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충남지사의 돌풍이 거세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김부겸 의원에 이어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까지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후, 부동(浮動)하던 유권자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데 성공하고 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가 중심이 된 보수 표심까지 흔들릴 정도로 위세가 대단하다. 그러다 보니, 안철수 의원이나 이재명 성남시장의 지지율은 정체 또는 하향세이다. 문재인 전 대표가 확장성의 한계를 보인 것과 달리 안 지사는 이른바 보수·중도층까지 지지세를 넓히고 있다. '대연정'이나 '공짜밥' 발언으로 그의 가치와 철학에 대한 의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안 지사 본인은 오히려 담담하다. 아니, 당당하다. 그는 스스로를 '직업 정치인', '철저한 의회주의자',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주의자'로 규정한다. 정당과 의회 중심의 사고가 확고하고, '주권자'로서 국민에 대한 신념도 확실하다. 그런데 그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는 비판을 자주 듣는다. 말이 어렵고 좋은 말인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지적도 많다.
정책이 구체적이지 않거나, 덜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일 수 있다. 안희정 지사는 '지도자론'이나 '민주주의론'에 대해 자주 설파하지만, 정책과 공약에 대해선 자세히 말하지 않는다. 최근 젊은 CEO와 만난 자리에서 "대선 후보가 갑자기 수백 가지 정책을 몇 달 내에 쏟아내는 것이 대단히 위험해 보인다. 2017년 대선 공약은 민주당에서 만들길 촉구한다"고 말했다. 정당의 조직적 활동에 기반해 대선 공약집을 만드는 게 옳다는 것이다. 당연히 집권은 후보 개인이나 캠프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발언은 캠프가 정책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들려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대통령이 된다면 어떻게 국가를 운영할지에 대해 가장 구체적으로 얘기하는 후보"라고 규정한다. 안 지사는 '대연정'까지 포함하는 정당과 의회, 내각 중심의 국정운영 원칙을 일관되게 강조한다. 그만큼 '지도자론'과 '민주주의론'을 강조하는 대선 후보도 없다.
안 지사의 언술은 왜 추상적이거나 모호하다는 지적을 들을까? 그것은 '정책'의 부족이 아니라, '주체'의 부재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언술에서는 능동적인 정치 주체, 즉 '시민'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가 내세우는 '시대교체'와 맞물려 살펴볼 때 더욱 그렇다. 안 지사가 강조하는 '주권자'를 '새로운 시대'의 정치 주체라 부르기는 곤란하다. 그의 연설이나 토론에서 '시민'은 잘 언급되지 않는다. '도민'이나 '주민'이라는 말이 입에 익었고, '시민'은 충남 도지사에게 잘 맞지 않는 단어로 여겨졌던 탓도 있다고 한다. 그의 말이나 글에서 '제왕적 대통령'을 대신하는 지도자와 의회·정당은 구체적 형상과 역할을 가진 존재로 등장하지만, 거기까지다. 그가 늘 강조하는 '주권자로서의 국민'은 헌법이 규정하는 권리와 의무를 갖지만, 그것까지다. 촛불 시민에게 헌법은 마땅히 지켜야 하는 최고 규범이지만, 그들은 헌법이 전부라는 인식도 넘어섰다. 헌법은 얼마든지 개정될 수 있다. 촛불 시민들은 '대연정'이나 '의회와의 협치'와 같은 '정치의 방법'이 아니라, '누구'와 '무엇'을 위한 민주주의인가라는 '정치의 내용'을 묻고 있다. 이러한 엇갈림이 안 지사의 '멋진 연설'이 허전하고 모호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시민'은 비단 안희정 지사만이 아니라, 다른 정치인들에게도 여전히 낯설고 어색한 정치적 주체다. 사회학자 송호근은 그의 책 <촛불의 시간 : 군주·국가의 시간에서 시민의 시간으로>(북극성 펴냄)에서 2012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에피소드를 전한다. 그가 "국민이란 말 대신 '시민'이란 말을 쓰세요"라고 했더니, 박 후보는 "그것은 전주 시민, 대구 시민 아니에요?"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송호근은 "시민에 대한 역사적 개념이 결여된 것이며, 이 정권은 민주주의의 기반인 시민을 국민으로만 간주했다는 데서 쓰라린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지적했다.(166쪽) '시민운동'의 가장 선두와 중심에 섰던 박원순 서울시장조차 대선 출마를 준비하던 동안 '시민권력' 대신 '국민권력'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자칫 '서울'과 '도시'라는 이미지에 갇힐 것을 걱정한 주변 조언을 따랐다고 한다. 문재인 전 대표나 이재명 성남시장 역시 정치적 주체로서의 '시민'을 호명하는 것에 대해선 적극적이지 않다.
