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를 의심했다.
"앞으론 제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선 답변 안 하겠습니다. 어떤 언론이 얘기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발언이다. 설령 대통령, 아니 대통령 후보가 되든 안 되든 그가 할 말은 아니다. 국민의 의문에 답하고,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게 그에겐 책무이자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책무도 저버렸고 기회도 차버렸다. "내가 마치 역사의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 나쁜 놈들이야!"라며 기자들에 대한 불쾌감도 여과 없이 표출했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고 불쑥불쑥 찾아와선 이것저것 물어보는, 그리고 똑같은 걸 자꾸만 묻는 기자들이 편하고 좋을 리 없다. 그래서 기자는 '착한 사람'보다는 '나쁜 놈'이라는 얘기를 더 많이 듣는다.
하지만, 반대로 질문 않는 기자에 대해선 사회적·직업적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레기'라고 비난한다. 국민을 대신해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대답을 들어 국민에게 제대로 전하라고 '질문할 수 있는 권한'을 기자에게 부여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한마디 질문도 못 한 채 받아 적기만 했던 청와대 출입 기자들은 지금까지도 욕을 먹고 있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이 "나쁜 놈들"이라고 기자를 욕한 것보다 기자의 질문에 "답변 않겠다"고 공언한 게 더욱 심각한 문제다. 공인으로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긴 한 건가 의문을 품게 한다. 본인이 유엔 사무총장일 때 해외 언론에 대해 그런 발언을 과연 했을까 궁금하다. 반 전 총장이 "답변 않겠다"고 언론에 짜증을 부린 같은 날인 지난 18일 미국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마지막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이 기자들에게 요구한 역할은 반 전 총장의 그것과 완전히 반대였다.
"제 대답이 길다고 여러분들이 불평했지만, 그것은 한 번에 여섯 개씩 질문하는 여러분들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일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여러분들이 쓴 모든 기사를 즐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이 관계의 특징이죠. 여러분들은 아첨꾼이 아니라 회의론자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저한테 곤란한 질문을 해야 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칭찬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엄청난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에게 비판적 잣대를 들이댈 의무가 있는 분들입니다. 우리를 여기로 보내준 사람들에게 책임을 다하도록 말이죠."
반 전 총장은 물론 박근혜 대통령에겐 낯설고 어쩌면 위험스럽게 여겨질 정도의 발언이다.
그들에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인 신분으로 열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기자회견 장면이 어쩌면 더욱 친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지난 11일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답변 않겠다"며 기자회견장에서 소리를 질렀고 자기 의도에 맞춰 질문을 선별했다. CNN 짐 아코스타 기자와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 사이에는 고성이 오갔다.
"당선인, 당신은 우리 뉴스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우리에게 질문하시죠."
"조용히 해요. 다른 여성이 질문하니 무례하게 굴지 마시오. 당신에겐 질문 기회를 안 줄 거요. 당신 회사는 엉망이고 '가짜 뉴스(fake news)'요."(트럼프 발언의 실제 뉘앙스는 이보다 훨씬 강했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 질문에도 조롱과 허세로 응답했다. 최근에는 "공간이 좁다"는 이유를 내세워 백악관에서 기자들을 내쫓으려 하고 있다. 연일 '폭풍 트윗질'로 자기 얘기를 쏟아 내면서 기자들에겐 질문 기회 자체를 주지 않겠다는 심산이다. 기자회견에서조차 질문을 전혀 받지 않는 어느 대통령, 마음에 들지 않는 질문에 대해선 "답변 않겠다"며 짜증 내는 어느 대통령 후보(가 되려는 자)의 모습과 너무 닮았다.
