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를 통틀어 대선 주자들 가운데 선두를 달리고 있는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2년 전의 '삼성 X파일' 문제로 때아닌 공격을 받고 있다. 불씨는 한 언론인이 당겼다.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 당시 문화방송(MBC) 기자였던 이상호 <고발뉴스> 기자는, 당시 노무현 정부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문 전 대표가 특검 도입을 반대하고 막아섰다고 최근 주장했다.
이상호 기자의 언급은 바로 정치권에서 바로 확대·재생산됐다. 국민의당은 23일 당 지도부 회의에서 "참여정부는 초기부터 '삼성 공화국'이었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다. 문 전 대표와 '친문'은 혹시 제2의 삼성 공화국을 꿈꾸는 것 아닌가?", "문 전 대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영장 기각에 대해 '유감'이라는 하나마나한 반응을 내놓은 것이 전부다"(문병호 최고위원), "삼성 X파일 특검 도입을 왜 막고 나섰는지, 국내 최대 재벌과 유착관계를 의심받는 상황에서 재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지 많은 국민이 궁금해하고 있다"는(조배숙 정책위의장) 등의 공세를 퍼부었다.
사실 문 전 대표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한 일이다. 문 전 대표는 지난 1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재벌 개혁 문제에 대한 입장을 밝히면서 "30대 재벌 자산 대비 비중을 살펴보면, 삼성 재벌의 비중이 1/5, 범(汎)삼성 재벌로 넓히면 1/4에 달한다"고 삼성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날선 언급을 내놨다. 문 전 대표는 "재벌 가운데 10대 재벌, 그 중에서도 4대 재벌의 개혁에 집중하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특정 기업집단의 이름을 실명으로 거론한, 유례 없이 높은 강도의 발언이었다. (☞관련 기사 : 문재인 "4대 재벌 개혁"…삼성·현대차·SK·LG 정조준)
사법부 독립 원칙을 생각할 때, 이재용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에 대해 "민심과 동떨어진 결정이어서 유감스럽다"고 한 것 역시 '정치인'인 그가 법원의 결정에 대해 한 비판치고는 결코 낮은 수위가 아니다. 따라서 2017년 '현재' 문 전 대표가 삼성에 대해 미온적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비판은 그가 이제까지 했던 발언의 취지와도 맞지 않고, 다소 무리한 측면이 없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 논란에서 오히려 주목해야 할 것은, 과거 정부의 실패를 대하는 '대선주자 문재인'의 태도다. 사실 노무현 정부 당시 정권과 삼성 사이의 밀월이 있었던 것은 맞다. 또 문재인 개인이 책임질 일은 아니지만, '대통령 노무현-민정수석 문재인-검찰총장 김종빈(수사 도중 정상명으로 교체)-서울중앙지검 2차장 황교안(현재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이어지는 수사 지휘부가 사실상 하나마나한 수사 결과를 내놓으며 삼성에 면죄부를 준 것 역시 사실이다.
X파일 사건, 과거 사실관계는?
X파일 사건이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삼성 구조조정본부(현 미래전략실) 본부장이었던 이학수 부회장이 홍석현 중앙일보사 회장과 만나 나눈 사적인 대화가 김영삼 정부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현재의 국정원)에 의해 도청·녹음됐고, 이 내용이 MBC에 의해 공개된 사건이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은 이회창 대선후보 측에 100억 원의 정치 자금을 전달하는 문제와, 실명으로 거론된 검사 7명에게 '명절 떡값'을 돌리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두 갈래에서 논란이 됐다. 첫째, 삼성의 비자금이 불법 정치자금으로 전달됐다는 의혹과, 둘째, 안기부가 민간인들의 대화 내용을 도·감청했다는 민간인 사찰 의혹이었다.
문재인 민정수석을 포함한 노무현 정부 청와대가 당시 특검 수사에 반대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특검법을 최종적으로 무산시킨 것은 검찰 중간 수사결과 발표 이후 갑자기 '변심'한 한나라당의 반대였지만, 노무현 정부 청와대도 반대 입장인 것은 맞았다.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2005년 7월 25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현재의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정부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국가기관의 불법행위"라고 규정했다. 홍석현 당시 주미대사의 거취 논란에 대해 노 대통령은 "불법 도청으로 만들어진 정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는 고심되는 부분"이라며 "법적으로 불법이므로 (그 내용의) 공개도 불법이라는 것과, 불법 취득 정보도 국민적 공익을 위해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 사이에 인식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했다.
같은해 8월 25일에는 "이상한 테이프가 하나 나와서 또 이회창 후보 대선자금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회창 씨는 1997년 '세풍' 사건 때도 조사를 받았고, 지난 2002년 대선자금 수사 때도 조사를 받았다. 이번에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세 번째 조사를 받으면 대통령인 내가 너무 야박해 보이지 않겠느냐"며 X파일의 '내용' 부분의 의혹에 대해 사실상 '덮고 가자'는 취지의 말을 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을 '개혁의 기수'로 믿고 따랐던 지지자들과 시민·사회단체는 이에 대해 정면 비판을 했다. 참여연대 등 108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X파일 공대위'는 다음날인 8월 26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 대통령은 '97년 대선자금 수사를 덮자'는 노골적인 수사 중단 지시를 즉각 철회하라"고 성토했다.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이 이에 앞서 8월 5일 기자 간담회에서 "도청 사실에 대한 수사는 이미 국정원이 자체 조사를 하고 있고 검찰 수사도 병행되고 있다. 수사를 검찰에 맡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특검에 대한 부분은 조금 어렵다. 오히려 특검에 맡긴다면 서너 달 후에나 (특검이) 활동하게 되는데, 그때까지 검찰 수사를 덮자는 얘기"라며 반대한 것도 맞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검찰 수사는 별 성과를 내지 못했다. '두 갈래' 의혹의 첫째 부분, 즉 파일의 '내용'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당시 수사를 일선에서 지휘한 황교안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2005년 12월 14일 수사결과 중간 발표에서 "이건희 회장을 서면 조사하고 이학수·홍석현·김인주 등을 소환 조사했지만 참여연대 등의 고발 내용(특가법상 뇌물 등)을 입증할 만한 증거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며 "관련자들에 대해 무혐의 결론을 내리고 불기소 처분했다"고 밝혔다.
