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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개혁, 이제 정교한 메스를 댈 때가 됐다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경제민주화 새판짜기 : 재벌 개혁

쓰레기통으로 던져지는 재벌 개혁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닥치면서 다시 재벌 개혁에 대한 정책적 논의가 고개를 들고 있다. 각 대선 캠프마다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수많은 재벌 개혁 정책을 쏟아 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수많은 정책이 실제로 제도로 정착한 경우는 많지 않고, 그것이 제대로 재벌 개혁을 이끌어 내지도 못했다. '소문난 잔치에 먹잘 것이 없는' 상황이 따로 없다.

재벌 개혁의 목표 또한 다양하고 또한 모호하다. 재벌 개혁을 하위 개념으로 포괄하는 경제민주화의 개념이나 지향점이 모호한 것과 유사하다. 한 쪽에서는 재벌 체제의 해체를 주장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회사법적 해결로 제법 충분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 글에서는 성장 정책과의 관련 하에서 재벌 개혁 정책을 살펴보기로 한다. 경제민주화나 정의나 형평이 아닌 성장을 재벌 정책과 연계 시키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국민들이 원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대다수는 "평등하게 가난하기"보다는 "내 지갑이 두둑해 지는 것"을 더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벌 개혁을 평등이나 정의로 치환할 때마다 보수 기득권층은 "그래서 다 같이 망하자는 얘기냐?"라는 말로 반론했고 이 반론은 대단히 유효한 억지력이었다. 따라서 성장과 재벌 개혁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전파하지 못한다면 재벌 개혁은 대선 때마다 단골 이슈가 될 뿐 실제로는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슬그머니 쓰레기통으로 던져지는 이슈가 될 뿐이다.

이하에서는 우선 우리나라의 성장정책의 최우선 과제는 유효한 노동투입을 증가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이 이런 노동을 중시하는 성장 정책(필자는 이를 '노동친화적 성장 정책'이라고 명명하였다.)의 핵심적 내용이라는 점을 밝힌다. 그 뒤에는 노동친화적 성장을 위한 재벌 개혁 과제 중 핵심적인 것 몇 개를 선정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그 필요성을 살펴보기로 한다.

자본 과잉 시대의 성장 정책

(1) 신고전파 성장모형과 노령화의 의미

경제학 원론에서도 배우는 가장 단순한 성장 모형을 되새겨 보자. 로버트 솔로우가 제창한 신고전파 성장 모형에서 경제 전체의 생산함수는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

Y = F(eL,K) = (eL)1-αKα (1)


여기서 Y: 총생산량, e: 노동의 효율성, L: 노동투입, K: 자본투입을 말한다.


이제 1인당 산출량(즉 생활수준)을 도출하기 위해 1차 동차의 가정 하에서 위 (1)식의 양변을 L로 나눈 후, y = Y/eL, k = K/eL이라 하면 y=kα으로 표시할 수 있다.


솔로우 성장모형에서는 장기적으로 k → k*, y → y* =(k*)α으로 수렴한다. 이 경우 경제의 총생산량은 Y* = eLy*로 수렴하게 된다.


이제 노령화의 의미를 살펴보기로 하자. 노령화란 총인구(N이라 하자)와 생산가능인구(L)의 분화를 의미한다. 경제활동참가율(p 라 하자)이란 총인구중 생산가능인구의 비율로 근사할 수 있으므로 p = L/N으로 표현할 수 있다. 참고로 통상적인 성장모형에서는 총인구는 모두 경제활동을 하는 것으로 단순화했기 때문에 p=1이 된다. 그런데 노령화 경제는 p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경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경제 내에서 노령 인구의 비중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이는 생산가능인구의 상대적 비중 감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p가 감소하면 1인당 국민소득이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노령화를 고려하지 않는 단순한 성장모형에서는 N=L 이므로

Y/N = Y/L = ey (2)

가 성립한다. 즉 총인구와 생산가능인구를 구별하지 않는 단순한 성장모형에서는 노령화는 1인당 국민소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노령화의 효과를 고려하는 성장모형의 결과는 다르다. 경제활동참가율을 명시적으로 고려하면 다음과 같이 된다.

