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동백섬 지심도와 <통영의 미식> 기행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동백섬 지심도와 <통영의 미식> 기행

2017년 2월 섬학교

겨울에는 도무지 동백의 유혹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다시 또 동백의 섬으로 갑니다. 파리 사교계의 여인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한 달 내내 밤이면 동백꽃을 가슴에 꽂고 다녔습니다. 25일은 흰 동백, 나머지 5일은 붉은 동백. 그래서 ‘동백꽃 여인’으로 불렸지요. 알렉상드르 뒤마 필스의 소설<춘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정열의 상징 동백꽃, 동백은 겨울에 피어야 동백입니다. 봄에 피는 동백은 동백이 아닙니다. 춘백입니다. 한겨울 추위를 뚫고 피어나야 진짜 동백이지요. 새해 2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56강은 2017년 2월 4(토)-5(일)일 1박2일 일정으로 진짜 겨울 동백을 보러 거제의 지심도로 갑니다. 지심도는 수백 년 된 고목 동백나무가 섬 전체 면적의 70%를 뒤덮고 있는 진짜 동백섬입니다. 동백과 후박, 소나무 거목들로 가득한 지심도는 걷는 내내 숲 터널을 통과하게 됩니다. 경상도에서 가장 걷기 좋은 길로 꼽힙니다.

▲지심도 너머로는 망망대해다. 태평양의 장대한 풍경이 시작된다,Ⓒ섬학교

이번 답사길에는 또 10리길을 내내 바다만 보고 걸을 수 있는 통영의 ‘삼칭이해안길’도 갑니다. 보태어, 통영에서는 정월 대보름 전에 쑥국을 두 번만 먹으면 일 년 내내 잔병치레가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겨울 해풍을 맞고 돋아난 쑥의 약효 때문이지요. 이번 답사길에는 늦겨울, 초봄의 별미 도다리쑥국도 먹고 온갖 해산물 요리의 향연이 펼쳐지는 다찌집에서 통영의 진미도 맛보게 됩니다. 여행의 반은 <미식기행>이기도 한 셈입니다.

▲한겨울 추위를 뚫고 피어난 지심도의 진짜 동백Ⓒ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월의 섬학교 <동백섬 지심도와 통영의 미식 기행>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세상에 없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거제 지심도행 배는 장승포항이 아니라 장승포 동사무소 앞 도선장에서 뜹니다. 동백섬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사철 지심도를 찾는 여행자들이 많아졌지만 한겨울에는 상대적으로 한가롭습니다. 따뜻할 때는 작은 섬이 사람들로 몸살을 앓을 정도니 걷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심도는 이런 겨울에 가야 제 맛입니다. 2월의 어떤 날, 오후 4시 30분, 지심도행 막배를 타고 들어갑니다. 여객선은 나는 듯이 지심도 포구에 도달합니다.

장승포항에서 불과 5킬로, 짧은 거리지만 배가 끊기면 섬은 다른 세계에 속합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벗어났다고 생각했으나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어찌할까요. 뱃길이 끊어진 시간 동안 섬은 여행자에게 또 다른 세계가 됩니다. 섬에 깃든 생명체들은 모두가 한 운명이 되는 것이지요. 강한 바람과 거친 파도가 여행자라고 비껴가지 않습니다. 삶을 넘어서고 싶은 열망으로 섬에 왔으나 섬은 다시 삶입니다. 세상 밖의 삶은 없습니다. 세상에 없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섬의 유일한 운송수단은 짐수레를 매단 오토바이들입니다. 짧지만 섬은 초입부터 언덕길입니다. 주민들은 짐을 싣고 가파른 길을 오릅니다. 부두에는 어선 한 척 떠 있지 않습니다. 섬에 방파제가 없는 까닭이지요. 폭풍으로부터 배를 숨길 곳이 없으니 섬이지만 섬의 주업은 어업이 아닙니다. 섬은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나무 터널이 시작됩니다. 동백나무, 소나무, 팔손이, 후박나무 등의 상록수가 원시림의 숲으로 남아 있는 이 땅에 보기 드문 보물섬입니다. 오랫동안 섬의 소유권자는 국방부입니다. 섬의 땅 주인이 국방부였다는 것이 주민들에게는 불운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무들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지심도는 면적 0.356㎢(10만여 평), 길이 1.5㎞, 너비 500m, 해안선 둘레 3.7㎞에 불과한 작은 섬입니다. 더 오랜 옛날에도 살다 떠나고 들어와 살기를 거듭했을 터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사람살이의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이 섬에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현종 때인 17세기 후반부터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섬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이 아닙니다. 선주민들은 일제시대 제국의 군대에 의해 쫓겨났고 8.15 해방 때까지 섬에는 일본군 일개 중대가 주둔했습니다. 해방 이후에야 다시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지요. 섬의 지주인 국방부 산하 국방과학연구소 뒤편에는 일제의 포진지와 탄약고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섬에는 분교가 있었지만 지금은 폐교가 돼버렸고 일본군 전등소장 사택으로 쓰였던 건물은 커피숍으로 변신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심도 숲터널. 숲은 바람 속에서 깊어진다. Ⓒ섬학교

