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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하향선택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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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하향선택결혼'을 했다

[박진현의 제주살이] 육아로 깨달은 성 평등

3월 8일 여성의 날, <한겨레>를 보다가 한 칼럼 제목에 눈길이 갔다. 권인숙 명지대 교수가 쓴 '여성이 '하향선택결혼'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라는 칼럼이었다. 이 칼럼이 내 관심을 끈 이유는 나랑 10년째 살고 있는 아내가 바로 '하향선택결혼'에 해당될 것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관련 기사 : 여성이 ‘하향선택결혼’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나는 잠시의 외도 기간을 빼면 30살부터 지금까지 노동조합 활동가로 살고 있다. 아내는 사회적 통념상 1등 신붓감에 가까운 공무원이다. 하향선택결혼은 여성이 자신보다 스펙이 떨어지거나 수입이 낮은 혹은 직업 안정성이 낮은 남성을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면, 누가 봐도 아내는 하향선택결혼이고, 나는 상향선택결혼이다.

보건사회연구원 인구포럼에서 제출된 저출산 대책에서 하향선택결혼이라는 말이 나왔다. 권 교수는 "비혼 여성들이 고스펙이 저출산 원인이니 스펙 쌓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는 저급해서 관심도 가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하향선택결혼'이라는 대안에는 웃음이 터지긴 했지만 눈길은 갔다. 약간 반갑기까지 했다"고 썼다.

권 교수는 여성의 임금이 남성보다 낮은 노동시장의 구조적 문제, 남성이 상향결혼을 할 의사가 있는지, 문화적인 이유 등을 지적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여성에게 하향선택지는 좁다고 강조했다. 내가 아내랑 연애할 때 주위 여자 선배들이나 평등 세상을 앞당기기 위해 싸우는 여성 노동운동가들마저도 "여자는 남자가 임금을 자기보다 적게 가져오면 싫어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여성이 사회적 지위나 임금이 높을 때 가정이 원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박을 받았냐고? 글쎄, 아내가 내 임금이 적다고 구박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럼, 가정이 원만했느냐고? 어려움이 많았다. 육아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8살 윤슬이, 4살 은유.

이쯤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가 가사나 육아노동을 하지 않는 보통의 한국 남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감히 말하지만, 전혀 아니다. 첫째 윤슬이 때는 육아휴직 1년, 둘째 은유 때는 육아휴직 6개월을 했다. 아내는 윤슬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9개월만 했다. 나에게 승진 문제 때문에 일찍 복직해야겠다고 말했는데, 그때는 그게 사실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육아가 힘들어서 일찍 직장으로 복직한 것. 나중에 속은 걸 알았지만 어쩌랴, 이미 지난 간 시간인걸!

연애하던 시절, 애인이었던 아내가 결혼하면 나에게 "뭐해 줄 거냐?"고 물었다. 그래서 난 호기롭게 "아침밥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직업의 특성상 야근이 많아 저녁에는 뭘 해줄 수는 없을 테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을 해주면 되겠다고 생각한 것. 결혼하고 나서 땅을 칠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은 후회했다. 차려진 밥상을 내 발로 찬 것이었다. 아내가 밥상을 차린다는 것은 고대 이래 끈끈히 내려온 가부장적인 남성의 권리였는데 말이다.

▲ 지난 주말에 애월초등학교에 놀러갔다. 갑자기 아이들이 아빠를 놀린다면서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했다. ⓒ박진현

이런 나인데도, 우리 부부는 육아 문제로 어려움과 갈등이 많았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자유가 없어졌다. 시간의 의미가 달라졌다. 집에서의 모든 시간은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었다. 육아는 출근도 퇴근도 없는 중노동이었다. 맞벌이로 육아를 한다는 것, 잠시라도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둘이서 올곧이 육아를 책임져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평등 육아'가 우리 부부의 좌우명이지만, 나 역시도 편견 속에 있다는 걸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첫째 윤슬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우리 부부는 학습지를 공부를 시켰다. 서울에 살 때 윤슬이는 성미산 공동육아어린이집에 다녔다. 2014년 제주로 이주해서도 윤슬이는 보물섬 공동육아어린이집에 다녔다. 공동육아어린이집은 인지 교육을 전혀 하지 않는다. 요즘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 중 90%는 한글을 알고 온다고 하는데, 아내가 특히 걱정이 많았다.

아내는 학습지 공부를 시키면서 아이를 재촉했고, 결국 윤슬이는 엄마와 공부하지 않고 아빠와 공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나는 공부시키는 일마저 내 몫이 되는 건가 싶어 밖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불평했다. 어느 날 권 교수의 칼럼을 읽다가 아이 교육은 당연히 엄마가 맡아서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남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한 편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면은 3월부터 학습지를 끊기로 했다.

첫째 윤슬이가 3월 2일 제주 애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혁신초등학교다. 입학식 날, 윤슬이 담임선생님이 학부모들에게 아이가 한글을 늦게 안다고, 셈을 못한다고 재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아이들마다 배우는 속도가 다르다고. 1학기 때에는 받아쓰기도 안 한다고. 아직 한글을 모르는 윤슬이도, 우리 부부도 안심을 했다. 윤슬이는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숙제도 많다고 걱정했다. 윤슬이는 입학식 마친 뒤 "공부를 별로 안 한대"하면서 무척이나 좋아했다. 어린이집에서 워낙 자유롭게 유아기를 보내서 초등학교 적응을 어려워할까 걱정했는데, 입학한 지 3일 만에 혼자 걸어서 학교에 가는 등 생각보다 훨씬 잘해내고 있다.

우리 부부가 아이를 키운 지 만 6년이 넘었다. 이제야 '평등한 육아'가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데 조금의 내공이 생겼다. 권 교수는 칼럼에서 "여성의 노동시장에서의 지위, 직업적 안정성, 가사노동의 성별화, 아이들 교육에서의 엄마의 역할 등이 사실 혁명적으로 변해야 하향결혼은 자연스러운 경향으로 나타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아내는 나보다 8살 어리다. 처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하향결혼을 선택했다. 나는 평등한 가족을 선물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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