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올 해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러시아 혁명 100 주년을 맞아 전 세계 곳곳에서는 다양한 학술 및 문화행사가 이미 진행되었거나 준비 중에 있다. 단순히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제를 스스로 포기하거나 혹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인 2017년 현재, 우리가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역사를 통해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과 고민들이 있다.
그러한 논의의 출발점 중 하나는 그 동안 볼셰비키에 의해 독점되어 왔던 러시아 혁명에 대한 평가의 철저한 재검토와 재해석이 아닐까 한다. 특히 레닌 시기의 정책들을 극단적으로 이상화하거나, 원칙에서 후퇴한 일부 정책을 단지 불가피한 조치로 해석하는 식으로, 러시아 혁명이 철저하게 스탈린 이후의 현실 사회주의 체제와 아무런 상관없는 것으로 서술하는 경향이야 말로 철저하게 배격해야 할 자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했다 하더라도 레닌 시기 사회주의의 핵심적 원칙들이자 우리가 부단하게 추구해야 할 몇 가지 원칙들이 어떻게 이들 스스로에 의해 폐기되거나 변질되었는지에 대해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여러 영역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민중의 직접민주주의 제도였던 소비에트와 현장 생산 단위에서의 산업민주주의를 실현했던 공장위원회, 그리고 진정한 사회적 소유의 실험이었던 협동조합의 실험과 좌절이야 말로 사회주의체제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05년은 물론 1917년에 부활했던 소비에트들은 볼셰비키 당이나 그 이념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발전했으며, 이들의 목적은 처음에는 국가 권력의 장악이 아니었다. 볼셰비키 역시 중앙집권적이고 행동이 통일된 혁명적 정당이나 조직이 아닌 일반 노동자 대중 조직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적-생디칼리스트적이라는 혐의를 씌우며 소비에트를 비판하곤 했다. 그런데 혁명 이후부터 일상 업무를 담당하는 수 백 명의 소규모 소비에트와 집행위원회 안에서 세분화된 업무 분담을 하기 위한 소위원회들이 형성되는 등 점차 일종의 행정 기구처럼 변하게 되면서 관료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비에트가 거대한 관료조직이 되어 가면서 민중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사라져 갔다. 과거에는 매일 소집되다시피 하던 총회는 거의 열리지 않았으며, 대표들의 참석은 매우 드문 일이 되었다. 또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탄핵권이 있는 대표들에 의해 일정 정도 통제를 받기는 했지만, 아래로부터의 통제는 점차 사라졌다. 이후 볼셰비키 일당 지배 하에서 소비에트 체제는 왜곡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각급 소비에트는 모두 입법과 행정 기능을 함께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찬양받았던 원리이지만 현실에서는 심각한 권력의 비대화와 비민주성을 낳는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 재정 면에서도 소비에트는 중앙 집행위원회나 중앙 인민위원회로부터 나오는 예산에 의존하게 되면서 점차 자율성을 상실해갔다.
1917년 레닌은 '혁명적 자치 정부'와 '광범위한 지방 분권주의'를 주장한 바 있었지만, 이는 단지 전술적 차원의 수사였으며, 1년도 지나지 않은 1918년 봄에는 '프롤레타리아 중앙집권주의'만이 사회주의를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자체를 폐기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치 행정 기구이며 직접 민주주의 조직이었던 소비에트를 대중들을 지도하기 위해 당의 엘리트가 이용하는 기구로 변질시켰다. '관리 업무가 사회의 공동생활로부터 유리된 유일하고 폐쇄적인 관료집단의 특권이 되는 것을 막음으로써 항상 민중들을 정치, 경제, 문화 등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이 소비에트 체제'라는 볼셰비키의 주장과는 달리, 소비에트를 통한 노동자 민중권력 원칙은 볼셰비키 자신에 의해 파괴되었다.
한편 생산자들의 자율적인 방식에 의해 노동 규율이 실현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자치권이 최대한으로 보장되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생산과 경영의 방식을 의미하는 노동자자주관리운동은 1917년 혁명 시기 공장위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었다.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직접적 개입은 1871년 파리 콤뮨 이후 세계최초로 시도되었던 것이자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의 노사공동결정제도의 모태라고도 할 수 있다.
