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백두대간학교(교장 이철승, 백두대간전문가)의 백두대간 종주 6구간은 <백두대간 백운산권역 고남산 구간>입니다. 백두대간학교는 지난 9월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으며, 참가자 전원이 2016년 9월 <천왕봉 구간>, 10월 <벽소령 구간>, 11월 <금산 구간>, 12월 <만복대 구간>, 2017년 1월 <지리산권역 수정봉 구간>을 완주했습니다.
백두대간학교 제66강 2017년 2월 산행은 백두대간 종주 그 여섯 번째 산행으로, 산행일은 2월 18일(토), 산행지는 <백두대간 백운산권역 고남산 구간>입니다.
백두대간 종주 2월 산행은 지리산 권역을 벗어나 백운산권역으로 그 첫발을 내디딥니다. 이번 구간은 운봉고원에 우뚝 솟아 있는 고남산을 오릅니다. 고남산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고, 고려와 조선시대 왜적으로부터 곡창지역 전라도를 방어하던 중요한 보루이자 동한동농민전쟁의 견적지입니다. 고남산에 올라서면 동쪽의 운봉고원과 서쪽의 남원 시내는 물론 지리산의 서부능선과 널리 덕유산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삭풍의 계절 시린 바람 맞으며 꼿꼿하게 서있는 소나무와 함께 눈길 밟으며 조릿대가 전하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찾아 고남산으로 들어갑니다.
[구간소개]
-산행월일 : 2017년 2월 18일(토)
-산행출발 : 2017년 2월 18일(토) 오전 6시
-산행코스 : 여원재-고남산-매요마을-유치재
-산행거리 : 약 11km(도상거리)
-소요시간 : 약 6시간
-난 이 도 : 하상(★)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월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어머니의 산 지리산권역을 지난 백두대간은 여원재에서 백운산권역으로 접어듭니다. 백원산권역은 고남산을 거쳐 유치재-사치재(88고속도로)-시리봉-복성이재-봉화산-중치-백운산-영취산-덕운봉-민령-깃대봉을 지나 덕유산을 목전에 둔 육십령까지의 구간입니다. 행정구역상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이백면, 산동면, 아영면과 장수군 장수읍, 번암면, 계남면 그리고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서하면, 서상면을 지나며, 경상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가르며 백두대간 마루금을 이어갑니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백운산권역은 그 지형적 영향으로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필두로 수많은 전장의 격전지입니다. 이러한 지형적 영향으로 백운산권역에는 수많은 성터와 봉수대가 곳곳에 남겨져 있습니다. 여원재, 합민성, 황산대첩비각, 아막성터, 봉화산 봉수대 등 전란의 흔적들이 유적으로 전해 오며, 근세 동학농민전쟁의 슬픈 민초들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적으로도 유서 깊은 곳입니다. 판소리 동편제가 시작된 곳이며 연흥부, 연놀부의 박씨 이야기가 전해오는 흥부마을 발복지가 있으며 조일전쟁 때 진주남강에 왜장과 함께 몸을 던진 주논개의 고향과 사당이 있습니다.
또한 지리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백운산권역 영취산에서 13정맥 중 3정맥이 분기(分岐)합니다. 금남호남정맥과 금남정맥, 호남정맥이 그 맥을 이어갑니다. 금강과 섬진강의 수계를 가르며 드넓은 호남평야에 수자원을 공급하는 중요한 강의 발원지가 위치한 곳입니다.
산행의 시작은 운송대장군이 지키고 있는 여원재를 가로지르는 24번 국도에서 소나무숲으로 들어갑니다. 빽빽한 소나무 숲길은 밭두렁을 이어져 있으며 우측의 장동마을을 지나며 다시 소나무가 반겨줍니다. 겨울 한낮 햇살 가득한 소나무 숲속은 걷기에 안성맞춤입니다. 은은한 솔향기와 가끔 바람이 날려주는 눈발이 어우러져 향긋하기까지 합니다. 개운하고 명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간 마루금은 561.8봉을 지나며 장치를 향하여 북쪽으로 나침판이 화살표를 움직입니다. 송전 철탑을 지나기 전 갈림길에 주의하고 약간 계단길을 올라서면 합민성(合民城) 갈림길입니다. 대간 마루금에서 약간 서쪽으로 벗어나있는 합민성을 둘러보고 갑니다. 시골집의 돌담처럼 쌓여져 있는 성터는 여기저기 무너져 하얀 눈을 이고 말없이 누워있습니다. 수많은 격전의 현장을 지켜본 역사의 굴곡을 간직한 합민성은 삭풍에 하얀 눈가루로 옛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시 마루금으로 올라섭니다. 서쪽 아래로 88고속도로가 나란히 이어집니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와 나란히 걷습니다. 동쪽 아래 권포리 마을이 소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입니다. 너른 안부에서 눈길 함께 걷는 도반들과 옹기종기 모여 낮아 점심식사를 나눕니다. 따뜻한 정을 함께합니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고남산으로 향합니다. 숲은 천천히 고도를 높입니다. 언 눈길 위로 아이젠을 신고 한발한발 고도를 높입니다. 바위 구릉이 나타나고 줄이 메어져 있습니다. 메어진 줄을 잡고 조심조심 암릉구간을 통과합니다. 가파른 철계단 조심스레 올라서면 곧 고남산 정상입니다.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곳이 바로 고남산 정상입니다.