개발에 대한 두려움

민박집 주인 내외와 저녁 밥상을 함께 합니다. 나그네가 운이 좋았습니다. 주인이 떠온 학꽁치회가 푸짐하군요. 주인이 떴다는 말은 회를 떴다는 것이 아닙니다. 뜰채 낚시로 물고기를 잡아 왔다는 뜻입니다. '반대'라고도 하는 뜰채 낚시는 대나무에 매단 큰 그물로 뜰채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재래식 어로방법입니다. 홍합 부스러기 따위의 밑밥을 넣은 대나무 뜰채를 바다에 던져 놓으면 물고기들이 몰려듭니다. 어부는 그것을 들어 올려 거두기만 하면 되지요. 그야말로 물에서 물고기를 거저 떠오는 셈입니다.

주인의 말에 따르면 섬에는 열다섯 채의 집이 있다는군요. 두 집은 빈집이고 실제 사람이 사는 집은 열세 집이랍니다. 다들 민박으로 생계를 꾸린다 합니다. 하지만 모든 집에 사람이 상주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섯 집 정도만 붙박이로 살고 나머지는 장승포에서 드나들며 민박을 친다합니다. 섬이 부업거리 일터인 셈이지요. 해방 이후부터 살아온 선주민은 세 가구에 불과합니다. 나머지는 근자에 들어온 후주민들입니다.

후주민들은 장승포 등지에 사는 주인에게 세를 주고 집을 빌려 민박업을 하거나 식당이나 카페를 합니다. 이 민박집 주인 역시 십 수 년 전 우연히 여행 왔다가 빈집을 사 고치고 또 새로 지어 눌러 살게 됐다합니다. 외지에서 들어온 사람들 대부분이 비슷한 경로로 섬에 정착했습니다. 낚시나 여행을 왔다가 섬에 매혹돼 눌러 살게 된 것이지요. 섬에는 일본에서 여행 왔다가 주저앉은 일본인 부부도 살고 있습니다.

지심도는 모든 땅이 국방부 소유라 집주인들도 땅에 대한 권리가 없고 오로지 건물에 대한 권리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6년 11월, 지심도의 소유권이 국방부에서 거제시로 이전됐습니다. 111년만의 반환입니다. 지심도의 소유권 이전은 거제시가 일운면 서이말등대 인근에 국방부 해상시험소 대체시설을 조성해 주고 지심도와 교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거제시는 이 섬을 역사와 생태가 함께하는 힐링 관광지로 조성할 방침이라 합니다. 해양전망대와 구름다리, 탐방로, 해전역사관을 비롯해 외도, 해금강을 연결하는 해상관광 루트 등을 개발할 계획이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민박집 주인은 그 때문에 걱정이 많습니다. 혹시나 개발 때문에 주민들이 강제 이주 당하게 될까 그것이 것이 두려운 것이지요.

"주민들이 몇 번씩이나 산불 난 것을 껐어요. 2000년엔가 그때도 산불이 났었지요. 그 때도 주민들이 합심해서 불을 안 껐으면 원시림이 다 타 없어져버렸을 겁니다. 그때는 저 위 국방과학연구소에 석유가 몇 만 톤이나 있었거든요. 한꺼번에 기름을 쟁여 놓잖아요. 불길이 거기로 번졌다면 섬 전부가 타 없어져 버렸을 거예요. 그걸 우리 주민들이 껐는데. 그래서 저 원시림이 남아 있는 건데..."

