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편적 지식 습득이 아닌 전인적 교양교육을 표방하며 지난 2015년 1월 개교한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지순협 대안대학)’이 지난해 말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지순협 대안대학을 이끌어온 심광현 지순협 운영위원장(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 지순협과 대안 대학과 관련된 글, 그리고 지순협 졸업생의 논문 1편을 보내왔다. 지순협의 의미와 대안대학의 미래에 관한 글을 3회에 걸쳐 싣는다.
3회는 지순협 졸업생 정명준 씨의 논문이다. 정명준 씨는 1998년생으로 2015년에 지순협 대안대학을 입학하여 2016년에 졸업했다. 만 19세의 젊은 학생이다. 향후 한국과 일본의 청년세대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일본 유학을 준비 중에 있다. 편집자
1. 연구취지 및 목표
세계곳곳에서 지배적인 질서들이 붕괴가 증언되고 기존 시스템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전세계적으로 청년문제가 전면화되고 있다. 기성적인 라이프코스의 붕괴에 좌절한 젊은 세대의 격렬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는 곳도 있고, 또 그들의 불만이 종교근본주의에 의한 테러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로 나타나고 있는 곳도 있다. 한창 화제를 모았던 <88만원세대>의 출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청년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지 벌써 10여년이 흐른 한국사회, 그리고 90년대 이후 니트나 프리터 등의 현상이 전면화되면서 한국보다도 먼저 청년문제에 관련한 논의들이 먼저 시작된 일본사회에서 역시 최근 십 수년간, 청년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단순히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성장통, 혹은 결국은 개인의 노력부족이라는 자기책임론을 떠나 취업난, 격차의 확대, 과열된 경쟁 등의 현상들을 지적하면서 사회구조적 문제로서 다루기 시작하는 논의들이 늘어났다.
그런데 최근 일본에서 등장한 ‘사토리세대(さとり世代)’라는 명명이나 한국에서 유행한 ‘헬조선(Hell-朝鮮)’담론이 보여주는 것은, 각박한 고도성장기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더 나아질 미래도 없으니 오히려 지금에 만족하며 달관해버린 사토리세대나, 밑도 끝도 없는 ‘노오력’의 허무함을 간파해버리고 절망해버린 헬조선의 ‘흙수저’들이다. 이들이 달관, 절망하는 것은, 아직도 어떤 달콤한 몽상에 젖어있어 부당함에 분노할 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문제의 시정 가능성을 도저히 긍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전가의 보도와 같은 해결책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공멸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 청년으로서 이 ‘혼돈과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야할 나는 지난 2년간 지순협 대안대학에서 공부하고 고민한 결과물로 제출할 본고를 통해 이러한 달관과 절망, 혹은 분노가 어떻게 구성되고 있는지를 다뤄보고자 한다.
2. 일본, 한국사회의 청년
고도성장기 일본은 ‘1억총중류’라는 말이 나돌 만큼 중류의식이 팽배했던 사회였다. 하지만 버블시기부터 점차 가시화되던 양극화 현상은 버블붕괴 이후 장기경기침체를 통과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고, 그 속에서 청년세대는 높은 실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가운데 사회적으로 대표적인 빈곤집단으로 지목되기도 하는 상황이다. 한편 최근의 통계를 보면 인구상으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와 경기회복에 힘입어 표면적인 일본사회의 취업률은 한국사회와 비교했을 때, 고졸, 대졸 모두 상대적으로 높은 취업률을 기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함정이 있는데, 아예 취직을 ‘포기’해버린 이들이 집계에서 제외되는 것 등의 통계상의 문제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이 불안정하고 가혹한 노동환경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이를 배경으로 떠오르고 있는 문제 중 하나가 정규직이 되기 어려운 청년들의 불안한 지위를 이용해 불법적인 장시간 노동, 잔업수당의 미지급, 폭언이나 구타 등을 일삼는 ‘블랙기업’, ‘블랙바이트’문제나 최근 일련의 과로사사건들로 드러난 장시간 노동관행이다. 또한 기존의 일본형 고용과 연공임금이 해체되면서 시작된‘취업빙하기’ 이후, 신규세대는 일정한 수준의 임금과 안정된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것이 어려워진 결과 정규직으로 장기간 일하는 것을 전제로 설계된 연금제도 같은 각종 사회보장영역으로부터 소외되었다.