둘째 부분, 즉 누가 이 파일을 만들었고 유포시켰는지와 관련해서는, 검찰은 '작성자'에 해당하는 임동원·신건 전 국정원장 등을 구속 기소했다. '유포자'인 이상호 기자와 노회찬 의원도 불구속 기소됐다.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하고 전달한 것은 처벌할 수 없고, 이를 폭로한 국회의원과 기자를 처벌하겠다는 검찰의 입장은 사회의 공분을 낳았다. 이 수사는 2013년 2월 '황교안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에서도 논란이 됐다. (☞관련 기사 : "황교안, 'X파일' 수사 노무현 명령 어긴 셈")
또 노무현 정부는, 이후 2007년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의 비자금 조성 및 전방위 로비 의혹에 대해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내놓은 '삼성 특검' 법안도 거부권 행사를 시사하며 막아서다가 결국 11월 27일 대통령 기자회견을 통해서야 수용했다. (☞관련 기사 : '삼성특검' 급물살에 당황한 靑, '거부권 장고' 돌입 / 노 대통령 "삼성 특검, '대통령 흔들기'지만 수용")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그러나…
단지 'X파일 특검'이나 '삼성 비자금 특검'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2월, 삼성이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 논란 와중에 내놓은 8000억 원의 '사회 환원' 기금에 대해 "삼성이 사회에 내놓은 출연금이 관리 주체와 용도에 대해 절차와 추진 방법이 뚜렷이 없어 표류되고 있다"며 "소모적 논란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과정과 절차를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해 '왜 정부가 일개 기업의 출연금 처리에 나서느냐'라는 비판을 자초했다.
또 '국민소득 2만 달러'와 한미 FTA 추진 등 노무현 정부 핵심 국정 과제들이 정책 입안 및 추진 과정에서 삼성경제연구소(SERI)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지기도 했다. 2013년 이광근 성공회대 교수와 이경환 연세대 연구원은 '스마트 통치의 등장: 삼성경제연구소의 등장과 영향력 강화' 제하 논문에서 "재벌 주도 성장 지상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관료·국내 재벌과 관계가 원만하진 못했던 집권 세력(노무현 정권)의 이해 합치"로 인해 SERI의 영향력이 확대됐다고 주장했다. (☞관련 기사 : "진보정권 들어서도 삼성연구소 힘 커진다"… 왜?)
민주노동당 부설 정책연구원이었던 진보정치연구소는 2007년 11월 '삼성공화국과 기로에 선 한국 민주주의'라는 보고서를 내어 "노무현 정부는 삼성의 국정 보고서에 대한 수용과 의존을 강화했지만, 정치적으로 안정적 기반을 얻은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헤게모니의 자원을 갖게 된 것도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관련 기사 : "상처만 남긴 노무현 정부와 삼성과의 동맹") 이미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에도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 '사회적 시민권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논문에서 "노무현 정부는 '2만불 성장'이라는 정책 목표의 선택과 아울러 집권 엘리트-경제 관료-삼성 그룹 간의 결합이 만들어지면서 개혁적 정책의 공간이 크게 축소됐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 "盧정권, '집권엘리트-경제관료-삼성' 3각동맹")
물론 '당시에 그랬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높지 않다. 문재인 전 대표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지난 10일 "4대 재벌 개혁 집중" 구상을 밝히기도 했고, 지난 2012년 대선 과정에서도 노무현 정부의 과오에 대해 공개 반성한 바 있다.
2012년 10월 11일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후보는 "참여정부 시절 재벌 개혁 정책이 흔들렸고, 그 결과 '재벌 공화국'의 폐해가 더 심화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을 일관되게 추진할 철학과 비전, 구체적인 정책과 주체의 역량이 부족했음을 솔직하게 인정한다"며 "시장만능주의가 세계적으로 시대적 조류였던 당시의 외부적 환경만 탓할 수는 없다"는 반성까지 했다. "그러나 두 번 실패하지는 않겠다"고 그는 덧붙여 강조했다.
2012년 11월 21일에는 안철수 당시 무소속 대선후보와의 '단일화 TV 토론'에서 "크게 보자면 그때는 시대적 과제 자체가 정치적 민주주의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었고, 경제민주화에 대한 인식이 좀 부족했었다. 그 시기는 경제민주화 주장하면 '좌파' 소리 들을 때였다"고 노무현 정부를 변호하면서도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양극화가 심해졌다거나 비정규직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참여정부의 한계였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참여정부 당시의 일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 바탕이 돼야 2017년 현재 발표한, 또 앞으로 발표할 재벌 개혁 공약들에 대해 유권자들이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게 당연하다. 문 전 대표 측은 23일 오전 현재까지 국민의당이나 이상호 기자 등의 주장에 대해 아무 공식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혹시라도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식으로 덮고 넘어간다면, 앞으로 그가 할 약속들도 '불가피'하게 변경되지 않을까 하는 유권자들의 불안을 사게 될 것이다. 과거의 한계와 과오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자신이 5년 전 했던 말처럼 "두 번 실패하지는 않겠다"는 각오를 밝히는 것이 '1위 대선주자'다운 면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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