민박집 주인은 주민들 스스로 섬과 섬의 원시림을 지켜낸 탓에 섬에서 쫓겨나게 생겼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그가 처음 들어와 살던 때만 해도 섬에는 관광객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방송과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섬은 순식간에 유명 관광지가 됐지요. 동백꽃이 만개할 무렵이면 이 작은 섬에 하루 천 명 넘는 관광객이 몰려오기도 합니다. 주인은 섬을 알리기 위해 방송 출연까지 했던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는 섬이 개발되기보다는 지금 그대로 보존되기를 희망하지만 희망은 부질없어 보입니다.

▲소복입은 여인처럼 처연하고 고혹적인 지심도 백동백Ⓒ섬학교

겨울에 피어야 동백이다

아침부터 바람이 제법 붑니다. 민박집 정원은 다양한 수종의 나무와 초본 식물들로 잘 가꾸어져 있습니다. 용설란은 주인이 10여 년 전 섬의 마끝 절벽에서 캐왔다 합니다. 주인이 들여다 심은 뒤 안의 종려나무들도 세월 따라 울창해졌으나 바람과 추위에 시달려 모색은 초췌합니다. 그들이 살기에는 이 섬의 기온이 너무 매몰찬 것일까요. 민박집 뒷길, 섬의 정상에는 잔디가 깔린 '활주로'가 있습니다. 활주로라 이름 붙어 있지만 경비행기도 착륙하기 어려운 짧은 거리입니다. '활주로'는 비행기 활주로가 아니라 헬기 착륙장입니다. '활주로' 옆 숲길을 따라 섬의 동북쪽으로 갑니다. 추운 날입니다. 이런 추위에도 섬은, 섬의 나무와 풀들은 다들 맨몸으로 견뎌냅니다.

섬은 그 전체가 원시의 숲입니다. 태풍이라도 불면 모든 숲이 바닷물을 뒤집어 쓸 만큼 작은 섬에서 끝내 살아남은 나무들은 대체로 뿌리가 깊어 바람에 강하거나 염분에도 잘 견디는 나무들입니다. 그들 중 동백나무의 개체 수가 월등히 많습니다. 섬이 동백섬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2월의 섬은 동백의 시절이 아닙니다. 남해안 섬에서 오래 살았던 나그네가 그것을 모르고 온 것은 아니지요. 지심도로 나그네를 부른 것은 동백꽃이 아닙니다. 동백 숲과 아주 오래된 동백나무들입니다. 꽃만을 볼 요량이었다면 동백이 무더기로 피어나는 12월이나 3월이 지나서 왔을 것입니다.

겨울 중 가장 추운 때인 이즈음은 동백이 많이 피지 않고 대부분의 꽃들은 꽃망울을 머금고 날이 풀리길 기다립니다. 동백은 대개 11월 말 경부터 이듬해 4월까지 피고 지기를 거듭합니다. 겨울에 꽃이 핀다 해서 동백(冬柏)입니다. 겨울 꽃으로 알려져 있지만 동백은 세 계절에 거처 물경 반 년 가까이 피는 꽃입니다. 동백나무에는 동백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추백(秋柏)도, 춘백(春柏)도 살다 갑니다. 사람들에게 익숙한 3, 4월의 동백은 실상 동백(冬柏)이 아니라 춘백(春柏)인 것이지요.

한겨울 추위에도 섬에는 피어 있는 동백꽃이 간간히 눈에 띕니다. 꽃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 있습니다. 아무리 동백이라 한들 얼어버릴 듯한 추위야 어쩌겠습니까. 추위가 오래 계속된다면 저 동백꽃들도 동사하고 말 것입니다. 설령 견뎌낸다 해도 끝내 열매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름값을 하고 죽는 것이 열매를 얻는 것보다 못하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요. 이 겨울 대책 없이 타오르다 붉게 지는 목숨, 저 꽃으로 인해 동백은 비로소 동백다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숲은 바람 속에서 깊어진다

동백의 숲으로 난 흙길을 걷습니다. 이 섬보다 더 작은 섬에도 자동차 길이 나 있는 것을 여러 번 봤습니다. 다행이도 지심도에는 자동차 길이 없습니다. 섬은 짐수레 매단 오토바이 한 대가 간신히 지나다닐 만큼 좁은 오솔길들로 이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섬의 일부는 포장도로지만 활주로에서 샛끝별여 부근 망루로 난 길을 비롯해 섬의 여러 갈래 길들은 고스란히 흙길입니다. 이런 비포장의 흙길은 어느 섬에서도 좀체 만나기 어려운 행운입니다. 참으로 귀하고 귀한 길이지요.

