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같이 다닌 적은 없지만 동아리 홈커밍데이에서 만나 알게 된 여자 후배한테 연락이 왔다. 급히 상담하고 싶은 일이 있다며 찾아와도 되겠냐고 물었다. 햇볕이 따뜻해졌고, 예정에 없는 상담 따위는 하고 싶지 않은 나른한 오후였다. 꼭 오늘이어야 하냐고 묻는데, 꼭 좀 만나고 싶다는 후배 목소리에 울음이 묻어 있었다.
"연애가 잘 안돼?"
그닥 친밀하지도 않은 선배에게 기껏 만나달라 부탁을 해서 찾아왔지만, 후배는 한동안 운을 떼지 못했다. 조금 상기된 후배의 얼굴엔 화남과 울먹임이 교차하고 있었다.
"비슷해요."
장난기가 발동해 빙글빙글 웃으면서 연애 문제냐 물었는데, 좀 더 망설인 후배의 대답은 그렇다도, 아니다도 아닌,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후배는 30대 중반의 평범한 싱글 직장인으로, 친구가 많지 않고 연애 경험도 많지 않은 이다. 얼마전 휴대폰에 최근 유행하는 모 데이트 어플을 깔았다고 한다. 각자의 나이나 직업, 지역이나 선호도 등을 다 종합해서 컴퓨터프로그램으로 매칭을 해주는 어플인데, 그 어플을 통해 자기보다 두 살 많은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남자는 평범한 외모였지만 산뜻한 느낌이 들게 제법 차려입고 나와 인상이 깔끔했다.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부모님이 홍콩에 거주하고 계셔서 회사가 얻어준 강남의 제법 평수가 넓은 레지던스에서 혼자 살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를 보고나서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했는데 말도 좀 잘 통하는 것 같았다. 괜찮은 인상의 첫 데이트를 마친 후 남자로부터 그 주 내내 연락이 왔다. 남자는 후배가 이상형이라면서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싶다고 말했다. 자기랑 결혼하면 일하지 않아도 되고, 후배가 원하면 홍콩이나 다른 중화권 지역으로 나가 살수도 있다며 달콤한 말들을 건냈다. 자기 부모님이 좋아하실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처음엔 후배도 당황했지만, 그런 남자가 싫지 않았다. 결혼을 전제로 만남을 가져봐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두 번째 만남을 갖게 됐다.
남자는 요리를 해주겠다며 자기 집에 오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남자는 자기를 의심하는 거냐고 서운해 하며 자기 사는 집도 보여주고 자기가 잘하는 요리도 해주고 싶다고 후배를 설득했다.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기로 했는데 너무 거절하는 것도 남자한테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후배의 두 번째 데이트는 남자가 원한대로 남자의 레지던스에서 이루어졌다.
남자가 사는 집 안은 건물 밖에서 느꼈던 것 보다는 평범했다. 간단한 스파게티와 주류가 준비되어 있었다. 식사를 한 후에는 거실 쇼파에 앉아 남자가 다운받아 놓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봤다. 남자가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시작하더니, 수위가 높아졌다. 후배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남자 손을 제지하자 남자가 다시 속삭였다.
"우리 결혼할거잖아요. 제가 별로예요?"
그 순간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고 한다. '결혼 전제로 교제하는 사이인데 몇 번 꼭 만나야 하나 뭐 어때!' 하는 마음부터, '그래도 이건 너무 빠른데. 어쩌지?'하는 마음까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에 남자랑 잠자리를 가졌다. 문제는 그날 이후였다.
"우리가 헤어지고 말고 할 사이예요?"
후배가 헤어지자고 말하자 남자는 우리가 헤어지고 말고 할 사이냐고 반문해왔다. 남자랑 잠자리를 가졌던 두 번째 날 이후로 남자는 돌연 연락이 뜸해졌고 후배를 대하는 태도도 건조해졌다. 결혼 이야기도 자취를 감췄다.
그러면서도 볼거면 밤에 자기 집으로 오라고 요구했다. 후배가 자존심도 상하고 답답해진 마음에 헤어지자고 했는데, 남자의 반응은 애초부터 연인 관계가 아니었다는 반응이었다.
그제야 후배는 남자가 자기와 연인관계라는 전제로 잠자리를 한 것도, 결혼을 전제로 교제를 제의한 것도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후배는 자기가 당한 일이 '데이트 성폭력'이라는 생각에 심각하게 상처입고 있었다. 직업이나 나이가 맞는지는 아직 확인할 수 없어도 어디 사는지는 아는데 성폭력으로 고소할 수는 없는지,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해 했다.
