민주항쟁 30년, 오늘날의 의미는 무엇일까? (사)'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과 ‘6월민주포럼’은 세대와 시대를 넘어 6월항쟁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인터뷰 기사를 매주 1회 연재한다. 인터뷰는 6월항쟁을 경험한 이들이 오늘날 청년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시대를 초월한 공통의 의미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보통시민의 변화, 6월민주항쟁의 핵심"
1987년 6월 10일. 그는 며칠 전부터 집을 나와 있었다고 한다. 경찰이 사전에 가택연금을 한다거나 연행을 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으니. 당시 상임집행위원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에 몸을 담고 있었던 황인성 수원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장은 30년 전 일을 어제 일인 양 또렷이 기억했다.
"오후 9시부터 10분간 텔레비전을 끄고 전등을 끄자고 했어요. 그게 얼마나 실천될까, 이게 아주 관심거리였어요. 그때 내가 이화동, 저쪽으로 내려가면 종로5가 사거린데, 이쪽쯤에 내가 서 있었어요. 이 근처에는 사무용 건물이 있었고, 저쪽 낙산에는 서민아파트들이 주욱 서 있었어요. 대개 못사는 사람들이 사는 서민아파트였는데, 내가 볼 때 여기저기 창문의 빛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반 가까이가 꺼지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뭐라고 해야 하나. 등골에 찬 기운이 쫙 흐르는 거야… ." 당시 국본이 배포한 '6.10 국민대회 행동요강'의 4항에는 ‘전 국민은 오후 9시에서 9시 10분까지 10분간 소등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 국민적 합의를 깬 민정당의 6.10 전당대회에 항의하고 민주쟁취의 의지를 표시할 수 있는 기도, 묵상, 독경 등의 행동을 한다’고 되어 있었다.
"엄청난 감격 같은 것이 느껴졌어요. 앞서 오후 6시 태극기 하강시간에 맞춰 시청 앞에서도 지나가는 택시나 버스가 일제히 경적을 울리고, 차안에 있는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손수건이나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면서 '아, 이제 우리가 하나가 되고 있다. 숨죽이고 있던 국민들과 운동본부가...' 이런 걸 확인하면서 몸이 떨렸거든. 그런데 소등한다는 것은 몸이 거리에 있지 않고 집에 있지만 이런 큰 국민적 저항행동에 나도 함께 하고 있다고 하는 걸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것도 한 가족 단위로.… ."
87년의 재야, 종교, 야당 정치인 등의 민주인사들은 그간 비밀리에 준비해 온 국본을 5월 27일 결성대회를 통해 공개적으로 발족했다. 이 자리에서 6.10 국민대회를 전국적으로 개최하기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 대회이후의 계획은 뚜렷하게 세우지 못한 상태였다. 나중의 일이지만 한 달 만에 저 사람들이(독재 정권) 자신의 의지를 꺾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당시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국민의 호응이 있었고, 그럼으로 해서 국민적 분노와 전두환 정권에 대한 거부감이 얼마나 큰지 확인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대대적인 국민의 호응도, 6.29선언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황 이사장의 말에 "그렇다면 예상하신 것은 무엇이냐"고 장난 섞인 질문을 던졌다.
그해 초에 발생한 고(故) 박종철 열사 고문살인 사건 당시 개최된 국민추도대회(2.7.)와 평화대행진(3.3.) 때보다 대회 규모가 분명 커져 있었다. 4.13 호헌조치에 대한 국민적 반대가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참여한 시민들의 규모가 정부와 여당을 정치적으로 몰아붙이는 계기가 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대회를 기점으로 국민적 저항 행동이 지속적, 그리고 폭발적 양상으로 분출되어 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시위학생들을 연행하려는 경찰들에게 멀리서 야유를 보내는 식으로 시위를 응원하던 시민들이, 쫒기는 학생들을 자신의 가게에 숨겨주고, 결국에는 최루탄 자욱한 거리에 함께 서게 되는 변화를 보면서 뭔가 '일을 내겠다'는 색다른 느낌도 없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직적으로 거리투쟁에 나선 학생이나 재야단체 회원들, 정당원들과 달리 말없이 숨죽여 살아오던 보통시민들이 국민행동요강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손수건 흔들기, 차량경적 울리기, 전등 끄기 등), 탄압에 대한 공포를 뚫고 한 사람 한 사람 시민의 작지만 분명한 결단이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가 느꼈던 희망과 세상이 변화하기 시작한다는 기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80년 광주가 학생들로 하여금 뭔가 현실을 거부하고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게 하는 일종의 명령을 내리는 그런 것과 같은 거예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학생들은 광주의 죽음에 대한 빚진 마음, 이런 게 엄청 강했던 것이고, 그걸 침묵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모든 학생이 그렇지는 않지만,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어요."
