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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한성백제>에서 <강남스타일>까지

2017년 2월 서울학교는 <선정릉과 봉은사>

새해 2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해설가) 제56강은 5세기 <한성백제>로부터 21세기 <강남스타일>까지의 주 무대인 강남으로 ‘시간여행’을 떠납니다.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속에서도 조선시대의 불교를 일시적으로나마 부흥시켰던 문정왕후와 깊이 관련이 있는 봉은사와 선정릉, 한성백제의 산성인 삼성리토성을 둘러볼까 합니다. 2월의 쌀쌀함을 감안하여 걷는 시간을 최소화한 가장 짧은 코스이면서 강남의 중심을 관통하는 새로운 기행이 될 것입니다.

▲봉은사에서 볼 수 있는 추사의 마지막 글씨 ‘판전’. 추사 예술의 결정판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서울학교


서울학교 제56강은 2017년 2월 12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30분(개강시각이 바뀌었습니다), 서울지하철 7호선 청담역 2번 출구 지하에 모여주세요. 여유있게 출발하여 모이는 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삼성리토성(경기고등학교)-봉은사(일주문-남호대사비-청호대사비-선불당-대웅전-영산전-판전-다래헌터)-승과평터-코엑스(지하상가)-테헤란로-점심식사 겸 뒤풀이-선정릉(안내소-중종릉-정현왕후릉-성종릉)


▲강남 선정릉과 봉은사 답사길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토성과 사찰, 왕릉이 어우러진 강남의 유적 공간

강남은 빌딩숲으로 둘러쳐져 있지만 역사적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하면 빌딩 사이로 숨어 있는 산줄기의 흐름을 대체로 가늠할 수 있으며 그 산줄기에 기대어 꽃피웠을 찬란했던 문화유산도 우리들 가까이로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강남이 단순한 빌딩숲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성백제(漢城百濟) 외성(外城)의 하나인 삼성리토성과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조선에서 잠시나마 부흥기를 맞이한 명종(明宗) 대의 불교중흥 중심지였던 봉은사(奉恩寺)와 도심 속의 조선 왕릉(王陵)이 어우러진 문화유산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안성(安城) 칠현산(七賢山)에서 서북쪽으로 뻗은 한남정맥(漢南正脈)이 수원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한줄기는 서쪽으로 서해를 향해 내닫고, 다른 한줄기는 북쪽으로 뻗어나가 백운산(白雲山)과 청계산(淸溪山)을 지나 북서쪽으로 관악산(冠岳山)에서 힘차게 솟구친 후 다시 한강을 향하여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꿉니다. 이어 우면산(牛眠山)과 매봉산을 일구고 북쪽으로 국기원이 있는 역삼공원에서 작은 봉우리를 이루고는 동쪽으로 뻗어나가 봉은사 뒷산인 수도산(修道山)에서 그리 높지 않게 봉긋 솟았다가 마침내 뚝섬 건너편 영동대교 동쪽에서 한강으로 몸을 감춥니다.

한강으로 숨어들기 전에 봉긋이 솟아 있는 수도산은 한성백제(漢城百濟)시대에 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흙으로 쌓은 삼성리토성(三成里土城)이 있었던 곳입니다. 한성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도성을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나눈 이성체제(二城體制)로 운영하였는데 북성은 지금의 풍납토성(風納土城)이고 남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이며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중심이었습니다.

도성 밖에는 서쪽으로 수도산에 위치한 삼성리토성, 동쪽으로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일대의 이성산성(二聖山城), 남쪽으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南漢山城) 그리고 한강 북쪽의 아차산성(峨嵯山城)이 외성(外城)으로서 도성을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삼성리토성은 북쪽으로 한강에 접하고 강을 사이에 두고 뚝섬 방향을 내려다보는 봉은사 동북쪽에 있는 흙으로 쌓은 산성입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유단식(有段式)의 축성형태가 뚜렷한 성벽이 350m 가량 남아 있었으나 강북에 있던 경기고등학교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마구 파헤쳐져 대부분 훼손되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지금의 경기고등학교 북쪽에 개설된 축대 부분을 토성의 흔적으로 추정할 따름입니다.

삼성리토성은 지정학적(地政學的) 관점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으로 한강변을 방어하고, 한강으로 유입되는 탄천(炭川)을 조망하며, 북으로는 중랑천(中浪川)과 맞닿아 있는 뚝섬 쪽을 바라보고 있어 한강의 남쪽에 있는 한성백제의 도성을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성리토성으로 추정되는 흔적. 경기고등학교를 신축하며 토성의 일부에 축대를 쌓았다.Ⓒ서울학교


유서깊은 고찰 봉은사

삼성리토성이 자리 잡은 수도산 정상에는 지금은 경기고등학교가 들어섰으며 유서 깊은 고찰 봉은사는 그 남쪽 품에 안기어 있습니다.

봉은사(奉恩寺)는 794년(원성왕 10)에 연회국사(緣會國師)가 견성사(見性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사료(史料)는 전해지는 것이 없고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8 ‘잡지(雜誌)’ 제7에 봉은사가 일곱 곳의 성전사원(成典寺院) 중의 하나라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를 근거로 추정할 뿐입니다.