Y/n = eLy/N = e(L/N)y = epy (3)


그런데 노령화 사회에서는 p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므로, y → y*로 수렴하는 장기 균형에 가까워지면 1인당 국민소득 epy*는 p의 감소 때문에 감소하게 됨을 알 수 있다. 즉 노령화 경제에서는 별도의 성장 대책이 없는 한, 1인당 국민소득 또는 생활 수준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것이다.

(2) 어떤 성장 정책이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노령화 시대에 부합하는 성장정책이란 어떤 것인가? 노동에 체화된 (embodied to labor) 생산성, 즉 e를 향상시키는 것이다. 이는 위 (3)식을 보면 자명하다. 유효 노동투입 한 단위당 생산량인 는 고정된 값으로 수렴하고, 노령화에 따라 p는 감소하기 때문에 유일한 탈출구는 e를 증가시키는 것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명심해야 하는 것은 무조건 외생적으로 자본 투입을 늘려봐야 그것이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이나 생활수준의 향상을 가져오지 못한다는 점이다. 일시적으로 자본을 늘리는 것은 k(=K/eL)의 일시적 증가를 초래하지만 장기적으로 k → k*로 다시 되돌아오기 때문에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결국 성장 정책의 핵심은 자본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e 또는 ep를 늘리는 것인데, 노령화 경제에서는 p가 지속적으로 감소하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e를 늘리는 노동친화적 성장 정책이 불가피한 것이다.

(3) 자본 과잉에 대한 깊은 문제 의식

현재 우리는 자본 과잉 상태에 직면해 있다. 우리 경제에 만연한 저금리, 저투자, 사내 잉여자금의 축적 증가는 모두 자본 과잉의 전형적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현재의 모습은 비효율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물 투자를 계속 장려하는 정책은 비효율적인 행위에 상을 주고, 귀중한 사회적 자원을 낭비한다는 점에서 하책 중의 하책이다. 즉 노령화 사회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실물투자=선(善)"이라는 과거 개발연대의 발전 경험을 버려야 성장이 가능한 것이다.

자본 과잉 상태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노동과 인적 자본 형성에 대한 투자를 장려해야 한다. 새가 한 쪽 날개로만 날 수 없듯이 국민경제의 생산 증가 역시 자본과 노동의 균형 잡힌 투입 증가를 통해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유효 노동의 투입이 증가하면 자본의 생산성도 호전되어 저절로 투자촉진의 유인이 발생한다. 즉 역설적으로 말해 투자를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동을 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령화에 의해 취업자 수의 증가가 정체/감소되는 상황에서 노동투입 증가를 이루는 유일한 방법은 취업자의 인적자본(human capital)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취업자의 learning by doing을 장려하고, 취업자가 보유한 인적 자본의 훼손을 방지하고, 인적 자본 투자에 필요한 시간적, 물적 토대를 공고히 하며, 자유와 창의를 존중하는 기업/사회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은 모두 성장 정책이다.

뿐만 아니라 노동친화적 성장정책은 자본축적에 대한 현재의 정책적 지원을 축소하고 이를 인적 자본의 축적 증가를 장려하는 쪽으로의 방향 전환을 수반한다. 물론 이런 정책은 당연히 자본 축적에 대한 지원을 받는 기득권층의 반대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자본 축적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거의 독식하다시피 한 재벌은 이런 정책 전환에 매우 강렬하게 저항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의 필요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정기훈