계속되는 군사독재정권, 죽어가는 학생들, 고문, 최루탄, 그리고 5.18 광주항쟁. 자신의 집안에서 불을 끄는 일조차 무서웠을 시절에 그 수많은 사람이 쏟아져 나온 거리와 광장은 흡사 그에게 기적이 아니었을까.
"가치가 중시되는 시대, 30년 간 깊어진 문제의식"
2017년 촛불이 유난히도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은 비폭력이라는 기조도 한 몫 했지만 사람 수 만큼이나 많은 구호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장애, 여성, 성소수자, 채식 등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구호들. 자신의 처지와 연결시키면서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2017년의 변화라고 하는 건 87년보다는 문제의식이 훨씬 깊고 넓죠. 왜냐. 87년은 눌려 있었으니 일차적 요구가 대통령직선제(정부선택권)와 민주헌법 쟁취로 모였잖아요, 그게 됐어요. 그대로 된 거야. 됐는데 이런 제도적 변화가 왔다고 민주주의가 완성되느냐, 아니에요.
87년에 우리가 직선제 개헌을 했다고는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게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요. 계속 발전하고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는데, 2017년의 변화라고 하는 것,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간 변화 또한 더 큰 변화를 위한 출발점일 수밖에 없다 하는 걸, 6월항쟁 이후 30년이 가르쳐 준 거라고 생각해요."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결국 당선자는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였다. 정치권은 분열됐고, 재야세력 내부에서도 상호불신이 커졌다. 대안이 되어야 할 재야운동에 내적으로 균열이 생겼고, 이후 정세에 통일적으로 대응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개헌 후 대선 날짜가 결정되자 국본 상집위원 내에서도 비판적 지지그룹, 백기완 후보 선거운동본부, 후보단일화 그룹 등이 순차적으로 빠져나갔다. 황 이사장의 표현에 따르면 ‘이래저래 정파적이지 못한’ 몇 사람만 국본에 남았고, '상처뿐인 국민운동본부'가 되어버렸다. 뿔뿔이 흩어진 대가는 컸다.
사실상 군부정권의 연장이라는 참담한 대통령 선거결과였다. 그렇지만 투쟁의 성과인 국민기본권의 확대로 시민적 공간이 열리면서 새롭게 시민사회의 다양한 운동이 나타나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30년 전 쟁취한 현행 헌법의 틀 내에서 시민들은 멈춰있지 않고 가능한 틈새를 찾아 끊임없이 자기성장을 도모해 왔음을 이번 촛불광장에서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에 억압된 상황 속에서는 문제는 있지만 주요하게 부각되지 않은 ‘가치’, 가치가 중시되는 시대가 온 거에요. 여성이라고 하는 가치, 환경, 평화·통일, 그 다음에 경제정의와 같은 이런 시민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이는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그는 6월항쟁 이후 있었던 많은 문제들과 그것에 대항했던 시민들의 공동의 경험은 누적되었고, 우리는 그 크고 작은 승리의 경험을 학습하고 있다고 말했다. 1987년의 6월이, 2002년의 효순·미선이가, 2008년의 미국산 소고기 수입반대 촛불이, 2015년의 백남기가 없었다면 오늘의 촛불과 탄핵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정치권의 미진한 결정들, 결국 변화는 시민들의 손으로"
동의가 어렵지 않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자각한 대중의 힘, 피플파워(people power)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망라해 역사가 증명해 주는 사실이니 말이다. 다만 그에게 조금 더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1987년 6월을 바탕으로 성장된 시민의 힘으로 故김대중 전 대통령과 故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았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이게 나라냐'를 외쳐야만 했느냐는 것이었다. DJ정권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국장이었고, 참여정부 당시 시민사회수석을 맡았던 그에게 역진한 민주주의에 대한 책임을 조금은 묻고 싶었다.
"헌재에서 (故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가 기각되어 다시 국정에 복귀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노 대통령께서 몇몇 시민사회 단체인사들을 초치해 간담회를 가졌지요. 그날 저녁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나는 우리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는 시민사회가 중요하다는 말을 했어요. 왜냐. 제대로 된 변화는 정부, 관료나 국회의 힘만으로는 어렵다. '시민사회라고 하는 국민, 국민과 동맹을 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게 뭔가 조금 통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양반(故노무현)한테…."
그때(참여정부) 왜 그러셨어요, 후회되는 것은 없으셨나요, 하는 다음 질문들을 마음 속에 담아뒀지만 결국 묻지는 못했다. '그(청와대) 안에 있는 것과 밖에서 보는 것과는 참 많이 다르더라'는 그의 말. '내가 지금까지 내려온 결정들이 모두 미진했던 것만은 분명한데 그게 과연 잘못된 선택이었기 때문일까 혹은 이 역사의 한계였을까'하는 그의 고민. 굳이 질문을 던지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었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밝혀내야 하는 수많은 죽음들, 이미 자살로 종결되어 오로지 가해자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만 남아있거나 아예 관련 자료제출을 거부하는 국가기관의 현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는 속에서 진상규명위원회의 진로를 두고 발생한 동료들 간의 다툼. 어느 가치에 설 것인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순간들, 대통령이 국방부 장관이나 검찰총장을 바꿔도 전문성을 앞세운 관료조직의 관성과 이해관계가 변화를 은근히 가로막거나 정책을 변질시키는 경우도 많았다.
