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사고가 발생하고 시민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와 고속도로가 꽉 막힌 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은 허구가 아니었다.
고리원전 중대사고 발생 시 주변 170만명이 방사선 비상계획구역인 반경 20㎞ 밖으로 대피하는 데 22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산환경운동연합, 환경운동연합, 민간연구기관인 원자력안전연구소는 8일 부산환경운동연합 4층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같은 시뮬레이션 결과를 발표했다.
원자력안전연구소는 고리원전 반경 20㎞ 내에 있는 부산시, 울산시, 경남 양산시 등 3개 지역의 인구 170만명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해당 지역의 건물과 산 등 실제 지형을 고려한 대기확산모델과 실제 행정구역의 인구 분포와 도로 현황 등을 적용한 '동적 대피 시뮬레이션'을 활용했다.
연구소는 방사선 누출과 같은 중대사고를 발생 30분 후에 통보하는 것을 가정해 대피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살펴봤다.
그 결과, 170만명 대부분이 고리원전 반경 20㎞ 밖으로 대피하는 데 22시간이 걸렸다. 꼬박 하루가 걸린 셈이다.
대피가 늦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차량 정체 탓이다.
특히 부산-울산 고속도로로 연결되는 해운대 터널과 부산 만덕터널 입구로 차량이 몰려 정체가 심했다.
부산의 도심인 서면 중심가의 경우 사고 24시간이 지나도 10% 정도의 시민이 대피를 마치지 못했다.
고리원전 반경 10㎞ 구역을 벗어나는 데에도 12시간이나 걸려 부산-울산 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를 관통하는 신규 도로가 필요한 것으로 분석됐다.
이 시간 상당한 시민이 방사능에 노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소 측은 지역별 대피경로와 최적 대피경로의 선정, 주기적인 대피 훈련, 최적의 구난 시스템 구축 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국내의 방사선 비상계획 구역은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에서야 기존 8∼10㎞에서 20∼30㎞로 확대됐다.
이 범위에 속하는 지역에서는 사고에 대비한 방호방재대책이 수립되고 비상대피훈련 등이 실시되고 있지만 미흡하거나 형식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한병섭 원자력안전연구소 소장은 "국내 원전 방재대책은 인명 대피에 대한 부분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아 대피 시나리오가 전무하다"며 "원자력안전기술원이 방사성 물질 확산 시뮬레이션은 했지만, 지자체·시민에게 알리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김성욱 원자력안전연구소 운영위원은 "도로망 확충도 중요하지만, 피폭을 막기 위해서 집단 또는 소규모 대피소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원전 당국이나 정부가 적극적으로 원전 관련 정보를 알려 시민이 빨리 대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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