노동친화적 성장 정책과 재벌 개혁

(1) 노동친화적 성장 정책과 재벌 체제 간의 상충

노동친화적 성장은 대개 재벌체제와 상충된다. 인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자발적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에 대한 보상 증가가 필요하다. 투자의 기대수익이 커야 투자가 활발히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에 대한 보수를 상대적으로 증가시키는 정책에는 자본가들이 근본적으로 반대할 수밖에 없다. 특히 가장 전형적인 자본가 집단인 재벌은 더욱 그러하다. 바로 여기서 노동친화적 성장정책은 재벌체제와 기본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노동친화적 성장과 재벌체제 간의 3가지 접점

재벌 체제는 노동친화적 성장과 관련하여 3가지 접점에서 문제를 야기한다. 하나는 재벌 소속의 계열회사 내부에서 자본과 노동 간의 경제적 잉여의 배분이고, 다른 하나는 재벌 소속 계열회사와 그 생산 구조에 편입되어 있는 하부 협력업체 간의 경제적 잉여의 배분이고, 마지막은 재벌과 재벌 체제 밖의 회사들 (예를 들어 벤처 회사나 기타 재벌과 경쟁관계인 중소기업들) 간의 경제적 잉여의 배분 측면이다.

먼저 계열회사 내부에서의 경제적 잉여의 배분 문제를 보면 노동친화적 성장 정책은 주어진 경제적 잉여 중 보다 많은 부분을 노동의 생산성을 높이고 인적자본의 축적을 촉진하는 데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구체적으로 이는 사내 유보를 줄이고 노동소득분배율을 제고하는 정책전환을 요구하는데 이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재벌 개혁이 불가피하다.

다음으로 재벌과 협력업체 간의 관계에서는 협력업체에 대한 과도한 쥐어짜기를 막아야 협력업체 종사자의 인적자본 축적 여건이 개선될 수 있다. 현재와 같은 분업구조 하에서는 협력업체 차원에서의 독립적인 투자나 자본 축적은 불가능하다. 최종 생산물을 만드는 주력 계열사와 수많은 하청업체 간에 동반성장이나 낙수효과는 완전히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불황 시에는 고통 분담을 강요하고, 호황 시에는 이윤을 사실상 재벌 기업이 독식하는 현재의 구조를 시정해야 협력업체 차원에서의 공정 개선, 연구개발이나 인적자본 축적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노동친화적 성장 정책은 재벌이 군림하는 기업 생태계와 상충된다. 인적 자본이 생산 설비보다 더욱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대표적 산업인 벤처 산업의 경우를 살펴보자. 벤처 산업은 대기업이 조업하고 있는 장치 산업과는 달리 인적 자본의 창의성에 따라 대체로 그 성패가 좌우된다. 즉 벤처 산업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인적 자본이 벤처 기업으로 유입, 정착해야 하고, 벤처 기업의 생산물이 불공정 경쟁의 방해를 받지 않은 채 품질 우위를 통해 판로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재벌 체제에서는 이런 생태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재벌이 우수한 인적 자본을 거의 독점하고, 생산물 시장에서의 각종 불공정 행위와 다른 계열회사의 부당 내부 지원을 통해 가능성이 있는 벤처 기업의 성장 잠재력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 개혁 과제

이하에서는 재벌 개혁과 관련하여 주요한 정책 과제를 최소한으로 압축하여 논의한다. 재벌 개혁 과제를 압축하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으로 볼 때, 여러 과제를 나열하는 것은 정책 추진 동력의 측면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1) 국민연금의 재벌 주력 계열사 주식투자한도 철폐

기존 재벌 정책의 근본적 문제점은 총수의 소유권을 인정한 채 경제력 집중 문제로 재벌 개혁 과제를 접근한다는 점이다. 논리적으로는 경제력 집중을 해결하려면 기업 결합을 해체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럴 정치력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물론 총수의 부족한 소유권에 대한 외부 세력의 교정 시도 역시 어설픈 애국심 마케팅 탓에 번번이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런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해법은 국민연금의 재벌 주력 계열회사 지분 보유를 확대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현재 10%인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한도를 일부 거대 재벌의 주력 계열사에 대해서는 상향(예를 들어 20%)시키는 것이다. 이 방법의 장점은 아무런 법 개정이 필요 없고, 돈도 충분하다는 점이다. 재벌의 주력 계열사는 거의 대부분 국민 경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국민 연금의 투자 확대 논거는 충분하다. 현재의 재벌 총수는 "유능한 경영자" 임을 입증하는 한도 내에서 경영권 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부여하면 된다. 이 경우 다양한 기업 지배구조 개혁은 국민연금이 경영권을 획득했기 때문에 매우 수월하게 추진할 수 있다.

