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이들에게 일은 먹고 살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사람들은 일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또 일을 통해 보람과 즐거움을 얻고 타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너무 오래, 많은 일을 하는 것도 힘들고, 너무 적게 일을 하는 것, 일자리가 없는 것도 괴롭다. 그래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법도 있고, 너무 오래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법도 있다.
오늘 소개하는 호주 국립대학 경제학과 훵 딘 교수 연구팀의 논문은 일과 건강, 특히 노동 시간의 건강 영향이 성별에 따라 어떻게 다른지를 다루고 있다. 연구는 전통적인 주당 최대 48시간 허용 기준이 오늘날에도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출발했다. 세계노동기구가 이 기준을 정한 것은 1930년이고, 현재도 많은 국가에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이 기준을 채택하고 있다. 당시는 (남성의) 전일제 유급노동과 (여성의) 가정 내 돌봄 노동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호주의 경우, 1947년에는 성인 여성들 중 1/5만이 고용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산업국가들처럼 그 비중이 2/3에 달한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는 활발해졌지만, 여전히 남성의 노동 시간이 여성보다 길다. OECD 18개국의 남녀 노동시간 차이는 주당 10시간에 이른다. 이는 대개 남성들이 자녀 양육이나 가사노동에 덜 참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 시간이 길기 때문에 가사노동에 참여하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어떠한가? 노동 시간이 짧으니 좋아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짧은 노동 시간은 노동시장 내에서 불리한 처지를 반영하는 지표라 할 수 있다. 장시간 근무는 대개 숙련직, 보수가 좋은 '좋은 일자리'와 관련이 있는 반면, 여성, 저숙련 노동자들은 대개 저임금, 노동 시간이 짧은 (파트타임) 일자리에 근무한다. 여성 노동자들은 돌봄과 가사노동이라는 제약을 안은 채로 노동시장에서 경쟁해야 한다. 연구진은 기존의 '유리 천장' 개념을 응용하여 이를 '시간 유리 천장'이라고 표현했다.
지난 2세기 동안 대부분의 산업 국가들에서 노동 시간은 꾸준히 감소해왔다. 하지만 최근 미국, 호주 등에서는 상황이 역전되고 있는데, 노동 시간의 양극화와 관련 있다. 예컨대 호주의 경우 1978년에 주당 50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가 전체의 13%였던 반면 2000년에는 그 비중이 19%로 늘었다. 반대로 불안정고용이나 적은 시간 일하는 노동자의 비율도 1978년 15%에서 2004년 29%로 늘어났다. 지나치게 길게 일하는 것도, 또 너무 적게 일하는 것도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일종의 역치(threshold)가 존재하는 셈이다. 연구진은 일자리 안과 바깥에 존재하는 불평등이 노동시간-건강 관계 역치에 성별 차이를 가져올 것이라고 가정하고 이를 입증하고자 했다.
연구는 호주 인구를 대표하는 서베이 자료(HILDA)를 이용하여 24~64세의 취업 남성 3828명, 여성 4062명을 2005년~2011년 동안 추적 관찰했다. 이 조사는 타당성이 입증된 설문도구(SF36)를 사용하여 매년 정신 건강 수준을 측정했고, 노동 시간과 임금도 자세하게 평가했다. 또한 정신건강과 노동 시간, 임금 수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3의 요인들을 고려하기 위해 가사노동/돌봄 시간, 가구 소득, 경제적 곤란 여부, 결혼 상태, 어린 자녀 여부, 배우자의 근로활동 여부, 유연성(근무 시간이나 휴식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정도), 휴식, 노동강도, 비표준적 근로 시간, 고용 형태, 직업, 경력, 흡연, 음주, 신체활동, 만성적 건강 상태, 주거 지역 등도 함께 조사했다. 통계 분석 과정에서는 연구가설의 반대 가능성, 즉 건강한 사람일수록 장시간 일할 수 있고 소득도 높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기 위해, 시차를 고려한 3단계 최소자승추정법을 적용했다.
기초 분석 결과, 남녀의 직업 경력은 비슷했다. 남성은 대체로 여성에 비해 노동 시간이 길고 임금 수준이 높으며 유연성은 높고 노동강도는 낮았다. 또한 소득 수준이 더 높고 불안정 고용의 가능성도 더 낮았다. 반면 여성은 돌봄과 가사노동에 더 많은 시간을 썼으며 재정적 곤란과 부정적 정신건강, 만성적 건강 문제를 보고하는 경우가 더 흔했다.
