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진도는 통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섬입니다. 이름처럼 보배[珍]에 견줄[比]만한 섬이지요. 비진도 외항마을 해변 코발트빛 바다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푸른 물이 들게 합니다. 지금은 소매물도나 욕지도 등의 명성에 가려져 있지만 과거에는 통영을 대표하는 섬이었습니다.
특히 미인도전망대나 선유봉에서 펼쳐지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풍경은 넋을 잃게 만듭니다. 누군들 유토피아의 꿈을 꾸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감나무 세 잎 날 때 콩을 심는” 사람들의 섬.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58강은 2017년 4월 1(토)∽2(일)일까지 경남 통영의 비진도에서 열립니다. 상춘의 시절, 꿈결 같은 섬으로 초대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답사지인 통영 <비진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대물들의 시대
고래가 살았다. 통영 바다에도 거대한 고래떼가 헤엄쳐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통영의 어느 섬을 가나 고래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래 때문에 생긴 지명도 한두 곳쯤은 꼭 남아있다. 집채만한 고래와 마당만한 가오리, 염소를 통째로 삼키고 바다를 유유히 헤엄쳐가던 구렁이, 산란철이면 섬으로 찾아오던 상어떼들. 통영 섬 곳곳에는 믿기지 않는 전설처럼 거대한 대물들의 이야기가 넘쳐난다.
비진도(比珍島)에도 고래 이야기가 전한다. 비진해수욕장 동남쪽 상투바위 안쪽의 해안 절벽 아래에는 고래건턱여라는 이름의 염등(암초)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였다. 멸치떼를 쫓던 고래 한 마리가 이 염등에 턱이 걸려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고래를 발견한 비진도 주민들은 배를 타고 염등으로 모였다. 주민들은 도끼와 톱으로 고래의 살을 잘라내서 너럭바위에 말렸다. 온 섬사람들이 다 달라붙었지만 고래를 전부 해체하는 데는 꼬박 열흘이나 걸렸다.
어느 날 고래를 해체하던 마을 사람 하나가 갑자기 미끄러져 사라져버렸다.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살펴보니 상투가 보였다. 고래의 음부에 빠졌는데 온몸이 다 들어가고 머리끝 상투만 달랑 남았던 것이다. 익사 직전의 사람을 놓고도 동네사람들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다들 배꼽이 빠지게 웃고 상투를 움켜잡아 끌어냈다. 고래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만한 이야기다. 말린 고래 고기는 집집마다 나누어져서 춘궁기에 요긴한 양식으로 쓰였고 고래가 턱을 걸쳤던 염등은 그래서 고래건턱여라는 이름을 얻었다.
비진도는 통영에서 해변이 가장 아름다운 섬이다. 이름처럼 보배[珍]에 견줄[比]만한 섬이다. 섬에는 내항과 외항,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내항은 안섬 혹은 안비진, 외항은 밧목 혹은 바깥비진이라 한다. 통영 쪽으로 가까운 마을이 안비진이고 큰 바다에 가까운 마을이 바깥비진이다. 과거에는 수포와 파정개 두 뜸(한 동네 안에서 몇 집이 따로 모여 형성된 작은 마을)도 있었지만 지금은 폐촌이 되고 없다.
비진도는 일찍부터 외부 문물이 들어와 크게 번성했다. 그래서 한때는 한산면의 서울이라 불릴 정도였다 한다. 그 옛날에 비진도 주민들은 연극을 제작하기도 했었다. 주민들은 1945년 <흑가면>이라는 연극을 제작해서 비진도뿐만 아니라 이웃 섬 용초도까지 원정 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1948∽1949년에는 <울고 웃는 한 평생> <춘향전>을 공연했다. 섬이지만 비진도의 문화적 소양이 대단했음을 짐작케 하는 이야기다.
“게으르게 살았어야 했는데”
뉴매물도 페리호는 비진도에 나그네를 부려놓고 서둘러 떠난다. 비진도 외항마을 해변, 노인 한 분이 백사장에서 해초를 줍고 있다. 노인은 몸을 가누기도 힘겨운지 움직일 때마다 얼굴을 찡그린다.