즉, 후배가 가장 알고 싶은 것은 남자와 성관계를 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남자가 후배를 좋아하니 결혼을 전제로 진지한 만남을 갖자고 했기 때문인데 이런 말들이 순전히 자기와 성관계를 하기 위해 속이느라 한 거짓말이니 강간이나 사기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쉽게도 이 사안은 형사법적 관점에서 성범죄로서 처벌하기는 어렵다. 쉽게 말해 정신이 멀쩡한 성인이 동의하에 한 성관계를 처벌하려면, 후배가 아동이나 지적장애인과 같이 성관계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상태 또는 성관계를 하지 않으면 자기나 주변에 큰 위해가 닥칠 것에 공포를 느낄만한 상황 등 특수한 전제가 요구된다.
업무상 위력이나 위계에 의한 성폭력의 경우는 생계나 생존, 사회적 지위 등에 비추어 볼 때 후자에 해당하기 때문에 처벌한다는 것이 법의 취지이고, 실제 이 법의 적용에는 제법 깐깐한 조건들이 요구된다.
후배가 토로한 사안은 남자가 '사랑하니 결혼하자, 결혼할거니 일단 자자'라고 속였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없어진 혼인빙자간음죄라는 법이 있다면 적용을 검토해 볼 여지도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 마저도 실제 적용에서는 불투명한 부분이 있다. 정말 후배가 속을 만큼의 적극적이고 그럴듯한 거짓말이 있었는지, 남자가 당시에 저런 말을 했다고 자백하거나 입증이 가능한지, 남자가 당시에도 진심이 아니었다고 평가될 수 있을지, 혹은 남자에게 동종의 행각이 반복되어 왔는지 등이 점검되어진 후에야 가늠이 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재는 이 혼인빙자간음죄는 폐지가 되었으므로 검토해볼 대상도 되질 못한다. 사기죄 역시도 적용이 어렵다. 통상 사기죄는 속여서 재물이나 재산상 이득을 편취하는 범죄인데, 속아서 성관계를 한 경우가 화대를 주었어야 하는데 편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되는 경우 등으로 지극히 제한적으로 해석되고 있다.
한편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의 경우는 어떨까? 무엇을 이유로든 손해배상을 요구해볼 수는 있겠으나, 문제는 상대가 책임이 없다고 하는데 법원에서 이를 인정해 줄 것이냐다. 이런 경우 상대방이 주장할 내용은 들어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 당시에는 사귀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이야기를 했고 그러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서로 동의하에 가진 성관계였다고 할 것이다. 이후에 마음이 변했을 뿐인데 사랑이 변하는 게 죄냐는 변명도 늘어놓을 것이다. 뻔하지만 이를 두고 위법한 가해 행위로 평가하여 배상을 결정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럼 제가 당한 일은 뭘까요?"
가뜩이나 마음이 혼란스럽고 무거웠을 후배가 울음을 터트렸다.
후배는 스스로 자기가 바보같거나 나빴다고 자책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변호사로서도 한 개인으로서도, 그 남자 아니 그런 놈은 (욕을 해도 무방하다고 느낄만큼) 나쁘다고 생각한다. 그저 하룻밤 성관계나 쉽게 가져보겠다는 심산으로 거짓말로 상대의 마음을 농락하는 것도 도덕적인 관점에서 보면 엄연히 폭력이고 침해다. 다만 그런 폭력이나 침해를 모두 법이 처벌하거나 처결해주지는 못할 뿐이다.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이런 일을 당했다고 스스로를 자책할 필요는 없다.
편리해진 시대에는 만남의 기회도 쉽고 헤어지는 과정도 빠르다. 스마트폰은 그간 표지판을 찾아 헤매고 길을 묻던 수고를 덜고 쉽고 빠르게 길을 안내해주고, 스케줄과 연락처를 관리해주고, 데이터를 분석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준다. 하지만 빠르고 편리해진 순기능 옆에서 스스로 방법을 찾아 고민해볼 시간이 증발되고, 서서히 알아가는 재미와 안정성도 사라진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모두 멀리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특히나 낯선 사람이나 업소, 공간 등을 소개받는 일은 안전의 측면에서 보다 신중함이 필요하다. 알고보면 이들을 소개하는 어플이든 블로거든 모두, 보는 입장에서는 모르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빠르고 편리해진 시대에,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변했다. 편리가 행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조금의 불편한 노력과 점검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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