모든 변수들을 포함시켜 전체 표본을 분석한 결과, 노동 시간과 정신건강 사이에는 완만하고 볼록한 포물선 관계가 나타났다. 정신건강은 노동 시간이 늘어날수록 점점 좋아지다가 39시간이 넘어가면 악화되었다 (그림 1). 이는 주당 48시간이라는 현행 허용 기준보다 10시간이나 짧은 것이다. 연구진은 이를 다시 가사노동/돌봄 시간의 많고 적음에 따라 구분해서 재분석했다. 그러자 가사노동/돌봄 시간이 많은 경우 (주당 28시간 이상), 정신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하는 역치는 34.5시간으로 더욱 짧아졌다 (그림 2). 반면 가사노동/돌봄 부담이 적은 집단에서는 주당 노동 시간이 45.5시간이 될 때까지 정신건강 상태가 계속 좋아졌다 (그림 3). 이는 현재의 노동 시간 허용 기준은 평균적으로 노동자의 정신건강을 보호하기에 미흡하며, 특히나 가사노동/돌봄의 부담이 큰 이들에게는 터무니없이 높은 기준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성별로 구분하여 분석한 결과는 또 다른 문제를 보여준다. 남성의 경우 정신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는 지점이 46.7시간인데 비해, 여성은 34.1시간에 불과했다 (그림 4, 남성이 굵은 점선). 가사노동/돌봄 부담이 큰 경우라면, 여성은 31.3시간, 남성은 42.3시간에서 정신건강 악화가 시작되었다 (그림 5). 반면 가사노동/돌봄 부담이 적은 집단에서는 여성의 경우 40.6시간, 남성은 무려 49.6시간이 지나서야 악화가 시작되었다 (그림 6).
성별 분리 분석이 아니라 성별과 노동 시간의 상호작용을 고려한 모형도 주목할 만하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고 했을 때, 가사노동/돌봄의 부담이 적은 경우, 남성은 47.2시간, 여성은 44.7시간이 지나서야 정신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경우에는 악화의 기울기도 매우 완만하고 정신건강 수준의 남녀간 차이도 거의 없었다 (그림 7, 남자 굵은 점선). 이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현재의 노동시간 상한선 기준인 48시간이면 충분히 노동자 건강을 보호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통계적 가정이 현실에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하며, 노동 인구를 대표하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남성과 여성의 노동시장 조건이 동일하지도 않고, 또 가사노동/돌봄의 부담이 이렇게 작으면서 공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현재의 노동 시간 규제가 여성의 건강, 혹은 남녀를 불문하고 상당한 정도의 가사노동/돌봄을 수행하는 성인 노동자들의 건강을 보호하기에는 매우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이 연구 결과는 현재의 시스템 안에서 여성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음을 보여준다. 장시간 노동을 하며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벌고 정신 건강을 해치거나, 남성보다 적게 일하고 노동시장 성별 불평등에 빠져들거나!
이 연구가 시행된 호주와 달리, 한국의 노동 시간 최대 허용기준은 주당 52시간이다. 그나마 이것도 2016년에야 확립되었고, 여전히 세계 최장의 노동 시간을 자랑 중이다.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은 더욱 심란하다. 소위 '여성친화적' 일자리를 통해 노동시장의 영원한 2등 시민으로 남거나, 회사 일과 가사노동의 이중 부담으로 골병 든 슈퍼우먼이 되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한다. 행여나 '과도한' 노동시장 스펙을 쌓거나 결혼/출산 지연으로 이중 부담을 회피하려 했다가는 저출산 문제의 주범으로 몰려 범국가적 비난까지 받아야 한다.
여성 건강을 보호하기 여성만 선별적으로 노동 시간을 줄이는 것, 노동시장 불평등을 극복하기 위해 여성의 건강을 해치는 것. 앞으로도 영원히 이 두 가지 선택지만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반적인 노동 시간을 줄이는 것, 가사노동/돌봄의 역할을 남녀 모두의 것으로 인정하고 평등하게 부담을 나누며 사회적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전략은 이미 여러 나라에서 시도되고 있다. 가사노동/돌봄에 종사하는 이들의 '시간 유리 천장'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건강 불평등과 노동 불평등 사이의 굴레에서 여성들이 빠져나올 수 없다는 호주의 연구 결과를 한국 사회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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