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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외국 성매매 여성의 고백 "한국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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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외국 성매매 여성의 고백 "한국에서는..."

[민미연 포럼] 대한민국은 '정서적 허기' 상태

"한국에서는 많이 힘들었어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바로 앞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내가 무안할 만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세상으로부터의 무감각한 이런 초연함은 어디에선가 본듯 익숙하다. 그렇다. 그녀의 이런 표정과 말투는 거친 세상을 간신히 견디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거친 세상의 풍파를 자신의 몸뚱이 하나로 견뎌내는 사람들만 가지는 특징은 체념과 달관 그 사이 어디쯤 있을 자신과 세상을 대하는 무덤덤한 태도다. 깊은 고통을 경험하는 이는 자신의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유폐시킨다. 스스로 유폐되어 있는 사람들의 특징적 몸짓과 말투가 그녀에게서 나왔다. 그녀는 한국에서 수만 리 떨어진 뉴질랜드에서 일하는 창녀였다.

나는 여러 해 전 뉴질랜드에서 건설업자로 일한 적이 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지방에 사는 교민이 통째로 월세를 놓은 블럭하우스베이 지역의 외부 수리를 하던 중이었다. 하루종일 커튼이 쳐져 있어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공사를 빨리 끝내기 위해 평소보다 늦은 저녁 무렵까지 일을 하자, 그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집안 사람들을 봤다. 대여섯 명의 여성들은 그들을 관리하는 중국인 남성 한 명과 살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구도 우리와 눈길을 마주치지도 않았고, 우리의 인사에 답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그녀들의 직업을 알았고, 그녀들은 우리와 거리를 두려했다.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 어느 저녁, 집안에 살던 20대 여성 한 명이 문을 열고 작은 강아지를 데리고 나왔다. 집안 여성이 혼자 이렇게 집 밖을 나서는 것은 처음 봤다. 그녀들이 우리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현관 앞에서 정면에서 마주쳤기에 의식적으로 피하는 것은 오히려 어색했다. 나는 먼저 "날씨 좋네요"라는 뻔 한 인사를 했다. 상투적 인사말에 그녀는 군말을 덧붙인다. "며칠 비가 오더니 오늘은 참 날씨 좋네요. 아저씨들은 언제쯤 공사 끝나요?" 예상치 못한 답변에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뉴질랜드가 참 좋은 곳 같다는 말에 나는 얼른 대답했다. "그래도 사람 사는 재미는 한국이 훨씬 좋은 것 아니에요." 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무표정한 얼굴에 고통이 살짝 스쳐가는 듯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렸다. 다시 나를 쳐다보면서 그녀는 말했다. "한국에서는 많이 힘들었어요."

힘든 사람은 힘들다는 말을 쉽게 내뱉지 못한다. "힘들다"는 언명이 주는 약간의 무게감조차 견디기 힘들만큼 경계선에 있기 때문이다. 그 무게감을 견디면서 말하는 "힘들다"는 말은 듣는 이의 마음을 누른다. 말하는 사람의 마음이 깊게 느껴지기에 그러하다. 그리고 그 마음에 죽음의 불온한 기운이 감지되기에 그러하다. 이때 처음으로 대한민국이라는 선진국의 '선진'이 그 나라 하층 서민의 삶과는 별다른 관계없는 '선진'임을 알았다. 이후 나는 단절과 고통을 감내하려 짓는 이런 무표정을 다시금 보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이런 저런 모임을 나가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갔다. 어느 독서모임에서 30대 남성을 알게 되었고, 그는 나를 '선배님'이라고 칭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 무표정했다. 그의 무표정은 독특한 무표정이었다. 사람의 무표정에는 무표정을 발산하는 사람의 기운이 드러난다. 주위를 내려 보는듯한 자만심 가득한 정서에서도 무표정한 얼굴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 후배의 무표정은 독특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배려심을 보이면서도 얼굴은 슬펐다. 이때 마음 상태를 눈치챘어야 했다. 그의 무표정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그는 친절했다. 그의 친절은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필사적 노력이었다. 결국 그가 자살하고 나서 그의 특유의 무표정이 이전에 뉴질랜드에서 봤던 여성의 무표정과 유사했음을 깨달았다. 세상에서 고립되어 힘겹게 분투하는 사람들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간다. 무표정만이, 무감각만이 세상의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유일한 기제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무표정하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표정이 없다. 십수 년 전 관광객을 많이 유치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함께 웃는 얼굴로 거리를 지나가자던 캠페인을 TV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외국인이 한국에 오면 한국인들의 표정이 너무 딱딱해 무섭다고 느낀다는 말도 덧붙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무표정은 개인적 특성이 아니다. 가족심리치료에서는 정신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특정 가족구성원 한 사람에게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가족 구성원 누군가의 정신적 문제는 가족 전체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징표이듯 무표정한 개인이 많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무표정은 '단절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후배의 경우처럼 때로는 죽음으로 이어진다.