길의 본 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 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나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나아가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길들은 자동차와 온갖 장애물들의 위협으로 더 이상 생각에 몰두해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들은 오로지 통로로서의 기능만 할 뿐입니다. 이런 오솔길, 흙길들, 사람이 안심하고 걸을 수 있는 길들을 더 이상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만드는 소중한 토양이 아닐까요. 나그네는 많은 길들이 '사유의 확장' 기능을 되찾을 때 이 소란하고 얕은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더 깊고 고요해질 것을 믿습니다.

왕대나무 숲 부근에 섬의 방향 표지석이 서 있습니다. 동서남북의 방위를 알려주는 표지석. 바다가 보이지 않는 깊은 숲속에 들어와서야 섬의 방향이 제대로 가늠됩니다. 매일 매일 삶이 혼돈스럽습니다. 내 삶의 방향 표지석은 어디쯤에 있는 것일까요. 실상 삶에는 방향 표지석 따위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삶은 정해진 방향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방향을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저 주어진 삶은 없습니다. 어디에서도 삶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삶일 뿐입니다. 어둑한 숲의 터널을 빠져나가면 환한 빛이 쏟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숲의 끝은 절벽입니다. 넘어서고자 하지만 건너 뛸 수 없습니다. 삶 건너 삶은 없습니다. 세상에 없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해안 절벽에 가까워질수록 파도소리 거세지고 숲은 바람 속에서 깊어집니다.

▲청보석처럼 아름다운 통영 삼칭이 해안길Ⓒ섬학교

내내 청보석의 바다를 보며 걷는 삼칭이해안길

평지가 드문 통영에서 삼칭이해안길은 더없이 걷기 좋은 평탄한 길입니다.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쌓은 제방에 길을 낸 것이 통영 최고의 해변길이 됐습니다. 마리나리조트에서 영운리까지 4km를 내내 바다만 보며 편안히 걸을 수 있습니다. 이 길은 자전거도로로 만들어진 까닭에 시멘트 포장을 했습니다. 흙길이 아니라 조금 아쉽지만 시리도록 푸른 청보석의 바다는 그런 아쉬움쯤 잊게 해주기에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으니 안전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모처럼 삼칭이길을 걷습니다.

‘삼칭이’란 이름은 삼천진에서 유래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의 끝자락 마을인 영운리에 삼도수군통제영 수군의 주둔지인 삼천진이 있었습니다. 진장은 종9품의 권관(權管)이었습니다. 권관이란 조선시대 변경지방 진관(鎭管)의 최하단위인 진보(鎭堡)에 두었던 종9품의 수장(守將)입니다. 삼천진은 본래 삼천포에 있었으나 1619년(광해군 11년) 영운리로 옮겨오며 삼천진이란 이름도 함께 가져왔습니다. 과거에는 진이 옮겨가면 이름도 옮겨갔습니다. 선유도에 있던 군산진이 옮겨가면서 군산이란 이름도 따라갔고 경기도 남양에 있던 영종진이 지금의 영종도로 옮겨가면서 이름도 따라갔지요. 삼천포란 이름은 고려시대 개경에서 뱃길로 삼천리 거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긴 생머리의 소녀 셋이 마리나리조트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되돌아옵니다. 아마 자전거를 빌려 시간이 다할 때까지 길을 오가며 노는 듯합니다. 육상에서 싱그러운 소녀들이 바람을 가르는 동안 바다에서는 흰 돛을 올린 요트들이 바람에 밀려갑니다. 여객선은 먼 바다 섬으로 떠나고 조업 나갔던 어선들은 서둘러 포구로 돌아옵니다. 사내들 몇은 낚싯대를 던지고 물고기를 잡아 올립니다. 바닷물은 맑고 푸르고 투명합니다. 파래와 돌김, 잘피들까지 해변의 물속에는 무성한 초원이 다 드러납니다. 초원에 풀을 뜯으러 나온 물고기들 머리 위로 소방헬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한산도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아가고 놀란 물고기들은 물풀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깁니다.