"할머니 그거 몰이지요. 뭐에 쓰시려구요?"
"옛날에는 이거를 보리밭에 안 넣으면 밥 굶는다 했어요."
"보리밭에 거름 주려구요?"
"고추 심겨 아들 줄끼라. 고구마 밭에도 넣고. 옛날 집집마다 다 할 때 같으면 천신도 못하지."
과거 섬에서 농사를 많이 지을 때 해초는 요긴한 거름이었다. 진질이나 몰 같은 해초를 거름으로 주면 똥거름보다 생산성이 높았다. 식용이 아니라도 해초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농경을 포기할 수 없는 섬에서 해초는 여전히 유용한 거름이다.
"어렵고, 몸 아프고, 허리 아파 걷지도 못하고 그래가 살고 안 있나."
노인은 혼자 말처럼 하늘에 대고 고통을 하소연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하늘은 묵묵부답이다. 노인은 외항마을 바다에 바짝 붙어 산다. 노인의 이웃집 하나는 지붕이 날아가고 없다. 할머니는 중학교 1학년, 손녀딸과 둘이 산다.
"아들 손주 하나 대꼬 산다. 아들은 대전에 가 일한다. 중노동 한다. 집 짓는데 다니는데, 거는 일 있으면 살고, 일 없으면 죽는다."
노인은 오늘 해변에서 미역과 톳을 거두었다. 예부터 비진도 미역은 맛있기로 이름이 나서 비곽(比藿)이란 이름까지 얻었으며 통제영에서 조정에 진상하기도 했었다.
"톳은 말라가지고 해묵기도 하고, 생으로도 해 묵고, 김치도 해 담아 놓으면 맛있다. 요기 생미역 갖고는 생선국 끓여놓으면 맛있다."
노인이 미역귀 하나를 떼어준다.
"묵어봐, 꼬시다."
미역귀를 씹으니 고소하고 단 바다향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미역은 강한 알카리성 식품이다. 임산부가 출산 후 미역국을 먹는 것은 임산부에게 꼭 필요한 무기질 특히 칼슘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임산부는 태아의 치아와 골격 형성에 필요한 칼슘의 손실이 심하다. 미역은 이를 보충해 준다. 출산 후에 미역국을 먹이는 이유다.
자식이 있어도 다들 어렵게 살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팔순의 노인. 노인은 병든 몸 이끌고 밭농사도 짓고 해초도 뜯고, 굴도 깨가며 하루씩 생을 연장한다. 지루한 삶, 어서 떠났으면 좋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다면 삶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돈을 벌 재주가 있나. 몸디가 주저 앉았는디. 뭔 부지런을 그리 떨어갔고 몸디가 성한데가 없다. 게을러서 방바닥에 주저앉아 살았어야 했는디. 옛날 수월케 산사람은 아직도 허리 빳빳하다."
노인은 부지런하게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만 때늦은 회한은 부질없다. 영감은 19년이나 병치레를 하다가 떠났다. 노인은 통영의 산양에서 태어나 스물다섯에 섬으로 시집 와 꼬박 55년을 살았다.
"일기장을 썼으면 석 짐도 더 될 것인디. 여그가 바람 때리면 겁나. 여그서 평생 살면서 큰 태풍만 세 번 만났다. 보릿고개 넘었제. 숭년 당했제. 아이고, 아이고 내가 뭐한다고 와갖고. 우리 아배, 옛날에는 시집 못 살고 가면 죽는 줄 알고, 그라이께내 살았제.”
해수욕장이 있는 외항마을은 대부분의 집들이 민박을 친다. 대형 펜션도 서너 채 들어섰다.
"집도 이층으로만 해서 마을이 다 같이 잘 살았으면 좋을텐디 멫 집만 잘 살라고들 집을 높이 올리니 못 사는 사람만 더 못 산다."