고남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아주 훌륭합니다. 만복대-고리봉-부운치-바래봉-덕두산으로 이어진 지리산 서부능선과 지리산의 주능선이 병풍처럼 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습니다. 북동쪽으로 이어진 백두대간은 봉화산, 백운산, 덕유산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맑고 가시거리가 좋을 때에는 서편으로 정읍 내장산과 광주의 무등산이 아스라이 펼쳐집니다. 정상 아래 너른 공터엔 큼지막한 표지석이 지리산을 배경으로 덩그러니 놓여있습니다.
헬리포트와 통신부대를 지나 임도를 따라 내려오던 마루금은 다시 숲으로 들어서며 통안재를 지납니다. 통안재 고목나무에서 또다시 임도를 벗어나 우측 숲으로 들어섭니다. 좌측 임도는 권포리 마을로 이어져 있습니다. 하얀 솜사탕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습니다. 하얀 눈이 만들어낸 작은 솜사탕들입니다. 햇살이 들지 않는 응달에만 솜사탕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낮은 구릉으로 숲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엄연히 비를 가르는 분수계(分水界)입니다. 백두대간 마루금입니다. 숲을 벗어나며 눈에 쌓인 밭들이 보입니다. 녹아내린 눈 사이로 누우런 황토빛이 또렷합니다. 밭두렁을 따라 걷다보면 매요마을입니다. 대간길은 마을 뒷산으로 이어져 있으나 사유지인 관계로 마을을 통과합니다. 마을회관을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대단꾼들의 쉼터 매요휴게소입니다. 휴게소 앞 나무에는 수많은 표식들이 바람에 팔랑거리고 있습니다.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대간 트레커들의 흔적입니다. 할머니가 따라 주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을 빼놓을 수는 없지요. 벌컥벌컥 한 잔 들이켜고 너털웃음으로 안주를 대신합니다.
마을 담장과 함께 걷습니다.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곧 유치재입니다. 743번 지방도로와 만나는 유치재에서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내려섭니다. 백운산권역 첫 구간 고남산과 작별합니다.
시린 겨울바람 사이 간간이 따스함이 피부에 와 닿습니다. 아직 이르지만 남녘에는 봄이 슬그머니 발을 담그려고 합니다. 2월 백두대간학교 고남산 구간, 슬그머니 발을 담그는 봄과 함께 백두대간을 걸어봅니다. 마음 나누는 도반들과 함께 웃음 실어봅니다.
[산행계획]
여유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여러 전문가이드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 그리고 중간에서 함께 하며 평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2월 18일(토) 오전 6시
06:00 덕수궁 대한문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역 2번출구)
06:30 사당역 공영주차장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출구)
06: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출구)
06:5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승차장
07:05 경부고속도로 신갈(하행)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10:10 여원재 도착/산행 준비 & 스트레칭
10:30 여원재 출발 – 산행 시작
11:10 561.8봉
11:30 합민성 갈림길
12:00 안부 – 점심식사
13:30 고남산
14:00 통안재
14:40 옛고개
15:50 매요마을 휴게소
16:10 유치재 도착 - 산행 마감/스트레칭
버스 이동. 운봉허브흑돼지전문점 – 지리산 허브흑돼지 삼겹살로 뒤풀이
17:30 운봉 출발
20:3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시간 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재킷,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버프, 아이젠, 스패츠, 도시락 2개(아침-행동식, 점심) 등
▶백두대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2017년 3월 백두대간 종주 7구간 산행 안내]
-산 행 지 : 백두대간 백운산권역 봉화산 구간
-산행일시 : 2017년 3월 18(토) - 무박 산행
-출발일시 : 2017년 3월 17일(토) 오후 11시
-산행코스 : 유치재-사치재-시리봉-복성이재-매봉-봉화산-송리마을
-산행거리 : 약 16km
-소요시간 : 약 9시간
-난 이 도 : 중상(★☆)
*상기 일정은 현지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산행자료]
[여원재] 477m. 남원시 운봉과 이백면을 잇는 고개로 일명 ‘연재’라고도 한다. 고개 서편으로 평원을 이룬 구릉이 운봉면이다. 섬진강 상류가 되고 섬진지류는 남원 시가지를 거처 광양만으로 빠진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황산대첩 시 여원치에서 이성계 장군이 행군 도중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전승(戰勝)의 날짜와 전략을 계시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왜장 아지발도가 자신을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자 칼로 가슴을 베어 자결한 원신(怨神)이었다. 후에 이성계는 이 노파를 산신령이라 여기고 이를 기리기 위해 벽에 여상(女像)을 새기고 산신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지리산 산신령은 여자로 알려져 있고, 이러한 산신령이 사는 곳을 여원(女院)이라 불렀으며, 이곳을 여원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여원치 고개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 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은 진주와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동학군을 대파했고,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해 그 기세를 몰아 남원 동학군을 물리쳤다. 한편 조선 말 동학민중혁명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또한 운봉이다. 남원을 지나 운봉으로 남상하던 동학군들이 고남산 서쪽 기슭 가말재(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는 까막재로 표기)에 진지를 구축한, 민관이 힘을 합한 토포군에게 참패를 한다. 운봉읍 장교리의 합민성(合民城)은 이 때 쌀을 저장해 두었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도 불렸다.
