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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파면, 민주주의의 일시적 승리일 수 있지만...

[민미연 포럼]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하여

"개·돼지 취급받던 시민들이 민주주의의 승리를 이루어 냈다. 이제 진짜 개·돼지에게도 민주주의를! 생태민주주의를 통해 민주주의는 완성된다."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파면되는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이를 두고 국내는 물론 세계 언론은 일제히 "한국 국민과 민주주의 승리"라느니, "전 세계에서 위협을 받는 자유민주주의에 힘을 실었다"느니, 떠들고 있다.

분명 대한민국 헌법1조 1항과 2항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확실히 명시되어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불과 몇십 년 만에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민주주의 쟁취를 애타게 외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군사정권이 물러난 후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의 운영원리로 확고히 자리 잡은듯했고,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몸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왜 이 시점에서 새삼스럽게 다시 '민주주의의 승리'일까? 심지어 권력의 뒤에 숨어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유린해 대통령 파면의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진 최순실 씨조차도 "민주주의 특검이 아니다"라고 부르짖을 정도로 민주주의가 만연한 마당에 왜 이제 와서 다시 '민주주의의 승리'일까?

민주주의의 의미는 핵심적 내용은 유사하지만, 사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한 사회가 민주사회인지 아닌지, 혹은 민주화가 됐는지 아닌지의 기준도 모호하다. 하지만 '다수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 있으면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나름의 기준이 제시되기도 한다. 이러한 기준에서 본다면 이번의 대통령 파면은 민주주의의 승리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진정한 민주국가임을 증명한 것이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 하나의 사건으로 자본주의와 결합되어 더욱 복잡해진 자유민주주의의 앞날이 보장되거나 완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서 처음 등장하였고 한 사람이나 소수가 지배하는 군주정이나 귀족정과 달리 시민 전체가 지배하는 통치 형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근대 서양에서 자본주의가 성립되고 시민계급이 절대 군주정을 타도하여 근대 국가를 형성한 17~18세기에 자유주의사상과 결합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의 형태로 다시 등장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러한 민주주의는 '대의제로서 주로 정부의 조직 원리와 국가 권력을 제한하여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원리'로 이해된다. 그리고 '사회적 약자가 혹은 다수의 대중이 스스로의 처지를 개선하고 사회 성원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실천의 형식'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도 주로 서양의 자본주의국가에서 수 세기에 걸쳐 발전해 온 이러한 자유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 헌재의 탄핵 인용 결정이 난 다음날(3월 11일), 시민들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폭죽을 터뜨리며 자축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런데 자유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는 오랜 역사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러 위협요소를 지니고 있다. 특히 민주주의는 그 속성상 민주주의의 위협요소를 내포하는 자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더욱 위기에 처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본래 개인이나 기업들의 경쟁적인 이익추구를 보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주의는 개인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세력 집단들 간의 경쟁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는 대기업 집단과 같은 각종 이익집단들이 형성되어 자신의 집단적 이익을 내세우게 되는데, 이러한 세력 집단들 앞에서 개인들은 자율성을 잃고 무기력한 존재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요즈음 이러한 집단은 기업집단에 한정되지 않는다. 관료 집단일 수도 있고, 군부일 수도 있고, 정당집단이나 언론, 지식인 심지어는 노동자 집단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심각한 것은 사회의 운영규칙이 이러한 집단들 사이의 세력관계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수정됨으로써 힘이 없는 다수 대중의 의견은 배제될 공산이 커진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사회적 약자가 혹은 다수의 대중이 스스로의 처지를 개선하고 사회 성원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한 '실천의 형식'으로 이해된다면, 사회적 약자 혹은 다수 대중의 이익을 반영하는 의견이 배제되는 이러한 자본주의 시스템에 민주주의라는 꼬리표를 붙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간 민주주의로 포장되어 오기는 했지만, 사실상 재벌독재니, 군사독재니, 관료독재니 하는 말들을 수없이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실제로 저들 기득권 집단의 지배에 있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집단 이익을 추구하는 세력집단, 그것이 재벌집단이건, 관료집단이건, 군대집단이건, 정당집단이건, 종교집단이건 사적 이익의 추구에 여념이 없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아무리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더라도 참된 공동체가 아니다. 참된 공동체란 전체의 발전을 자신의 발전과 동일시하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자유롭고 평등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이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민주라는 이름으로 공익보다는 일부집단의 사익에 몰두하는 것은 이러한 참된 민주공동체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는 모두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잃게 된다.

민주주의의 위협요소는 이뿐만이 아니다. 근래 신자유주의로 심화된 양극화와 같은 불평등 또한 계층 간의 적대감을 키워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그리고 정경유착 등 부패는 정부 관료들이 자신들을 지원해 주는 소수의 의견을 따르게 만든다. 그래서 부패 또한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협이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1인 1표'라는 슬로건은 유권자 간 평등성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이지만 투표자들이 동등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투표자들이 단기적인 사적 이익을 장기적인 공공의 이익보다 중요시할 때 바람직한 결론을 이끌어내지 못하게 될 위험성이 존재하는 점에서 '비합리적'일 수도 있다. 다수가 통치를 한다 하더라도 압제적일 여지가 있다.