병사들의 영혼을 천도하던 마을 수륙리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복슬강아지 한 마리는 길을 가다 말고 딴전을 피웁니다. 태어난 지 45일밖에 안된 신생의 강아지. 어린 생명의 기운으로 이 길도 더욱 생명력 넘칩니다. 공설해수욕장 부근 길가와 모래밭에서는 부모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이 연을 날립니다. 연을 처음 날려보는지 아이들은 자꾸 연을 떨어뜨립니다. 아이들의 삶도 그러할 것입니다. 높이 날아오르다 추락하고 다시 날아오르고 다시 추락하길 반복하며 점점 더 멀리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길가에는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입간판이 서 있습니다. 통영시 명예시민이자 홍보대사인 영화배우 성룡이 쓰레기 봉지를 들고 웃으며 당부합니다. “쓰레기를 효과적으로 줍는 방법은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충북 번호판을 단 대형버스 옆에서는 술판이 벌어졌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생들은 낮술에 거나하게 취해 구호를 외칩니다, 노래를 부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가뭇없는 한 시절을 흘려보냅니다. 산 밑 주차장 옆에는 산으로 간 배 한 척이 자동차들과 나란히 정박해 있습니다. 자전거도로답게 자전거 대여점도 몇 곳 눈에 띕니다. 1인용, 2인용, 자전거 마차까지 종류도 다양합니다. 걷기도 좋고 자전거 타기도 좋고 무엇이든 다 좋은 날입니다.

공설해수욕장이 있는 이 마을은 수륙리입니다. 삼도수군통제영 시대 죽은 군인들의 원혼을 달래는 수륙제를 행하던 장소라 해서 수륙리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 바다는 얼마나 많은 영혼들의 거처인가요. 임진왜란으로 죽은 수천, 수만, 적과 아의 영혼들, 무고한 백성들의 영혼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훈련 중 많은 수군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전복 따위 해산물 공납을 관청에 바치기 위해 물질하다 숨을 거둔 원혼 또한 부지기수겠지요. 억울하거나 죽어 마땅하거나 무관하게 아무튼 원귀가 된 영혼들을 위로하고 천도하던 곳, 수륙리. 그 원혼들의 바다가 오늘은 더없이 평화롭고 무심하고 푸르기만 합니다.

본래 수륙재란 수륙(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공양(供養)하는 불교의식입니다. 수륙도량(水陸道場) 혹은 수륙법회라고도 합니다. 수륙재를 지내면 떠돌던 넋들이 불보살의 가피를 받아 극락으로 천도된다고 믿어집니다. 수륙재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 464〜549년), 달마대사에게 불법을 묻던 그 양나라 황제인 무제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제는 떠도는 넋들을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수륙재를 지냈다 합니다.

이 땅에서 처음 수륙재가 거행된 것은 고려 광종 2년(970년), 갈양사(葛陽寺)에 개설된 수륙도량에서입니다. 억불숭유정책을 취했던 조선시대에도 초기에는 국가행사로 수륙재를 거행했습니다. 하지만 중종 때에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국가행사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습니다. 이후 민간에서만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통영에서는 요즘도 간간이 이 길가에서 수륙재를 지내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슬프고도 거룩한 풍경입니다. 오늘만큼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서 슬픔이 멈추고 기쁨만 가득하길 기원하며 걷고 또 걷습니다.

▲해산물 요리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통영 다찌 상차림Ⓒ이상희

섬학교 제56강, 2월 4(토)∼5(일)일, <동백섬 지심도와 통영의 미식 기행>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2월 4일(토요일)>
06:40 서울 출발(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3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6강 여는 모임
-통영 도착
-점심식사(통영식 해물탕)
-버스 이동
-장승포항 출항
-지심도 걷기(4km)
지심도선착장-발전소-마끝해안절벽-동백숲터널-해안전망대-폐교운동장(활주로)-지심도선착장
-지심도 출항
-장승포 도착
-통영 숙소 도착(캘리포니아호텔. 다인실)
-저녁식사 겸 뒤풀이(통영 최고의 다찌집에서 제철 해산물 요리 향연)
-자유시간 및 취침

<2월 5일(일요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통영 제일의 도다리쑥국)
-삼칭이해안길 걷기(4km)
-전혁림미술관 관람
-해저터널 건너기
-점심식사(통영식 제철한정식)
-장보기
-서울 향발. 56강 마무리모임

▲<동백섬 지심도와 통영의 미식 기행> 지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가볍고 따뜻한 등산복/배낭/등산화), 스틱, 물통, 윈드재킷, 우비(+접이식 우산),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미지참시 승선 거부당합니다).

▶이번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1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