[비전마을] 비전마을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209번지에 위치해 있다. 비전마을은 본래 운봉의 서면 전촌리(前村里)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전촌리(前村里), 옥계리(玉溪里), 소석리(小石里) 일부가 병합되어 화수리(花水里)에 편입되었다. 자연마을로는 군화동(軍花洞)이 있다.
비전마을은 마을 앞에 비각(碑刻), 즉 황산대첩비각(荒山大捷碑閣)이 있어서 비전(碑前)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전마을은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이바지한 곳이다. 황산대첩비는 왜구를 황산벌에서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다. 이성계는 황산대첩 다음해 이 마을을 다시 찾아 손수, 1년 전 황산의 왜구들을 물리치고자 전의를 불태운 이곳 자연암석에 당시 참가했던 장수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황산대첩비각은 고려 우왕 6년(1380년),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선조 10년(1577년) 운봉현감 박광옥이 세웠다. 이 대첩비는 일제강점기 일본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존의 비각과 비석은 8·15광복 후 1957년 10월 27일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운봉 현감은 이 대첩비각을 세운 후, 참봉과 몇 사람의 관원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는데, 이에 그 식솔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서편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첩비각을 지날 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이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비 앞에서 절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구한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 주막의 기녀(기생)와 소리꾼, 가마꾼[轎軍]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비전을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황산대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당시 왜장은 아지발도였는데 두꺼운 갑옷을 입어 섣불리 죽일 수 없었다고 한다. 아지발도는 나이가 어렸지만 키가 7척에 힘이 장사라 온몸을 무거운 무쇠갑옷으로 두른 탓에 불사신과 같았다. 그를 죽이려면 화살을 이용해 얼굴의 급소를 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름도 그의 본 이름이 아니다. 그에 대한 두려움이 소문에 소문을 더하면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다. ‘아리’는 어린 아이를 이르는 말이고, ‘발도’는 용맹하다는 뜻을 지닌 몽고말이라고 한다.
날이 저물고 그믐밤인데다 피아의 분별이 어려워 싸움을 할 수가 없다. 바로 그것이었다. 당연히 아지발도도 방심하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이성계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는지라 하늘을 향하여 “천지신명이시어 이 나라 백성을 굽어 살피시어 달을 뜨게 해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를 올린다. 그런데 갑자기 칠흑 같은 밤하늘에 어디서 솟았는지 보름달이 휘영청 떠올라 대낮같이 비추어 주었다. 깜작 놀라는 적장 아지발도의 얼굴이 달빛에 훤히 빛났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부원수 통두란(이지란)으로 하여금 먼저 아지발도의 투구를 쏘게 했다. 그 화살이 어김없이 투구를 날리자 아지발도는 벗겨지는 투구의 끈을 입으로 잡으려고 얼른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 순간을 놓칠세라 이성계의 화살이 이번에 아지발도의 입속으로 들어가 목구멍을 관통한다. 결국 아군보다 왜구의 수가 10배가 많았지만 모두 섬멸되었고 아지발도가 흘린 핏자국이 지금도 황산 광천에 있는 피바위에 남아 있으며 이것이 유명한 황산대첩인 것이다. 지금도 운봉 토박이의 열 가운데 아홉은 읍장 이름은 몰라도 아지발도는 안다고 한다. 어린 왜장 이름을 어려서부터 듣고 자라 아예 귀에 박힌 탓이다. 이때 이성계 장군이 달을 끌어 올렸다하여 ‘인월(引月)’이라고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장치(장동마을)] 남원시에서 출발, 24번 국도를 타고 운봉 여원재를 올라서면 좌측으로 첫 번째 바라보이는 곳이 연재마을이며 그 마을 안쪽으로 장치부락(장동)이 있다. 예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불렀는데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해서 장동(獐노루장 洞마을동)이 되었다. 장치는 장동마을의 이름을 딴 여원재에서 고남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고개이다.