"왜 그걸 못했어!, 못한 건 사실인데(웃음), 그럼 그때 어떻게 했어야 하지, 하고 생각해보면 참 답이 없는 것도 있어요."
미진한 선택들이었다는 고백은, 결국 우리가 봐야 할 것은 결코 저 위의 권력자가 아닌 내 옆의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공고히 했다. 의미 있는 변화는 여의도(국회)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나라가 바로 서려면 국민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계속 되는 항쟁의 결과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으로서 말이다.
"그걸 이번에 뒤집어 놓은 건 누구냐, 투표라고 하는 종이 돌을 던져서 국민들이 바꿔놓은 거예요(지난 해 4.13총선). 이 보이지 않는 종이 돌이 가지고 있는 힘을 제대로 행사한 것도 흩어져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국민이었고, 삐뚤빼뚤 이래해야 하나 갈피를 못 잡는 국회의원들한테 퇴진은 말할 것도 없고 퇴진 안 한다고 하면 그 때는 할 수 없다, 탄핵이라는 합법적인 방법을 선택해야한다, 이렇게 만든 건 광장에 나선 국민들이었다고.."
"잘 늙어가는 충실한 시민적 삶"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바꿔나가는 세상. 말이야 낭만적이지만 그게 쉽나, 생각해보니 그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원동력을 갖고 있기에 30년, 40년의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켰는지, 30차도 채 안 되는 주말의 촛불집회도 매 주 참가하기 버거운 삶인데 말이다.
"일단은 이게 뒤에 쫄쫄 따라간다고 생각했는데(웃음) 어쩌다보니 내가 제일 가운데 있고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선배들은 다 잡혀가고 내가 젤 앞에 있는 거야(웃음)."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다음 질문을 던지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40년 전으로 돌아가더라도 현재와 같은 삶을 사실 것이냐 묻자, '지금처럼은 안 살 것 같다'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샤이'했던 고등학생 황인성은 기자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외교관이 되면 그도 연미복을 입고 파티나 다니는 것이 일인 줄 알았다고. 외교학과에 가고 싶다고 하니 학교에서는 서울대에 안전하게 합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전혀 원치 않는 독어독문학과 원서를 써주셨다고 한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시위 같은 것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나 존경할 만한 친구들이 하나둘 군대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 도시빈민 실태조사를 나갔다가 엄청난 빈부격차와 비인간적인 삶에 분노하면서 주저했던 마음도 잠시, 탁 하고 시작된 운동이었다.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지식인으로서의 관념적인 사명감이 아니라 분노라는 감정이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처음부터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순간의 결단을 거쳐 어느새 여기에 와있는 것이라고. 매번 힘든 결단들을 해왔을 그의 젊은 날들이 고되게 느껴지는 찰나에 그가 해준 말에 그나마 위안을 받았다.
"청와대에서 나와서부터 인생관이 달라졌어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뭔가 해야 되는 사람, 뭔가 앞장서서 고민을 하고 남에게 보탬이 되는 일을 하거나 가르쳐야 하거나. 약간 엘리트 의식이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 그런 것들이 오히려 나를 옥죄어 왔다,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생각. 어떤 뭔가 내가 보통사람들보다 조금 더 헌신적이고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이래야 한다는 거, 그건 조금 오만한 생각 같다,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어요.
아주 거대한 권력의 정점에 있다고 해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체가 고루 발전해야 그 힘으로 뭐가 되는 거지. 어떤 특정 집단의 대단한 능력, 의지 이것 가지고 세상이 변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충실한 시민적 삶. 이런 것이 뭘까. 그런 걸 어떻게 할까. 그래서 우리가 21세기에 잘 늙어가는 사람이 되자(웃음), 시민으로서."
무려 4시간동안 나눈 이야기 속에서 무수한 말을 쏟아냈지만 결국 그의 메시지는 하나였다. '충실한 시민적 삶'. 독재정권의 부당함을 알릴 시간을 벌기위해 학생들이 건물옥상에 건 밧줄에 매달려 소리를 질렀던 시절부터 그의 표현대로 '삐까번쩍'한 2017년의 촛불집회까지, 지난 40년의 역사 속에서 고군분투한 그가 깨닫고 유지한 메시지였다.
1987년의 청년들이 6월민주항쟁으로 갚고자 했던 광주시민, 광주영령에 대한 빚. 지금의 청년이 용산에게, 세월호에게, 백남기 농민에게, 그리고 2017년 촛불에게 진 빚은 또 어떻게 갚아야 할까. 분명 그 답은 황 이사장의 삶처럼 돌고 돌더라도 결국은 ‘충실한 시민적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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