한편 일본 이상으로 별다른 사회보장이 없었던 한국은,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고 최근에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그 유명한 <88만원세대>에서 우석훈과 박권일은 대학 시절 저조한 학점으로도 별 무리 없이 취직하던 시기는 끝났으며, 한국사회는 점점 “죽을 사람은 내버려두고 일단 살 사람이라도 살자”라는 ‘승자독식의 시대’로 변하고 있는 가운데 20대들의 사회데뷔는 긴 학창시절과 휴학, 기타 취업 준비, 해외 어학연수 등으로 지체되고 있다고 말한다. 안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녹지는 고도성장의 산물로서 기대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후 민주화, 민주노조운동의 성장을 거치면서 얻은 일정한 성과들도 임금인상이나 사내복지 같은 ‘기업복지’의 성격이 강했는데, IMF 경제위기 이후 정규직으로 취직하는 것이 어려워진 청년세대에게 한국사회는 20대에게 어떠한 보호장치도 주지 않았다. 그 이후 최근까지 각종 지표는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다.‘부모보다 더 가난한 첫 세대’는 만성화된 취업난 속에서 포기의 리스트를 점점 늘려만 가는 ‘N포세대’가 되어버렸다.
3. 달관과 절망 사이
그런데, 최근 전세계적으로 청년들이 취업난, 사회보장의 축소 등에 반발하며 들고 일어나고 있는 반면 한국, 일본사회에서는 정작 각종 청년문제에 관한 담론들은 청년세대의 뜨듯미지근한 반응, 심지어는 냉소적인 반박에 직면해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일본의 경우, 불황 이후의 사회만을 경험하고 있는 90년대 출생한 세대들을 칭하는 말로 부상한 것이 ‘사토리세대(さとり世代)’이다. 이는 금전적 성공이나 연애에 그다지 관심이 없고 해외여행이나 자가용구입 같은 큰 돈 드는 일을 하려 하지 않으며 무리한 노력이나 과격한 충돌을 피하는, 말 그대로 달관, 해탈한 듯한 청년들의 기질을 두고 만들어진 말이다.각종 분야의 염가브랜드를 애용하고 소소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이들은 일개미 같은 ‘회사인간’들이 넘쳐나던 고도성장기는 딱히 그리울 것이 없고,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도 없기에 눈앞의 현실에서 적당히 만족하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김홍중의 설명을 빌리자면, 생존경쟁이 개인을 압박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이것이 1회적으로 끝나는 경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근대사회의 개인들에게 있어서 경쟁은 결정적으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했던 반면, 오늘날의 생존주의 주체는 “삶의 거의 모든 영역 또는 생애 과정 전체에서 진행되고 있는 경쟁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 외부가 없는 생존경쟁 속의 한국청년들에게 달관은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일본의 사토리세대에게 지금을 긍정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포기다. 이들이 장래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일본사회의 기성적인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달관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면, 반대로 한국의 청년들은 쉼 없이 몰아닥치는 경쟁 속에서 당장 지금의 행복을 유예시켜야만 한다. 대신 그나마 이들에게 지금을 긍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사회가 요구하는 자기계발을 위해 크고 작은 행복과 당장의 즐거움들을 희생해가면서 열심히 ‘노오력’한 결과를, 공정하게 인정받을 수 있으라는 기대다.
간단하게 말하면, 양국사회 청년들의 일종의 냉소적 경향은 크게 두 가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첫째는 ‘어차피 별 수 없지 않느냐’라는, 사회적 해결가능성에 대한 단념이다. 이는 각각 나름의 ‘정권교체’를 통해 들어선 개혁성향 정권에 대한 실망 등 구체적인 사건에서 얻은 실망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둘째, 미래에 대한 체념으로 구성되는 달관을 통해서든 모두에게 주어지는 경쟁의 공정함에 대한 기대를 통해서든 현재를 정당화하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떠한 이유로 인해 이것이 불가능하게 될 때, 즉 현실이 견딜 수 없게 되었을 때, 사토리세대의 달관이나 경쟁주체들의 냉소는 절망이나 분노가 되어 어딘가를 통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미래를 포기한 사토리세대에게“그리 돈을 들이지 않아도 그 나름대로 즐거운 일상”의 붕괴는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일인 것이 사실이다. 한편 사회적 해결가능성에 대한 강한 회의는 견고한데 동시에 유일한 타개책으로 요구되던 무한한 ‘노오력’역시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한국청년들에게 한국사회는 저항의 대상이 아니라 혐오와 탈출의 대상인 지옥(‘헬조선’)이 되어버렸다. 이제 냉소의 자리를 절망이 대신한다.
4. 새로운 저항적 세대의 탄생?