[합민성] 641m. 합민성(장교산성, 할미성, 합미성, 방학산성)은 남원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는 산성으로, 기록에 의하면 동학농민혁명 때 운봉 민보군의 거점이었다고 한다. 조선 말 일목장군 박봉양이 동학군에게 참패를 안긴 곳이 운봉. 농민군이 패전하였다는 방아치와 관음치의 위치 또한 이곳 장치(방아치)와 합민성의 서북쪽 까막재(관음치)로 추정된다. 운봉읍 장교리의 합민성(合民城)은 이 때 쌀을 저장해 뒀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으로도 불린다.
또한 남원시 이백면 주민들은 방학산성이라 부른다. <남원지>에 ‘재장교리 후 나제시고루(在長矯里 後 羅濟時古壘)’라 하였고 “합민성은 석축으로 주위 약 200간(약 300미터)이며 산정에 있다”고 하였다. 성내 최고봉은 645m다. 성곽은 능선을 따라 서남 방향으로 누에고치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주위는 319.6m다. 성곽의 서남각(西南角)에 우루(隅樓)를 세워 폭 6m, 길이 8m의 돌출된 적대가 있고, 그 동편에 남문, 북편 우루대 서북각에 서문 등 세 군데의 성문 유지가 있고 서북편 중앙에 샘터가 남아 있다. 성내에서는 다수의 기와조각, 토기조각 등 삼국시대의 유물이 채집되었다.
[까막재(관음치)] 간엄치, 혹은 간암재라고도 하며 덤몰(가동)에서 산동면 대기리로 가는 고개이다. 고종 31년(1894) 11월 김개남 남원 접주가 이끄는 동학군이 운봉 관군에게 패퇴한 곳이다.
[고남산] 846.4m. 정상의 조망은 매우 훌륭하여 지리산 서부능선인 덕두산-바래봉-팔랑치-부운치-고리봉과 반야봉 아래의 크고 작은 무수한 봉우리와 유장하게 흐르는 백두대간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북동쪽으로 봉화산, 백운산, 덕유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오고 가시거리가 좋을 때에는 서편으로 정읍 내장산과 광주의 무등산이 아스라이 펼쳐진다. 지형 상 남원 함양 일대의 중추적인 방위 역할을 했던 고남산은 정상 부근과 함양읍 부근의 성터가 남아있다. 이러한 흔적들로 볼 때 고남산은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이곳에는 이성계 장군이 고남산에 제단을 쌓고 큰 제를 지낸 후 왕위에 등극했다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내려온다.
“이성계가 황산벌에서 왜구들과 일전(一戰)을 벌이기 전, 멀리 운봉 쪽을 바라보니 고남산이 유난히 뾰족하여 이곳에 올라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계하고 3일간의 산신제를 올려 천지신명께 승리를 기원하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고 왜장 아지발도를 사살하였다. 왜장 아지발도는 일본에서 출발할 때 애첩이 조선 황산의 산신이 크게 노하여 불길하다 하여 출정을 만류하였으나 애첩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아지발도가 황산에서 죄 값을 받은 것이라고 하였다.”
고남산 정상 바로 아래에는 헬기장과 통신시설물이 자리하고 있다.
[통안재] 작은 독골재. 670m. 권포리에서 산동 월석리 독골로 넘어가는 고개로 독골재에 비하여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란 의미이다. 동리(마을) 안 고개라는 뜻이다.
[매요마을] 이 마을은 원래 풍수설에 의하면 옛부터 말의 허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말마(馬)자와 허리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라 하였는데, 임진왜란 때에 고승 유정대사(사명당)가 산천을 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하여 매화는 눈 속에서도 시들지 않고 피는 꽃이며 향기가 순결하여 이 마을에서 낳은 사람들은 매화같이 순결하고 선량할 것이니 마요리를 매요리(梅要里)로 고치는 것이 지형과 인심에 합당하다고 한 후에 지금의 매요리로 부르게 되었다.
[유치재] 매요리와 가산리의 중간, 사치마을과 연결되는 삼거리다. 인근의 마을은 모두 남원이지만 유치재 자체는 장수군 지역이다.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간다. 유치재를 매요마을 서쪽의 언덕으로 표시한 지도는 착오다. ‘흐름고개’, 즉 경사가 거의 없는 고개라는 의미다. ‘버드나무고개’로도 부른다.(자료출처 : 아름다운소통(협), 백두대간학교, 국립공원관리공단, 한민족문화백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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