노동자 통제 운동은 특정 세력에 의한 계획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전개되었고,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처음에는 매우 미약했다. 중앙집권적 권위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적 발상에 기인한 것이라는 소련의 공식 교과서와는 달리, 노동자 통제 운동을 주도하였던 공장위원회는 멘셰비키나 볼셰비키와 협조하기를 선호하였고, 항상 중앙집권적 기구를 만들려 노력하였다는 데에서 노동자 통제는 무정부주의와는 관련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급진적인 움직임에 부정적이었던 레닌은 자주적으로 행동하는 공장위원회를 경계하였고, 소비에트 권력의 우위를 내세우며 공장위원회의 독자적 활동을 통제하였다. 그에게 '노동자 통제'는 계급투쟁 수단이지 노동자 통제 자체는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레닌은 매우 빈번하게 분권적 자치 정부 주장에 대해 비판하면서, 노동자 통제는 전국적 기구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자 통제를 회계나 사유 재산 몰수, 자본가 사보타지 감시 기능이라고 생각했고, 생산에서의 직접 경영이나 노동자 결정권을 노동자 통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특히 공장 일반 노동자들의 임금 결정권, 이윤과 분배 결정권 혹은 경영 개입권 등의 주장은 볼셰비키의 생각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로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감에 따라 레닌은 이미 국가의 형태가 된 소비에트에게 모든 권력이 주어져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사회주의혁명의 준비단계에서 노동자들이 산업을 직접 경영하고 관리, 통제할 수 있도록 자치기구들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라고 선동했다. 노동자들의 지지가 필요했던 그는 공장위원회의 혁명성을 이용하기 위해 생산과 경영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혁명 직후부터 그는 노동자 통제를 무력화시키는 방안에 착수한다. 국유화와 노동자 통제에 관한 논쟁이 1918년 전러시아 노동조합 대회를 계기로 본격화되자, 레닌은 전국적 규모의 종합적 계획과 관리가 없는 생산 부문에서의 노동자 통제의 비효율성을 비판하였다. 결국 볼셰비키가 장악한 소비에트를 이용하여 은행, 대규모 기업의 국유화에 이어 공장위원회를 노동조합 산하로 조직, 통제하는 데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점차로 레닌은 노동자 통제가 아니라, 경영자와 전문가에 의해 경쟁과 이윤을 위한 자본주의식 경영방식이 생산성 향상에 유용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전 공업의 국유화 계획을 늦추고 소유와 경영 분리, 구 부르주아 전문 경영인의 단독 책임제를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이후 노동자 통제 하에서 생산성이 급격하게 하락하게 되자, 이제 레닌은 공개적으로 노동자 통제에 대해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노동자 통제에 대해 쁘띠 부르주아적, 반혁명적 무정부주의-생디칼리즘적 경향의 운동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그는 미숙련 비조직 노동력에 대해 부르주아들의 사보타지보다 위험한 것으로 규정하였고 노동 규율 강화, 미국식 테일러주의 경영방식 도입을 찬양하였다.