물론 모든 청년들이 달관, 절망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국사회에서는 2008년 촛불집회에 참여한 청(소)년들을 ‘촛불세대’라고 부르면서 386세대의 뒤를 잇는 새로운 저항적 세대로서 ‘기대’를 거는 목소리가 있었고, 이와 비슷하게 최근 일본에서는 2011년 핵발전소 반대 집회, 그리고 2015년을 전후로 아베정권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한 헌법해석개정에 대한 반대운동을 중심으로 활동한 ‘SEALDs(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학생긴급운동)’를 통해 ‘6~70년대 전공투 이후 최초로’ 학생운동이 부활하고 많은 청년들이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에 대해서 비슷한 맥락의 기대가 일어나기도 했다.
먼저 2008년의 광장을 통해 ‘촛불세대’에 대한 기대가 떠오른 지 수년이 지난 후의 사례를 놓고 보자. 사실 진보적인 성향의 기성세대에게는 아직도 당시 촛불집회가 전국민적인 저항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아있는 부분이 큰 반면, 청년층에 있어서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른바 ‘보수화된 20대’와 구별되는 집단으로서의 ‘촛불세대’라는 분석은 당사자들의 갖은 반박에 부딪혀야 했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촛불세대라는 규정시도는 당시 전면화되었던 ‘촛불소녀’의 이미지 이후 계속해서 청소년들에게 좌절된 ‘기대’를 투영하는 잔재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들은 최근 백남기 농민 장례식장에서 자리를 지키던 청소년 녹색당의 활동가의 흡연을 두고 일어난 트러블처럼, 정작 ‘참여적 청소년들’이 기성세대가 기대하는 모습이 아닐 때에는 갈등이 일어날 소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새로운 저항적 세대집단을 발굴하려는 시도의 반복은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는 이렇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갈채를 받던 저항적 청소년세대가 청년이 되면서 정작 지극히 세속적인(?) 문제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는 발언의 장으로서의 광장에 회의를 느끼거나 냉소하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그런데 그렇다면 청년들은 왜 시위 같은 정치적 활동에 참여했던 것일까? 엄기호가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를 빌리자면, 어차피 정치가 자신의 삶을 바꿔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 청년들이 움직이는 것은 참여과정자체가 즐거운 놀이가 되거나 권위적인 정치인들이 ‘웃자고 하는 일에 목숨 걸고 달려들면서’ 자신들의 오락을 방해할 때이다. 한편 앞서 사토리세대 논의에서 참고했던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일본사회 청년들의 정치적 참여들을 놓고 내리는 분석 역시 엄기호의 분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에 의하면, 오늘날 그것이 좌파적이든 우파적이든 어떤 정치적 목적성을 띈 집회나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청년들에게 중요한 것은 내건 ‘목적성’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참여과정에서 느끼는 공동체에 대한 귀속감과 축제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들에게 정치적 목적성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실, 최근 일본사회에서 SEALDs(이하 실즈)가 주목받은 이유는 이들이 바로 이러한 혐의, 한마디로 ‘그냥 놀러나온거 아니냐’를 전적으로 부인하고 강력한 목적성을 어필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2000년대 들어 나타난 사회운동의 새로운 문화들, 예를 들어 DJ를 동원한 ‘사운드데모’ 같은 외형적인 특징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훨씬 대중적이고 ‘세련된 것’으로 만드려는 노력을 통해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그렇다고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소수가 벌인 운동이 단순히 세련되고 재미있는 방식 덕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니라, 분명히 구심점은 강력한 정치적 목적성을 띄는 구호(헌법문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청년세대 가운데서 지배적인 흐름인 것이라기보다는 이러한 목적성을 중요시하는 운동에 호응하는 특정한 청년집단이 출현한 것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작년 참의원 총선 당시 실즈는 ‘시민연합’의 한 축으로 참여하면서 개헌저지를 위한 전면적인 야권연대를 성사시켰지만 해당선거에서 최초로 투표권을 획득한 18, 19세 유권자들을 비롯한 젊은 세대는 헌법문제를 내세운 야권보다는 경기, 고용이슈를 전면에 내세운 여권에 지지를 보냈다. 결론적으로 실즈는 오랫동안 부재했던 ‘청년들의 정치참여’를 위한 새로운 창구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과연 호헌평화주의라는 기성적인 리버럴의 언어를 익히는 것이 실제로 청년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정치적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물론 우연적인 관심과 경험이야말로 구조의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계기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기성적인 정치적 의례들, 민주주의나 호헌평화주의의 가치를 ‘깨우치는 것’이라면, 이것이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5. 언제 청년들은 분노하는가
그렇다면 언제 청년들은 분노하고, 또 저항하는가? 일단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 것은 기성세대 시절의 그것과는 상이하거나 심지어 그에 전적으로 반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이다.한국의 386 세대·일본의 단카이세대와 같은 기성세대가 억압적 권력에 맞서 치열하게 추구한 형식적 민주주의, 호헌평화주의의 흐름은, 현재 청년들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을 방관했던 것이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기성세대에게 있어서는 강력한 울림을 갖는 단어들이었던 ‘민주주의’나 ‘반전-평화’ 같은 말들은 이들에게 있어서 어딘가 의심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한없이 기만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일본의 상황을 보자면, 재일 코리안이나 좌익을 상대로 강력한 혐오를 드러내면서 자신들의 불만을 어필하는 넷우익의 부상이 이미 수년 전부터 증언되었다. 한편으로 전통적인 좌우구분을 벗어나고 있는, 청년 프레카리아트운동들 역시 청년들의 분노가 기존체제뿐만 아니라 기성좌익 역시 겨누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가장 가까운 분노와 저항을 살펴보면서 본고의 논의를 마치고자 한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는 청년들이 대통령 퇴진,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100만여명 규모의 시위대가 군집한 11월 초 민중총궐기 집회 직전의 한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표본대상 20대 응답자 중 단 한 명도 박 대통령에 대한 긍정평가를 하지 않았고 촛불집회참가자 가운데 2030세대가 45%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은 왜 분노하고 있을까?