노인은 관광업의 혜택이 마을 사람들에게 고루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 아쉽다. 재력 있는 몇 사람이 대규모로 고층의 펜션을 지어놓으니 관광객들은 허름한 민박은 잘 찾지 않는다.
비진도에는 제삿날이 같은 집이 여럿이다. 운명을 가른 것은 1959년 음력 8월 14일, 추석 전날이었다. 그해 한반도의 수많은 인명을 거두어간 사라호 태풍은 이 섬 어부들도 떼죽음으로 내몰았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앞 바다의 정치망 그물을 걷으러 간 섬의 남자들 아홉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삶을 건지는 그물이 자주 죽음의 덫이 되기도 하는 섬 살이.
감나무 세 잎 날 때 콩을 심는다
외항마을에서 고갯길을 넘어 내항마을로 간다. 이 길은 신거름이다. 신거름은 새로 난 길, 신작로란 의미다. 이 고갯길이 옛날에는 무서운 곳이었다. 애기덤불과 생봉이 있었기 때문이다. 애기가 죽으면 독에 넣어 아기 무덤을 만들었던 곳이 애기덤불이다. 학림도의 애기당과 같다. 바로 곁의 섬인데도 이름이 다른 것은 아무리 작은 섬도 섬은 스스로 독립적인 문화를 형성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이면 “응애 응애” 우는 아기 울음소리가 비바람에 섞여서 들려왔다 한다. 생봉은 초분의 이 지방 이름이다. 옛날 이 섬에서는 음력 2월에 죽으면 바로 매장할 수 없었다. 대신 땅위에 나무 단을 만들고 관을 안장한 뒤 초가지붕을 씌웠다. 그것이 생봉이고 초분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2중 장제의 하나다.
내항 산비탈 밭에서는 땅두릅 수확이 한창이다. 땅두릅은 봄철 한산도와 비진도를 비롯한 한산면 일대에서 가장 큰 효자 작물이다. 주민들은 시금치처럼 오래 뜯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땅두릅은 수확 기간이 이십여 일 안팎으로 짧다. 밭에서 수확한 두릅은 깨끗이 씻어 건조한 뒤 다음날이면 한산도농협으로 보내져 경매된다. 봄이 와도 이제는 더 이상 산과 들에 나물 캐는 처녀는 없다. 나물 캐던 처녀는 어느덧 일흔 넷 노인이 되었다.
"때가 다 됐어요. 갈 때가 다 됐어요. 자녀들은 호빡 나가고 없고, 젊은 사람들은 아애 없어요."
노인들만 남은 섬, 비진도는 반농반어의 전형적인 섬마을이다. 파도가 세서 물고기 가두리 양식은 어렵다. 바다에는 미역이나 전복, 해삼, 멍게 등을 가두지 않고 자연 상태로 양식한다.
내항마을 어느 창고 앞, 노부부의 두릅 손질이 한창이다. 노인은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섬에 100가구 800여 명이 살았다고 기억한다.
"그때는 작은 섬에 사람이 너무 많다 싶었지. 50가구만 살면 안 살아지겠나 했는데."
소원처럼 지금 섬에는 50여 가구가 살고 있지만 주민은 겨우 120여 명만 남았다. 이제는 사람이 아쉽다.
"명절 때나 돼야 동네가 사람 사는 것 같지. 애 울음소리도 없어. 이래갖고 십년만 있으면 도깨비가 나겠구만."
창고 옆 텃밭에는 무슨 작물을 심었는지 밭두둑이 단정하다.
"여기 콩 심으셨어요."
"아니 팥 갈았어요."
"콩 심을 때가 안 됐나요?"
"콩은 날짜 따져 갈면 안 되고, 감나무 이파리 세 잎 날 때 갈면 딱 좋습니다."
감나무 이파리 세 잎 나는 날 콩을 심는다! 노인의 말씀이 한편의 시(詩)다.
