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이지만 세속주의와 서구식 민주주의를 채택해온 터키에서 사실상 이슬람 권위주의 사회로 전복되는 개헌안이 국민투표로 통과됐다.
지난 16일 국민투표로 통과된 개헌안 자체는 의원내각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중심제로 권력구조를 개편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기초인 3권분립의 원칙도 폐기한 제왕적 대통령제로의 전환이다.
2019년 시행되는 개헌안에 따르면, 앞으로 터키의 대통령은 법률에 준하는 효력을 갖는 행정명령을 발동할 수 있다. 터키 최고 법원 임면 등 판·검사 인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또한 총리제를 폐지하는 대신 대통령이 한 명 또는 여러 명의 부통령을 임명할 수 있다. 현재는 대통령의 당대표 겸직이 당헌으로 금지됐지만, 개헌안은 대통령이 집권당 대표도 할 수 있어 당까지 장악할 공식통로를 마련했다. 의회해산권도 거머쥐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임기는 5년이며 대선과 총선은 같은 날 치러진다. 대통령은 1회 중임이 허용되지만 국회 동의를 얻을 경우 조기 대선·총선을 통해 한 번 더 출마가 가능하다.
30년 장기집권 발판 마련
개헌안을 밀어붙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중임 조항에 따라 2029년까지 집권이 가능하며, 임기 만료 직전 조기 대선·총선을 시행할 경우 중임 제한을 피해 현직 대통령도 출마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2034년까지도 재임할 수 있다. 그가 의원내각제 총리가 된 2003년부터 계산하면 30년 넘게 터키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이번 개헌으로 지난 1808년 술탄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며 시작됐던 터키 민주주의 역사가 파국을 맞았다. 특히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1923년 수립한 공화국 체제의 전통은 '21세기 술탄의 부활'로 절단이 나버렸다.
문제는 이 개헌안이 처음부터 불공정 시비와 부정투개표 의혹에 휩싸여 정당성 자체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숫자만 보면 찬성 51.2%, 반대 48.8%로 찬성 쪽이 2.4%포인트(약 112만 표) 더 많았다.
하지만 투표일 전날 터키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관위 날인이 없는 투표도 유효표로 처리한다"는 공정선거 원칙 자체를 뒤집는 결정을 발표했다. 야권과 시민사회에서 전체 투표용지 60%에 대한 재검표를 요청하겠다고 나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권에서는 날인이 찍히지 않은 투표만 250만 표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투표 전날까지 국민투표에 반대표를 던지라는 공개적인 여론조성이나 홍보는 사실상 불가능했고, 오직 정부와 관변단체가 주도한 국민투표 찬성 홍보물만 거리에 넘쳐났다. 처음부터 국민투표 자체가 민주적 의사 형성을 차단하고 치러진 불공정한 절차였다.
날인 없는 투표용지도 유효하다는 선관위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와 유럽평의회 의회협의회(PACoE)가 파견한 투표 감시단도 이번 터키 국민투표가 국제 기준에 미달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OSCE 참관단은 성명을 통해 "터키 개헌안 국민투표에서 불공정 선거운동을 포함해 일련의 부정행위가 있었다"며 "날인이 없는 투표용지를 유효로 인정한다는 터키 선관위의 결정은 부정방지 주요 지침을 훼손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런 불공정 시비와 부정투개표 의혹에도 불구하고 찬성표가 간신히 50%를 넘었고, 농촌지역인 중부지역에서 70%가 넘는 몰표가 나왔을 뿐, 수도 앙카라와 최대도시 이스탄불, 제3의 도시 이즈미르 등에서는 반대표가 50%를 넘었다는 점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이스탄불에서는 3000여 명이 이틀째 개헌안 원천무효를 외치는 시위가 벌어지는 등 후폭풍도 가시화되고 있다.
시위로 국민투표 결과를 뒤집을 수 없다고 해도, 이미 터키는 둘로 쪼개졌다고 할 정도로 정치적 분열이 극심한 상태다. 에르도안 정부는 지난해 7월 실패한 군부 쿠데타를 빌미로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한 가운데, 그동안 13만명을 숙청하고 4만5000명을 구속하는 등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지속하고 있다. 현재 터키에서는 대통령을 풍자한 글을 SNS에서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받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가비상상태를 오는 7월까지 연장하기로 하면서 반대파에 대한 억압의 고삐를 더욱 세게 쥘 것으로 예상된다.
"사형제 부활시키겠다"는 에르도안의 배짱 배경
에르도안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유럽연합(EU) 가입도 물 건너갈 우려가 커졌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16일 밤 승리 선언 연설에서 "사형제 부활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고 밝혔다. 터키는 EU가 가입 선결 조건으로 요구한 사형제 폐지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에르도안 대통령의 '사형제 부활' 발언은 EU가 자신의 장기집권체제를 비판할 경우 EU 가입도 포기할 수 있다고 맞받아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터키가 서구식 민주주의와 정반대 노선을 취해도 미국과 EU에서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 터키는 중동에서 미국과 EU의 핵심 동맹이고, 시리아 난민을 일차적으로 수용하는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개헌안을 부정선거로 관철시켰다는 의혹에도 불구하고 즉각 에르도안에게 축하 전화를 할 정도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해 유럽과 맺은 난민송환협정도 재검토하겠다고 밝혀 오히려 EU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다. 그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과의 밀월관계도 서방의 공격에 대한 방패막이로 활용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푸틴처럼 '스토롱맨'의 대열에 올라선 배경은 2003~2014년 총리 재직 시절 터키 경제를 크게 발전시킨 업적이 주효했다. 그가 총리를 맡은 동안 1인당 GDP는 연평균 3.6%씩 늘어났고, 물가 상승률은 32%에서 9%로 떨어졌다.
또한 에르도안은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교 전통을 강조하고, 보수·민족주의적 표심을 자극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국민적 인기를 바탕으로 그가 총리 4연임을 금지한 집권당(정의개발당) 당헌을 피해, 2014년 대통령으로 우회 출마했을 때도 51.8%를 득표하며 실권자의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에르도안은 국민적 인기를 결국 '제왕적 대통령'의 발판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역사가 반복해서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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