실제 시위현장, 그리고 이를 전하고 있는 언론보도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들을 들어보면, 분명 ‘공정함’의 문제가 있다. 이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은 최순실씨의 국정개입 의혹에 대한 박 대통령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 만큼이나(혹은 그 이상으로) 최 씨의 권세를 바탕으로 자녀 정유라 씨가 이화여대 입학-재학과정에서 각종 특혜를 누린 정황 때문이기도 하다.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망이 없다고 할 때 개개인이 살아남는 방법은 열심히 ‘노오력’하고 그 성과를 ‘공정하게’ 평가 받는 것 외에는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아직도 노력하면 한만큼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사회’여야만 했다. 하지만 헬조선 담론은 바로 그 점에서 그 ‘공정함’조차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간파한 것이었고, 거기서 ‘어쩔 수 없다, 원래 그런 것이고 개개인들이 알아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라는 냉소는 ‘답이 없다’라는 절망과 분노로 변했다.
분명 한편으로‘공정함’에 대한 분노는 그저 개개인들의 ‘노오력’을 인정받고자 하는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헬조선 담론이 보여주듯, 그동안 한국사회에 부재했던 것은 부당함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다만 절망과 체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분노는 약자라는 이름으로 경쟁에서 부당한 특혜를 받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로, 또 그저‘싸그리 공평하게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말 그대로 세상의‘리셋’을 원하는 절망적인 목소리로 터져 나왔다. 반대로 지금 시위를 벌이고 있는 청년들의 분노는 부당함에 대한 명백한 ‘사회적 책임’-“대통령 퇴진”-을 묻고자한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구별되는 지점이 있다. 대통령이 수차례의 담화를 통해 사실상 즉각 사퇴요구를 거부했음에도, 분노가 체념으로 잦아들기는커녕 시위대의 수효는 점점 늘어났다. 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이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며,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환멸만 남길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잠시나마, ‘어차피 안 바뀌잖아’라는 체념과 절망의 자리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강력한 의지들이 출현했다는 점만으로도, 이 사건은 달관과 절망이 지배하던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는 실마리일지도 모른다.
III. 결론
이상으로 일본, 한국사회 청년들의 달관과 절망이 어떻게 구성되고 있고, 또 이들은 언제 분노하는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청년들의 달관과 절망은 각성이나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수차례 강조했듯 이들의 냉소는 체제의 견고함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결과이고, 이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시위에 나설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일 수 있을 때이다. 그것은 목적성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축제로서의 시위’,‘게임으로서의 정치’에 참여할 때도 그렇지만, ‘어차피 안 바뀌잖아’라는 냉소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강력한 의지를 통해 분노할 때도 그렇다.
끝으로 최근 한국의 상황에 대해 조금만 더 쓰겠다. 최근 달관과 절망을 찢고 나온 목소리들은 단순히 이미 그 가치를 상실하고 의미불명의 것이 되어버린 ‘최소한의 정상성’이나, ‘상식’의 복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만약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애초에 왜 달관하고 절망하고 분노했겠는가. 지금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문제들을 보다 근본적으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기획의 출현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그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는 결코 ‘우선순위’에서 탈락시키거나 ‘나중’으로 미룰 수 없는, 나, 그리고 우리의 당면과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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