물개 가는 길
외항에서 수포마을로 가는 해안 길은 오래된 흙길이다. 한동안 청보석의 바다가 보이는 비탈진 산자락을 따라가던 길이 숲으로 사라진다. 해변의 숲은 동백나무와 비자나무, 새 소리로 아득하다. 길가에는 사람의 자취 없다. 진달래와 산벚꽃은 어두운 숲길의 가로등이다. 절정으로 피어오른 선홍의 진달래꽃, 하얀 산벚꽃의 점등으로 숲은 눈부시게 환하다.
파도는 동백나무, 잣밤나무 숲 아래까지 와서 일렁이고 겁 많은 염소들은 인기척에 놀라 숲속으로 달아난다. 사람을 밀어내는 아스팔트길과 달리 흙길은 사람을 품어 안는다. 아스팔트길은 단절의 길이지만 흙길은 소통의 길이다. 길 가는 내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새들과 바람과 나뭇잎과 바다, 바다. 간간이 들리는 어선의 기관소리까지도 이 숲의 흙길에서는 자연의 소리로 포섭된다.
길의 끝에 수포마을이 있다. 수포는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너무 달고 맛이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본래 물 좋은 포구란 뜻의 물개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수포가 됐다. 마을은 인적이 없다. 마지막까지 살던 노인들이 이승을 떠난 뒤 마을은 폐촌이 된 것일까. 그래도 눈 밝은 수행자 하나 있었나 보다. 마을은 이제 절골이 되었다. 허물어져 가는 집들 사이에 절이 들어섰다. 법당을 새로 지었고 빈집을 고쳐 요사채로 만들었다. 그러나 절도 조용하다. 살던 스님도 외로움에 지쳐 떠나버린 것일까.
외항마을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마을이 사라진 내력을 듣는다. 수포 사람들은 강제로 마을을 떠나야 했다. 섬 노인은 그 때가 납북어부 사건으로 한참 시끄러운 뒤끝이었다고 기억한다. 1977년 통영호 납북 사건이 있었고, 비진도 이웃섬, 부지도의 한 어부도 납북되었다. 부지도에 살던 어부는 장어통발 어선에서 일할 사람을 구하러 온 낯선 사람에게 선급금을 받고 따라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일련의 사건들 뒤 정부에서는 5가구 미만의 외딴섬과 섬마을들에 대한 소개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딴 지역 독립가옥 이주대책은 1960년대부터 있었고 <한산면지>에 따르면 한산면의 섬들은 1975년경에 이주가 시행됐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므로 노인은 1977년 이후라고 증언하지만 수포 사람들이 마을을 떠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아무튼 1970년대 후반이었을 것으로만 짐작된다.
"통영도 살러 가고, 요기 큰 부락으로도 살러 오고."
수포마을에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못했다. 최근에야 한 사람이 들어가 살았지만 그 또한 바로 떠났다. 절은 외항마을 살던 여자가 이혼한 뒤 비구니가 되어 돌아와 지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비구니 스님도 오래 살지 않고 절을 육지의 어느 스님한테 팔았다. 절을 산 스님 또한 상주하지 않는 듯하다. 소개령이 내려진 뒤 많은 섬들이 무인도가 됐다. 수포마을뿐만 아니라 그 때 섬에서 강제 이주당한 사람들은 다시 섬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이 떠난 뒤 섬들의 오래된 문화도 흔적 없이 사라져버렸다.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섬학교 제58강 통영 <비진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4월 1일(토)>
08:30 서울 출발(08시 2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8강 여는 모임
-통영 도착
-점심식사(중앙식당)
-통영항 출발
-비진도 도착
-비진도 산호길 트레킹(4km)
비진도외항-미인도전망대-선유봉-수포-비진도해변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와 매운탕)
-자유시간 및 취침(<해 노는 섬집>, 다인실)
<4월 2일(일)>
06: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섬밥상)
-해변 산책
-비진도항 출항
-통영 도착
-이순신공원 벚꽃길 산책
-점심식사(풍년식당)
-장보기. 자유시간
-서울 향발. 제58강 마무리모임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접이식 우산),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미지참시 승선할 수 없습니다).
▶이번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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