'시민'에 대해 정치인들만 어색하고 인색한 것은 아니다. 1000만 명이 넘는 촛불이 광장을 가득 메웠지만, 주말 광장이 아닌 시·공간에서 그 불빛과 소리를 확인하기란 어렵다. 이를 극복해 보고자 온라인 시민의회를 만들려던 시도가 지난해 12월에 있었다. 정치 스타트업 단체인 '와글(WAGL)'은 광장과 국회의 공간적 경계와 주말 저녁이라는 시간적 제약을 넘어 서는 온라인 플랫폼, 그리고 추천을 통한 시민대표 선출을 제안했다. 그러자마자 "촛불민심을 또 하나의 시민단체로 보는 것"으로 비판받았고, "국회가 있는데 시민의회가 왜 필요한가", "누구 마음대로 국민대표인가"라며 비난받았다. 시작한 지 채 일주일도 안 되어 '와글'은 프로젝트 중단을 선언했다. 새로운 방식의 정치적 연결 시도는 허무하게 끝났다. 그 후 촛불 시민들은 독자적인 '시민 정치' 실험보다는 탄핵과 대선, 선거제도개혁과 개헌 정도에 집중하는 양상이다. '선거연령 18세 인하' 등 일부 이슈를 제외하고 시민단체 주도의 정치개혁운동도 활발한 것은 아니다. 촛불 시민은 광장을 가득 메우지만 '시민 정치'라는 독자적인 흐름은 약하다.
이런 와중에 박원순 서울시장의 근황에 대한 보도가 있었다. 불출마를 선언하고 '초심으로', '시민 속으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했던 그가 시정(市政)에 복귀하면서 달라졌다는 것이다. 공무원 조직을 다독이고 관료 조직과의 '믿음'을 내보이며 동반자적 관계를 강조했다고 한다. 박 시장 측 핵심 관계자는 "시정 성공 여부도 결국 공무원에게 달렸기에 공무원들에게 힘을 더 실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사무관급 공무원은 '시민사회 출신 시장'과 '관료사회'를 대비시키며 "박 시장의 변화된 모습" 운운한다. 뜬금없다. 마무리해야 하는 '박원순 표 사업'이 '서울역 7017 프로젝트', '마포 석유비축기지 공원', '우이-신설 경전철' 등만 있다면 관료의 역할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시장의 '믿음'이나 '변화'와는 상관없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징계를 받는, 당연히 수행해야 할 업무이다. 공무원들이 협조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내걸었던 '혁신'과 '협치'에 대한 종합적이고 냉정한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다. 정치 주체로서 '시민'의 역량과 역할에 대해 이만큼의 사례는 아직 없기 때문이다. '적폐청산과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역사적 책무를 수행해야 할 차기 정부로서는 서울시의 성과와 한계만큼 중요한 학습대상이 있을 수 없다. 박 시장의 불출마와 시정복귀가 이번 대선에서 '시민 정치' 실종의 계기가 아니라, 부활의 기회가 되어야 하는 이유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박원순 캠프에 있었던 사람들이 속속 문재인 캠프로 합류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희정 지사는 아예 박원순 시장을 만나 '시민'에 대해 충분히 얘기 나누면 좋겠다. 안 지사의 지도자론과 민주주의론이 더 큰 울림과 공감을 얻기 위해선 '정책'의 구체성이 아니라, '주체'에 대한 분명한 관점과 단단한 인식을 더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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