(2) 범죄 수익에 대한 민사적 환수제 도입

재벌 총수가 범죄 수익을 추구하는 이유는 개인적 치부 목적과 계열사 지배권 확대 목적 두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국민연금의 투자가 확대될 경우 후자는 통제 가능하다. 그러나 개인적 치부 목적의 범죄 수익 추구는 별도 규율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형사 처벌과 병행하여 범죄 수익에 대한 민사적 환수제(civil forfeiture)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민사적 환수제란 범죄(연루) 수익의 보유자로부터 당해 수익을 국가가 환수하는 것이다. 이 소송은 국가가 당사자가 되는 민사 소송이므로 형사 처벌과 중복하여 제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입증 책임의 강도 측면에서도 합리적 의심의 정도를 초월(beyond reasonable doubt)할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상당한 개연성(by preponderance 혹은 more likely than not) 정도의 입증만 있으면 된다.

영미와 EU는 이미 2000년을 전후하여 관련 법제를 정비하여 이 제도를 운영 중이다. 참고로 우리 정부가 미국 소재 전두환 재산을 회수하는 수단도 미 법무부가 민사적 환수 소송을 제기해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 초 이학수법과 최근의 최순실법을 통해 부분적으로 이 제도를 도입하려고 했던 시도가 있었다.

(3) 노동이사제 도입

노동이사제란 노동자가 추천한 사람을 주총에서 이사로 선임하는 제도이다. 노동이사는 경영자에 대한 감시 역할을 담당하고, 특히 회사의 중요 재무적 성과를 노동자와 공유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회사의 재무적 성과를 정확히 파악해야 비로소 회사와 노동자 간에 대등한 교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노동이사제는 미국식 사외이사 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상황에 대한 유일한 실질적 대안이다.

(4) 초과이윤공유제 도입을 통한 강제적 낙수 효과

하청업체와의 협력 관계를 정렬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의 초과이윤을 협력업체와 나누는 초과이윤 공유제가 필요하다. 구체적으로 당기순이익이 양수인 경우 그 일정 부분을 제1차 협력업체들에게 구매액에 비례하여 배분하고 제1차 협력업체는 다시 그 배당받은 이익을 하청기업 의존도에 따라 다시 제2차 하청기업에 의무적 배분하도록 하여 낙수효과가 연쇄적으로 발생하도록 강제할 필요가 있다. 이 때 하청기업 의존도는 대략

하청기업 의존도 = 하위 하청기업으로부터의 구매액 / 상위 기업에 대한 납품액 (4)


로 표시할 수 있다.

의무 배분은 더 이상 하청기업이 없을 때까지 아래로 계속된다. 의무 배분 거부 기업은 상부로부터의 수령액(최상위 기업 경우에는 의무배분대상액)을 국가가 법인세로 환수한 후, 거부 기업과 거래한 하부의 하청기업에 각 하청기업의 구매액 비율에 비례하여 배분해 주면 된다.

실행 전략을 다듬을 때

이제까지 많은 재벌 개혁 논의가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실효성과 전격성의 측면에서 그 구체적 실행 전략을 정밀하게 다듬을 때가 되었다. 최초의 시발점은 국민연금을 통한 소유권 인수이다. 그 후 노동이사제, 지배구조 개혁, 초과이윤 공유제 등을 순차적으로 기업의 자발적 결의를 통해 시행하면 된다. 범죄수익 환수제는 별도 입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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