트럼프가 CNN을 '가짜 뉴스'라고 공격했지만, 사실 이번 미국 대선에서 '가짜 뉴스'의 수혜자는 트럼프였고 피해자는 힐러리였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지난해 12월 28일 발표한 보고서 '미 대선 시기 가짜뉴스 관련 논란과 의미'에 따르면 가짜 뉴스 20개가 페이스북을 장악했고 여기에 달린 공유·댓글 숫자가 871만1000 건에 달했다. 이는 CNN,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의 주요 기사 20건의 댓글(736만 건)을 크게 넘어선 것이었다. '가짜 뉴스'는 민주당보다는 공화당지지 경향이 강했고, 우파사이트가 좌파사이트보다 2배 이상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 프란체스코 교황이 트럼프 지지를 발표했다(반응 96만 건), △ 클린턴 후보가 테러단체 ISIS에 무기를 판매했다(79만 건), △ FBI는 힐러리를 기소할 것이다(14만 건) 등이 대표적 '가짜 뉴스'다. '가짜 뉴스'란 말 그대로, '거짓말'이다. '사실'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다. 그것이 '뉴스'라는 형식을 빌려 '사실'인양 '진실'인양 보도됨으로써 대중을 속이고 여론을 왜곡한다. 이미 한국에서도 '가짜 뉴스'의 폐해가 지적되고 있고, 대선을 앞두고 선관위가 전담팀을 결성해 감시활동을 시작했다.
반 전 총장 역시 '가짜 뉴스'의 피해자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대표적 사례가 안토니오 구테헤스 신임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 결의 위반을 들어 반 전 총장의 출마를 반대했다는 뉴스다. 하지만 유엔에선 이와 관련해 아무런 공식적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가짜 뉴스'의 피해자인 것만은 아니다. 반 전 총장이 "답변 않겠다", "나쁜 놈들"이라고 기자들에게 짜증을 부렸던 그 날 반 전 총장 측 역시 일종의 '가짜 뉴스'를 생산했다.
조선대학교 학생들과 토론회에 패널로 참석했던 조선대 2학년 박제상 씨가 페이스북에 쓴 글이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면서 '가짜 토론'의 일면이 드러났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일없으면 해외에서 자원봉사라도 해라"고 말해 논란이 된 토론회였다. 박 씨는 "질문(대선 관련 행보)과 지문('농담처럼 유연하게')이 주최 측에 의해 정해져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청중 질문자 한 명도 이미 정해져 있더라. 강연이 끝난 후, '질문 있습니까'라는 말에 꽤 많은 청중이 손을 들었다. 어떤 분은 '제가 질문 하겠습니다'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리 정해진 질문자 한 명만 질문할 수 있었다"며 "왜 토론회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가짜'와 '진짜'에 대한 국민적 의심과 불만, 기대가 지금만큼 높았던 적도 없다.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인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을 지냈고, 스스로 자랑하듯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설을 한 정치 지도자"이기에 그가 '트럼프'가 아닌 '오바마'를 닮았을 것으로 우리는 기대했다. 쏟아지는 질문에도 성실하고 여유 있게 답하는 모습을 상상했고, 기분이 상하고 의견이 다르더라도 격렬한 논쟁을 할지언정 거부와 묵살로 대응하는 장면을 상상하지 않았다. CNN이 구테헤스 사무총장을 반 전 총장과 비교하며 "구테헤스는 유엔 직원들과 수첩 없이 대화할 수 있다"고 평가하며 반 전 총장을 폄훼했을 때 이해하기 어려웠다. 설마 정해진 질문과 순서가 아니면, 직원과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나의 '설마'는 틀렸다. 그는 '오바마'가 아니라 '트럼프'를 닮았고, 그리고 '박근혜'를 닮았던 것이다. 질문을 받으려 하지 않고, 수첩에 의지하려 한다. 본인에 대한 과도한 의전을 당연히 여긴다.
더욱이 박근혜 대통령의 언어를 똑 닮았다. 박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참 나쁜 사람"이라 비난했고, 노태강 문체부 전 국장을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반 전 총장은 질문하는 기자들을 "나쁜 놈들"이라 불렀다. 언어는 사고를 반영하고, 그의 수준을 드러낸다. 반기문의 '반반(半半)'이 '트럼프 반, 박근혜 반'일 줄이야!(이명박 전 대통령이 잠시 서운할 수는 있겠다.) 어떠한 비판과 질문에도 당당하고 여유롭게 응하는 '글로벌 리더'의 모습을 지금부터라도 보여 주길 바란다. 귀국 후 지금까진 '안' 했을 뿐 설마 '못'한 것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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