프랑스 학자 뒤르켐은 베버와 함께 현대사회학의 양대 거장이다.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근대자본주의를 설명했듯 뒤르켐은 자살 현상으로 사회를 해석한다. 뒤르켐은 자살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한다. 뒤르켐에 따르면, 자살의 원인은 사회적으로 통합되는 정도 즉 한 사회나 집단의 응집력이나 연대감의 결핍에 있다. 응집력과 연대감이 유지되는 사회에서는 자살이 훨씬 낮은 비율로 발생한다. '자살'이 한국을 대표하는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 최고 수준의 높은 자살률을 걱정한다.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서 높은 복지를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자살이 경제력만의 문제라면, 오히려 해결이 쉽다. 문제는 자살의 발원이 좀 더 먼 곳에 있다는 것이다. 자살을 낮은 복지의 문제로 보는 것과 국가시스템의 근원적 문제로 보는 것은 서로 다른 대책을 필요로 한다.

자살은 낮은 복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국 체제의 자본주의적 변환의 성공 여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19세기가 되면 서구에서 자본주의는 일반화된다. 모든 인간의 유대관계가 뒤로 물러나고, 오로지 돈으로 대표되는 사회가 나타나면서 많은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진다. 이런 사회에 대해서 사상가 칼라일은 '금과 지폐로 맺어진 모든 사회적 유대가 붕괴해버린 세상'이라고 표현했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유대를 이완시키는 경향이 있다. 농촌공동체는 무너지거나 약화되어 간다. 아니, 개발이 막 시작되는 초기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저임금에 의존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자본주의화를 위해서는 농촌공동체의 몰락은 오히려 장려되어야 했다. 농촌을 약화시켜 저임노동자를 만들어 내지 않고는 자본주의는 성공하기 힘들다.

농촌에서 인간과 인간으로 이루어지던 친밀한 관계는 돈을 매개로 하는 삭막한 도시적 관계로 바뀐다. 인간은 누군가와 이어지기를 원한다. 현대심리학의 애착이론은 누군가와의 애착이 얼마나 인간 심리에 결정적인가를 말해준다. 개인과 사회와의 연결이 탄탄했던 전근대와 달리 자본주의적 근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만성적인 '정서적 허기'를 느끼게 된다.

▲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로버트 D. 퍼트넘 지음, 정승현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 ⓒ페이퍼로드
이 정서적 허기를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공동체에의 주체적 참여가 필요하다. 정서적 허기를 개인적 탐닉으로 해결하려면, '부자 되기'라는 물신주의나 약물 중독 등으로 빠진다. 퍼트남은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의 중요성에 대해서 오랜 시간 연구한 사회학자다. 그는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정승현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이라는 세기적 명저를 통해 사회 발전에 있어서 '신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신뢰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퍼트남에 의하면 신뢰는 자발적 모임이나 결사체(association)에 참가한 사람들이 긍정적 상호작용의 경험을 하고, 이 경험이 이후 공동체에 대한 정서적 연결로 확장될 때에만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를 좋은 나라라고 느끼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만나는 모임과 소규모 사회에서 좋은 경험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주위와의 행복한 유대감은 사회를 신뢰하게 만들고 이것은 다시 공동체 전체의 신뢰로 흘러가게 된다.

한국의 행복지수가 낮다는 것은 다들 신문기사를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선진국보다 가난해서 행복지수가 낮다고 지레짐작한다. 그런데 한국의 행복지수를 끌어내리는 것은 행복지수를 구성하는 공동체지수가 극단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가령 공동체지수는 이런 것을 묻는다. "지난 6개월간 마을을 위해 순수한 자원봉사를 몇 시간 하셨나요?" "당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당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등 이런 질문은 공동체에 대해 개개인이 얼마나 유대감을 갖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한국의 행복지수가 낮은 것은 바로 이런 것에 기인한다.

한국의 자살률을 줄이기 위해 복지확대를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이다. 자살은 돈의 결핍에서도 오지만, 그 결핍을 더욱 뼈저린 좌절로 만드는 것은 공동체와의 유대감 상실이기에 그렇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공동체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귀속감을 느끼게 만들고 그 속에서 안정감과 유대감을 흐르게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살이라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공동체적 대안이 아닐까?

공동체를 잃어버렸듯 우리는 표정도 잃어버렸다. 이제 우리의 표정을 찾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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