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가명, 55) 씨는 서울 강남에 아파트 두 채가 있고, 연봉 1억 5000만 원이상이 되는 근로소득자이며, 아내 연봉까지 합하면 가구 소득이 연 2억 원이 넘는다. 그는 골프도 치고, 호텔도 수시로 가며, 고급 차도 타고, 해외여행도 자주 가는 등 하고 싶은 것을 다 하면서도 스스로를 부유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민'이나 중산층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객관적 지표로 보면 김 씨는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상위 1%에 속하는 고소득층이다. 이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월급쟁이이자, 부르주아다.
이명준(가명, 55) 씨는 지방 6급 공무원이다. 아내는 중학교 교사인데, 두 사람은 안정된 직장과 높은 보수를 향유하며 풍족하게 살고 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공무원-교사 부부인 셈이다. 지방의 고급 아파트에 거주하는 이 씨는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해외여행도 자주 간다. 부부는 자동차도 각각 소유하고 있다. 가구 소득 상위 10%에 속하는 부부의 연봉은 1억5000만 원이며, 이들의 퇴직 연금은 월 500만 원이 넘는다. 이 씨와 그의 아내는 노후를 걱정하지 않는다. 저축도 별로 할 필요가 없어 가구 가처분 소득이 높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을 '서민'으로 생각한다. 공무원으로 높은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박철수 씨(가명, 40대) 부부는 의사다. 지방 대도시에 거주하는 부부의 연소득은 2억 원이 넘는다. 이들의 가구 소득은 상위 1%에 속하지만, 재산이 많지 않아 스스로를 부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1% 대 99%'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재벌을 비롯한 극소수 최상층에게 소득이 집중되어 있어, 갈수록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재벌을 비롯한 극소수 최상층 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서민'이며,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라고 인식한다. 이른바 진보의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김 씨, 이 씨, 박 씨 세 사람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때문에 한국에서는 상층과 고소득 중산층의 서민 코스프레가 유별나다. '강남 서민'이라는 말도 유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0억 원 내외 주택이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고, 가구 연 소득이 1억 원이 넘어도 강남 상류층 및 중산층을 비롯한 고소득 중산층은 자신의 객관적 처지와 다르게 '서민'이라고 여긴다. 심지어 연봉 1억 원의 고소득 근로소득자도 살기 어렵다고 엄살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한국의 상층과 고소득 중산층은 눈높이가 너무 높고, 물질적 탐욕이 너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위만 쳐다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상위 10%와 소득 하위계층 사이의 격차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현실에 눈을 감고 있다. 이들은 무산계급도 아니고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도 아니다. 하층 노동자와 진짜 서민이 보기에는 그렇다. 한국의 상층과 고소득 중산층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리기 때문에 소득불평등 심화의 가장 큰 피해자인 하층 노동자와 서민층의 고단하고 궁핍한 삶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상층과 고소득 중상층은 하층 노동자와 서민층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누리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음에도 그들에게 피부로 다가오는 건 상위 0.1% 또는 1%와 상위 10% 사이 격차일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상상 속 '서민'이 되는 것 아닐까?
한국의 상위 10%와 이른바 진보 및 노동운동은 불평등과 격차 문제를 재벌을 비롯한 극소수 최상층 대 나머지 모든 서민사이의 불평등과 격차로만 인식하고, 상위 10%의 이해를 집중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이런 인식으로는 한국 사회의 극심한 소득불평등과 격차를 해소하기 어렵다.
한국은 소득 상위 10%와 저소득층의 격차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기득권을 누리는 최상층뿐만 아니라, 상위 10%도 이 사회에서 작은 기득권과 고소득을 향유하는 계층이다. 따라서 상위 10%도 상위 1%와 함께 기득권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소득불평등과 양극화의 해소를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고 사회연대·임금연대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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