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주일, 100만 명의 추모객, 하루 10만 명 분량의 식사와 국화꽃 등 갖가지 진기록이 웅변하듯, 고인이 촌로로 늙어가고자 했던 고향 마을에서 번진 애도의 울림은 그의 생전 삶을 닮은 듯 불꽃 같았다.
봉하의 지난 7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봉하마을의 환경은 대단히 열악했다. 김해에서도 오지인 이곳, 대중교통은 물론이고 승용차로도 진입이 어렵다. 가까이엔 변변한 식당 하나 찾기 힘들다. 그럼에도, 폭우가 쏟아진 날에도, 30도 폭염이 내리쬘 때도, 거센 바람에 흙먼지가 날릴 때도 추모 행렬은 늘어만 갔다.
무엇이 국민들 마음을 이토록 울렸을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들의 슬픔과 노무현의 슬픔이 뭉쳐져 서러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천호선 전 홍보수석이 "우리도 이 정도일 줄은 생각 못했다"고 고백했듯이, 봉하의 일주일은 전직 대통령마저 벼랑 아래로 등 떠미는 서러운 세상을 또한번 확인한 국민들의 슬픔이 폭발한 시간이었다.
고락을 같이했던 이들은 '미안함'이라는 말을 제일 많이했다. 이백만 전 홍보수석은 "검찰에 출두하시던 날 내려왔었는데 TV 카메라에 잡힌 내 모습을 보고 '왜 거기가 있냐'고 타박하던 친구들이 전화를 해서 '다 미안하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 전 수석은 "유서에 '미안해 하지 마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더 미안하다"고 덧붙였다. 김화준 전 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은 "이 열기의 원인이 뭘까? '미안함'이 제일 크겠지"라고 자문자답 했다.
노무현 집권기에 십중팔구는 예각으로 맞섰던 이들의 솔직한 고백도 들었다. 진보정당의 한 당직자는 "사실 우리 모두 한 번은 '노빠'였다는 기억이 다시 되살아 났다"고 토로했다.
한 보수언론의 기자는 "통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부르던 노무현 후보의 흑백 대선 광고 영상에 매료되지 않은 사람은 뼛속까지 보수적이지 않은 사람들 말고는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추진한 정책으로 논쟁했던 이들조차 소탈했던 인간적 면모, 그리고 '진정성'을 갖춘 '노무현 후보', '대통령 노무현'에 대한 기억이 오롯이 되새김질 되고 있었다. 아울러 참여정부 시절 증진됐고 노 전 대통령 본인도 '비가역적'이라고 생각했던 일반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는 이명박 시대에 대한 한탄이기도 했다.
조문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27일 새벽,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 씨 내외가 처음으로 분향소에 나와 상주 노릇을 했다. 이 때 이호철 전 민정수석은 "네 아버지가 잘못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어이없는 고초에 시달려 온 유족들에게는 '자랑스런 아버지', '자랑스런 남편'으로, 국민들에게는 '떳떳한 대통령'으로 하루속히 고인의 명예가 회복되기를 바란다.
29일 0시, 봉하마을에는 노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던 '상록수'를 합창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부재로서 존재를 증명한 고인을 보내는 마지막 송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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