같은 시기 사회적 소유의 문제도 변질되어 갔다. 레닌을 포함한 볼셰비키들의 협동조합에 대한 입장은 전시 공산주의 시기까지도 큰 변화가 없이 부정적이었지만, 1918년 이후 레닌은 돌연 협동조합을 정치적 측면이 아닌 경제적 측면에서 활용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과거의 유산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심지어 그는 협동조합에 대해 '낡은 자본주의 국가의 유산인 관료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칭송하기도 했다. 신경제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그는 미래 사회주의체제 하에서 사회는 단일한 국가적 협동조합체계로 변화될 것, 즉 사회주의 사회란 하나의 거대한 협동조합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이후 1923년 초에 그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와 부르주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승리가 이루어진 곳에서 나타나는 개명된 협동조합원들의 체제야 말로 사회주의 체제라는 자신의 주장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게 된다. 그에 따르면, 신경제정책은 협동조합을 통해서 실현되어야 할 뿐 아니라, 협동조합 자체가 인민들을 사회적으로 조직하는 보편적인 형태로 발전되어야 했다. 따라서 레닌에게 있어서 신경제정책은 소련 인민 모두의 협동조합화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협동조합을 신경제정책에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신경제정책을 협동조합에 적응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신경제정책 하에서 모든 인민들을 단일한 협동조합으로 끌어들이는 보편적 협동조합체계를 지향했다. 레닌은 전 인민이 포함되는 '생산-소비 코뮌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사회주의 국가'는 바로 이러한 코뮌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점차로 비(非)국가, 시장 부문이 확대되고 공산당 내에서 다시 협동조합을 통제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면서 협동조합의 자율성과 자치권을 제한하는 정부의 통제와 간섭이 증대하기 시작했다. 결국 협동조합의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정부는 협동조합은 아직 자본주의적 요소가 존재하는 일부 경제 부문에서의 기업적 요소가 착취를 확대할 수도 있는 근거지라고 생각했다. 이에 당 지도부는 다시 협동조합 조직을 소비에트 지도부가 원하는 곡물조달 체계의 정상적인 기능에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곡물조달 업무에 당이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협동조합과 같은 이른바 '소규모 경제 단위'에 대한 부정적 태도, 생산과 유통에서의 대규모 집산 경제의 우월성을 믿으며 대규모 일원적 집산조달체계를 구축, 각 부문에서 기능과 역할을 국가가 통제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협동조합의 국유화가 시작되었다. 협동조합의 재국유화 이후 국가 권력기구들과 관료조직들은 경제의 모든 부문을 통제하게 되었고 스탈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기 이전 이미 협동조합은 본연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렇듯 스탈린이 아니라 이미 레닌 시기에 중요한 원칙들이 폐기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폐기에 대해 인정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폐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적인 통제 장치가 없는 강제적 국유화 이후 진정한 사회적 소유와 생산자 직접민주주의 실험의 폐기가 이후 현실사회주의가 붕괴되는 주 원인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레닌이 주도하던 소련 초기에 이미 일당-국가가 완벽히 시장요소를 제거한 채 시민사회와 경제 전반을 지배하는 체계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발전이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노동자 민주주의의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국가적 사안을 언제나 토론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공상적이었음은 물론이지만, 시장의 영역에서 민주주의적 토론이나 국가의 계획으로 생산을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이 혁명 직후 실험 뒤에 곧바로 폐기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혁명 직후 소련을 이상화하는 많은 이들은 노동자 직접 생산 통제의 실험이 실패한 이유로 전쟁, 내전, 제국주의 간섭, 식량 부족, 이 과정에서의 선진적 노동자 계급의 사망, 생산 통제를 담당한 노동자들의 경험 부족 등을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요인들과는 별도로 그 자체 메커니즘의 한계가 존재했다. 사회주의 붕괴의 원인이라고까지 주장되어지는 현실사회주의 사회의 관료제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왜 유독 사회주의 체제의 관료제가 문제가 되는지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즉 모든 부분에서의 사적 소유와 시장 원리의 철폐의 원칙에 의한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필연적으로 자본주의체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관료제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레닌은 대규모 경제, 집산적 경제, 중앙 집중적 경제를 외쳤지만, 혁명 직후 곧바로 그것이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고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공업의 국유화 선언 전까지 상당한 부분을 지속적으로 국유화에서 제외시키려 했던 것부터 사적 소유와 시장을 놀라울 정도로 허용했던 신경제정책의 채택에 이르기까지 혁명 초기의 레닌의 계획 변화의 본질을 파악했더라면, 이후 오랜 기간 동안 '국유화=사회주의'라는 도식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었고, 이런 도식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비중심부 국가들에서는 더욱 적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미 아주 오래 전에 이해했을 것이다.
다양한 사회적 소유의 실험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노동대중이 갖는 것, 그리고 나아가 노동대중이 직접 주인이 되어 공장과 지역의 경영과 행정에 참여하도록 하되, 현실사회주의의 건설과 붕괴 속에서는 어떤 이름으로도 인간이 시장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헛된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시장경제체제를 완전히 전복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시장의 폭력성을 제어할 수 있는 공동체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실현의 다양한 방안들을 지혜롭게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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