그런데 최근 우리는 국정농단 사건을 통해 민주주의의 이러한 문제가 복합되어 나타나는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게다가 달콤한 공약에 속거나 여론몰이에 휩쓸려 제대로 된 검증 없이 선택한 몰상식한 대통령의 잘못된 민주주의의 운용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뼈저리게 깨우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동안 당연히 들이마시는 공기가 서서히 오염되고 있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듯이, 어렵게 쟁취했던 민주주의가 서서히 오염되어 가고 있었던 것에 무감각했던 것이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그래서 이참에 잠시 소홀히 했던 민주주의를, 어렴풋이 알고 있던 민주주의를, 잘못 알고 있었던 민주주의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는 계기로 삼는 것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불행 중 다행히도 국민들의 깨우침으로 대통령이 탄핵, 파면되어 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승리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모호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신자유주의나 이것이 뒷받침하는 자본주의가 건재하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민주의 이름으로 권력의 맛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들, 즉 집단이익을 추구하는 기득권 무리들도 건재하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여러 요인들이 여전히 상존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러한 민주주의의 문제들과 위협요소들을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주적 절차와 제도에 관한 법률적 정비 등에도 의존해야겠지만, 무엇보다 민주사회의 주체인 시민들의 역량과 그들의 역할에 의존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반성은 물론 민주적 권리와 절차를 존중하는 정치적 훈련과 교육 등을 통한 역량 강화와 능동적이고 활발한 정치적 참여와 활동이 중요하다. 그리고 특히 오늘날과 같이 대의제로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에서는 적극적인 투표참여 행위가 무엇보다도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정치 지도자가 해주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결국 시민들의 자발적인 혁명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미래는 시민에게 달려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각종 이익집단, 세력집단들의 사익추구 행위들이 사회적 약자나 다수의 대중들을 착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집단의 집중적인 사익추구는 자연을 대규모로 남용, 착취하고 있다. 따라서 환경파괴가 만연하는 위기의 시대에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의 정신을 자연에까지 확장하자는 생각이 싹트고 있다. 이게 바로 '생태민주주의'이다.

생태민주주의에서는 '사회적 약자 혹은 다수의 대중'의 자리에 우리 지구생명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인 '미래세대'나 '동물', '식물' 그리고 '무생물적 환경' 즉, '생태계' 같은 것들을 포함시킨다. 그래서 환경 윤리 분야에서는 '권리'니, '도덕적 지위'니, '본래적 가치(intrinsic value)'니 하는 것들을 인간에게 부여할 뿐만이 아니라 동식물과 같은 생명체 그리고 무생물적 자연환경과 같은 생태계들까지 확장하여 부여하고자 한다.

실제로 서양적 전통에서 권리는 단계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알려진다. 권리가 처음 문서상으로 부여된 것은 '대헌장(Magna Carta)'(1215년)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땅을 소유한 백인 남성 귀족에게서만 권리가 부여된다. 그러나 이후 이러한 권리는 '노예해방선언'(1863년)을 통해 노예로 그리고 이후 흑인, 여성 등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1973년에는 '멸종위기종을 위한 법안(Endangered Species Act)'을 통해 드디어 동물까지 권리를 부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환경윤리에서는 식물을 포함하는 생명체들 그리고 무생물적 환경에까지 도덕적 지위나 본래적 가치를 부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물에 권리나 도덕적 지위를 부여하는 근거는 대략적으로 그것들이 '고통'을 느낀다거나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생태계는 물론 자연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과 상호 교환하는 과정에서 숨을 쉬고, 먹고, 마시고, 분해해야 하는 '우리 생명공동체의 구성원'이기에 본래적 가치를 부여해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인권에 대한 열망이나 이념이 17, 18세기에 자유와 평등을 내세우는 민주주의의 기폭제가 되었고 그것이 노예건 흑인이건 여자건 노동자건 모든 인류에게 확장되었듯이, 환경윤리 또한 인간에 의해 부당하게 억압 및 착취당하고는 있는 우리 지구 생명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해방을 안겨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전통의 확장이나 윤리의 진화과정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생태민주주의에서 식물이나 동물 그리고 생태계도 시민이고 그것들도 대표권을 지닌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인간들은 자연의 '정복자'라기보다는 그저 생명공동체의 평범한 구성원, 즉 '시민들(citizens)'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그의 동료 구성원들에 대한 존중과 또한 공동체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을 함축한다. 자연의 정복이나 파괴, 착취, 남용이 아니라 서로의 권리나 가치를 존중하는 건전한 공동체 속에서만 인간의 삶도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들 간의 공동체가 그러하듯 지구 생명공동체에서도 사적 이익 추구에 여념이 없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아무리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더라도 참된 공동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지구 생명공동체에서도 인간중심주의라는 이념으로 무장되어 인간의 사적 이익추구에 여념이 없는 인간집단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아무리 생태민주주의라는 말로 포장되더라도 참된 공동체가 아니고 지속될 수가 없다. 참된 생명공동체란 생명공동체 전체의 발전을 자신의 발전과 동일시하는 인간들로 이루어진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이다. 환경윤리에서는 이와 같이 인간세계뿐만 아니라, 지구생명공동체 모두에 자유와 평등이 실현될 때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어떤 민주주의이든 사실 완전한 제도가 아니다. 그나마 나은 제도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근래의 대통령 탄핵사태를 경험하면서 그리고 생태민주주의라는 제안을 살펴보면서 민주주의는 쉽게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의 일시적 승리에 도취할 것이 아니라, 그것의 유지는 물론 그것의 확장 발전을 위해 끝없는 성찰과 실천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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