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현 전 중앙일보·JTBC 회장이 요즘 바쁘다. 언론 노출이 잦다. 대중 강연을 하고 방송인 김제동 씨와 젊은이들 앞에서 마이크도 잡았다. 개량 한복 입고 찻잔을 앞에 둔 소탈한 모습에 너그러운 표정으로 유튜브에 영상도 올렸다.
들어보면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다. 김제동 씨와 가진 정책토론회에선 사드 문제와 관련해 "안보에서 중요한 정책수단인데 국민들을 완전히 뒷방에 몰아놓고 한 결정"이라며 "이것이 9년 동안 보수정권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했다. 대북 정책은 "정권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정책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유튜브 영상에선 "한반도 통일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는 독자적 시각을 확실하게 해 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면서 "우리가 군사력이나 국제 환경 속에서 미국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한반도 통일, 북핵에 관한 문제에서 자주적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 늘 생각한다"고 했다.
그리고 폭탄 하나 투하. 'JTBC 외압의 실체,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편에서 "내가 받았던 구체적인 외압이 5~6번 되고, 그 중에 대통령으로부터 2번 있었다. 이번에 처음 밝히는 일이지만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폭로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JTBC <뉴스룸>을 진행하는 손석희 사장을 교체하라는 외압을 넣었다는 것이다.
이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시점은 지난 16일. 사흘 뒤인 1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공판에서 이 부회장의 피의자 신문조서가 공개됐다.
이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2016년 2월 박 전 대통령과 독대 했을 때 "(박 전 대통령이) 'JTBC가 왜 그렇게 정부를 비판하느냐'며 외삼촌인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에 대한 불만을 10분 정도 말했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대통령과 개별 면담 뒤 홍 전 회장에게 '대통령이 언짢아하신다'고 전했고 이후 따로 몇 차례 만난 것으로도 알고 있다"고 진술했다.
홍 전 회장이 유튜브 영상으로 밝힌 내용과 싱크로율 100%다. 박 전 대통령이 직접 행사한 언론 외압의 구체적 내용이 처음으로 공개된 것이다. 그것도 탄핵의 '스모킹건' 최순실의 태블릿 PC를 입수해 보도한 JTBC의 '손석희를 자르라'는 압력이었다니.
홍 전 회장은 "그러나 그런 외압을 받아서 앵커를 교체한다는 건 제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고, 21세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외압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했다.
두 사람 말이 사실이라면, 박 전 대통령은 대명천지에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 박근혜 탄핵과 구속을 희망했던 모든 사람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손석희'라는 인화력 높은 소재가 또 다른 핵심을 감춘다. 공교롭게 연이어 터진 외삼촌과 조카의 폭로는 누구에게 이득을 가져다 줄 것인가?
특검과 이재용 부회장은 각각 '뇌물 공여'와 '강요 피해'를 주장하며 공판 중이다. 이 다툼에서 '거부할 수 없는 압력'의 실재는 이재용 부회장의 동아줄이다. 박근혜-최순실-이재용의 뇌물죄 고리가 끊어져야 이 전 회장은 박 전 대통령의 부당한 압력과 강요를 받은 '피해자'가 된다. 이는 곧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인 '정경유착'의 해체를 의미한다. 홍석현 전 회장이 선택한 '이제야 말할 수 있는' 타이밍 치고는 절묘하다.
홍 전 회장이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도 이득을 볼 수 있다. 이재용의 뇌물죄가 성립돼야 박근혜의 뇌물죄도 성립한다. 역으로, 이재용의 뇌물죄가 무너지면 박근혜의 뇌물죄도 무너진다. 두 사람은 순망치한 관계다. 재벌과 언론을 박해한 '나쁜 박근혜'가 '죄인 박근혜'의 형량을 낮출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 수혜자는 홍 전 회장 자신이다. 유튜브 영상에는 '손석희 자르라'는 대통령의 외압을 "자존심" 걸고 지켜낸 훌륭한 사주라는 뉘앙스가 흐른다.
문재인, '촛불 민심' 받든다더니…
홍 전 회장은 최근 언론사주 직을 그만두고 세상일을 직접 도모해보려는 듯한 의지를 여러 차례 피력했다. 대선 출마설이 잦아든 뒤에도 유력 정치인들과 두루 만나며 나랏일을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칠순을 바라보는 그가 어떤 야심을 속에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번 대선 정국에서 '핫 피플'로 주목받는 홍 전 회장을 문재인 후보가 지난 12일 찾아갔다. 캠프 설명에 따르면 문 후보는 "홍 전 회장과 오찬을 하면서 긴 시간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남북관계와 한미관계, 동북아 평화 등 외교안보 사안에서 많은 부분 인식이 같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정도 대화로 끝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홍 전 회장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 자리에서 문 후보가 외교와 통일과 관련된 내각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했다"며 "하지만 내가 장관으로 내각에 참여할 군번은 아니지 않느냐. 만약 평양 특사나 미국 특사 제안이 온다면 그런 것은 도와드릴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문재인 후보의 당선 가능성을 높게 점치며 "내가 가지고 있는 국제적 인맥과 상징성을 가지고, 문재인 정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 어떤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요컨대, 유력 대선후보인 문 후보가 구속 수감된 이재용 부회장의 외삼촌이자 최근까지 언론사 사주였던 사람 집으로 찾아가 입각을 제안했다는 얘기다. 이 만남은 두 가지 면에서 대단히 부적절했다.
우선, 문 후보는 홍 전 회장과 만난 다음 날인 13일 발표한 10대 공약을 통해 "병역 면탈, 부동산 투기, 세금 탈루, 위장 전입, 논문 표절 등 5대 비리 관련자는 고위 공직에서 원천 배제한다"는 기준을 약속했다.
이 기준에 따르면 홍 전 회장은 고위 공직에 오를 수가 없다. 그는 1999년 보광그룹 탈세 사건에 연루돼 조세포탈 혐의로 유죄를 인정받은 전력이 있다. 당시 대법원은 홍 전 회장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및 벌금 30억 원의 확정 판결을 내렸다. 문 후보가 '10대 공약'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비리 관련자' 홍 전 회장에게 입각 요청을 한 셈이다.
문 후보가 강조하는 적폐 청산과 홍석현의 조합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홍 전 회장은 2005년 세상에 알려진 '삼성 X파일' 사건과 관련이 깊다. 노회찬 의원이 공개한 X파일 녹취록에는 이 전 회장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당시 이학수 당시 섬성 구조본부장과 만나 여야 정치권에 대선자금을 전달하고 검찰을 상대로 금품 로비를 사전 모의한 대화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홍 전 회장이 삼성 정치자금의 전달자 노릇을 한 정황은 뚜렷하다.
문 후보는 거의 모든 공개 발언에서 '촛불 대선'을 강조한다. 19일 TV 토론회에선 "촛불 민심을 받드는 진짜 정권 교체만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토씨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옳은 말이다.
그러나 정작 문 후보의 발걸음은 박근혜-이재용 커넥션의 어머니 격인 '삼성 X파일' 사건의 핵심인물에게로 향했다. 이 사건의 본질은 잘 알려진 대로 '정경언(권력-재벌-언론) 유착'이다. 이런 모순이 또 없다. 이쯤 되면 문 후보는 촛불이니 적폐 청산이니 하는 말을 이제 입에 올리지 않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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