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하는 자
우리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
우리는 그곳에 가본 적이 있다
우리는 가지 않고 간다
미지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미지는
모든 불가능성을 획득한다
우리는 미지에서 한때
바다의 목소리를 찾는 모험을 꿈꾸고
우리는 미지에서
서남쪽 섬으로 항해하라, 은빛 돛을 펼치고
우리는 미지에서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뱃노래를 부르지
미지에 포함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삶과 죽음의 신비를 어리석게 깨닫고
바다는 미지의 영역이다 섬은 미지의 영역이다 평화는 미지의 영역이다
인간이 함부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구역
그것이 미지다
바다는 얼마나 더 넓어질 수 있을까
섬은 어딘가를 더 떠돌 수 있을까
평화는 어디까지 더 평화로워질 수 있을까
인간은 언제쯤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우리는 미지를 향해
현명하게
아직 알지 못하는 자들
너희,
생명을 개발하고
자연을 신설하고
평화를 경영하는
똑똑하게
이미 다 아는 자들이여
영혼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죽도록 죽이지 말자 하는 것은
너희가 죽도록 죽이자고 하는 것은
바다가 아니다 섬이 아니다
생물과 무생물이 아니다
평화가
아니다
인간이 처음 생겨난 모든
공간이다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저 먼
모든 시간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선언한다
미지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영원히
회귀한다
과거인 현재에서
현재인 현재에서
미래인 현재에서
아름답게 추한 항구를
평화를 위한 폭력을
현명하지 못한 현명을
기지의 미지를
우리는
돌이킨다미지의 천사가 속삭이길, 네 너희에게 망각을 불어넣으니 너희의 두 발은 진실을 따라가게 되리라.
시작노트
한 시사 잡지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304낭독회’ 일꾼 자격이었습니다. 304낭독회는 세월호에서 돌아오지 못한 304명을 기억하기 위해 작가와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낭독회입니다. 인터뷰 도중에 304낭독회의 의의라고 할까요, 의지라고 할까요, 뭐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던 와중에 한 선배에게서 전해들은 말을 옮겼습니다. 제 자신도 의심하지 않고 안으로 받아들인 말이니 전해들은 말이라기보다는 제 말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얼마 전 한 선배와 제주 강정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모두 떠난 마을엔 활동가 몇몇이 남았을 뿐이다. 투쟁에서 승리하든 아니든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려버린다. 망각이 빠르다."
투쟁의 승패에 상관없이 너무 빨리 잊지 말자는 취지의 말이었는데…얼마 뒤, 혼났습니다.
강정에서 지금도 여전히 평화운동을 하는 활동가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홍대 '두리반'에서 자주 보았던 이였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이였고 '두리반'에 갈 때마다 종종 안부가 궁금하기도 했던 이였습니다. 그의 말인즉. 누구한테서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여기' 강정에서는 많은 사람이 남아 평화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검색창에 강정이라는 단어만 입력해 봐도 알 수 있다는 말이었지요.'거기'에 있는 당신들의 말 하나하나가 너무 큰 상처가 된다고 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할 수 있는 말이란 그 말밖에 없었습니다. 네, 저도 잊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강정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강정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검색 한번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망각이 빠르다'라는 말이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말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잡지는 이미 출간된 뒤였고, 저로서 바로잡을 방법은 SNS를 이용해 잘못된 발언을 정정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시를 읽고 이야기하는 자리가 생기면 어디서든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강정에서는 여전히 평화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승리한 투쟁을 더 쉽게 기억하기 마련이지만 실패했거나 실패했다고 믿어버리는 투쟁을 기억하고 다시 살펴야겠다고, 지금도 누군가는 여전히 그 투쟁의 영향 속이 아니라 투쟁의 현장에 살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검색했습니다. 강정에 다녀왔습니다. 멀리서 평화활동가가 아이들과 하천을 교실 삼아 수업하는 모습을 엿보았으며, 마을의 한 공방에서 따뜻한 차 한 잔을 얻어 마시며 공간지기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밝고 신나는 강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네, 그러니까 알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남아 그곳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을요. 네. 저 혼자 발을 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호되게 깨지고 배우고 난 뒤에야 저는 비로소 사건 이후의 문학에 관하여 쓸 말이, 작가로서 반성해야 할 말이 한마디 생각났습니다.
'문학의 언어는 가장 늦게 쓰이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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