성전사원이란 신라 중기에 나타나는 왕실(王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기복사찰(祈福寺刹)로 수도인 서라벌에는 남쪽으로 사천왕사(四天王寺), 북쪽으로 봉성사(奉聖寺), 서쪽으로 영묘사(靈廟寺), 동쪽으로 황룡사(皇福寺), 중앙에 영흥사(永興寺)를 의도적으로 배치하고 이곳에서 여러 종류의 국가의례(國家儀禮)가 거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성전사원의 전통은 고려를 건국한 왕건(王建)의 진영(眞影)을 모신 사찰인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그 맥을 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성종의 계비(繼妃)인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가 1498년(연산군 4) 성종의 능[宣陵]을 위해 능의 동편에 있던 견성사를 중창하여 원찰(願刹)로 삼고 이름도 봉은사로 고쳤으며 1562년(명종 17)에는 선릉 곁에 있던 봉은사를 수도산(修道山) 아래 지금의 위치로 확장 이전합니다. 봉은사가 있던 곳에는 서삼릉(西三陵)에 있던 중종(中宗)의 능, 즉 정릉(靖陵)을 옮겨와서 선릉과 정릉이 합해진 선, 정릉의 권역이 정해지고 봉은사는 선, 정릉의 원찰의 역할도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봉은사는 태조와 세조의 원찰이었던 회암사(檜岩寺),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의 원찰 봉선사(奉先寺)와 더불어 조선 왕실에서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사찰이 됩니다.

성리학(性理學)을 기본으로 나라를 세운 조선은 억불(抑佛)의 한 정책으로 사찰의 수를 대폭 줄이게 되는데, 태종대에 국가에서 인정하는 사찰을 242개로 줄였고 세종 대에 와서는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나누어 각각 18개 사찰씩 36개 사찰만 인정하다가 연산군대에 와서는 이마저도 완전 폐지되며 선교양종의 체제는 무너졌습니다.

승과제도(僧科制度)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일종의 승려등용(僧侶登用)의 국가고시제(國家考試制)로서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에도 성종대까지는 지속되었으나 연산군대에 시행하지 않았다가 중종대에 합법적으로 폐지되었습니다. 이렇듯 존폐의 위기에 몰렸던 불교가 명종 대에 와서 일시적인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명종(明宗)을 대신해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한 어머니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불교를 중흥시키려는 여러 정책을 폈는데, 그 곁에서 당시의 봉은사 주지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스님이 잘 보좌하였기 때문에 유신(儒臣)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불교중흥정책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봉은사는 역설적으로 불교가 억압받던 조선시대에 크게 부흥하여 조선불교의 중심에 우뚝 섭니다. 문정왕후는 먼저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체제를 부활시켜 봉은사(奉恩사)를 선종(禪宗)을 총괄하는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로,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을 총괄하는 교종수사찰(敎宗首寺刹)로 삼았으며 보우스님을 판선종사 도대선사 봉은사 주지(判禪宗事 都大禪師 奉恩寺 住持)에 임명하여 봉은사를 중심무대로 삼아 불교중흥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불교중흥정책의 하나로 그동안 완전 폐지되었던 승려들의 과거시험인 승과(僧科)가 다시 부활되는데 승과는 잡과(雜科)와 함께 3년마다 과거가 시행되므로 1552년(명종 7)에 첫 시험이 실시된 이후 1555년(명종 10), 1558년(명종 13), 그리고 1562년(명종 17)에 마지막으로 시행되고 문정왕후가 죽은 그 다음해인 1566년(명종21)에 마침내 그 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불교를 다시 부흥시킨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도 이때 시행된 승과에 급제한 인재들로서 서산대사는 첫 번째 실시한 1552년에, 사명대사는 마지막인 네 번째 실시한 1562년에 합격하였습니다.

승과에 합격한다는 것은 승려로서의 신분을 보장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승려들이 과거장에 모여들었는데 그 많은 인원들이 과거시험을 보던 곳이 봉은사 앞 벌판인 승과평(僧科坪)으로서 지금은 국제전시장인 코엑스가 들어서 있습니다.

1565년(명종 20)에 문정왕후가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자 잠시 동안 부흥기를 맞이했던 불교는 다시 탄압과 쇠락을 길을 걷게 되고 그 중심에 섰던 보우스님도 졸지에 요승으로 지탄받으며 탄핵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조정의 명을 받은 제주목사 변협(邊協)에 의해 장살(杖殺)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봉은사에는 서울 도심의 사찰치고는 볼만한 유적들이 많이 있는데 경전목판(經典木板)과 명필의 편액(偏額)글씨, 그리고 역사적 의미가 새겨져 있는 비석(碑石)들이 그것입니다.

봉은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판전(版殿)에는 모두 3749장의 경판이 보관되고 있는데 그중 3175장은 평생을 경전을 사경(寫經)하여 그것을 판에 새기는 일을 하였던 남호(南湖)스님이 판각한 화엄경판(華嚴經板)이고 유마경(維摩經), 금강경(金剛經), 아미타경(阿彌陀經) 등 15종의 경전목판도 함께 보관되어 있습니다.

‘판전(版殿)’이라는 편액 글씨는 추사 김정희가 죽기 3일 전에 쓴 글씨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과 더불어 대웅전의 편액도 추사의 글씨인데 이것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삼각산에 있는 진관사(津寬寺) 대웅전 현판 글씨를 모각한 것이고 영산전(靈山殿) 편액은 국어학자이면서 의사로서 종두법(種痘法)을 최초로 실시했던 지석영(池錫永)의 형인 백련(白蓮) 지운영(池運永)이 쓴 글씨입니다.

추사의 집안은 대대로 불교와 인연이 깊었는데 예산의 추사고택 뒤에 화암사를 원찰로 둘 정도로 돈독했으며 부친 김노경은 당대 최고 선지식이었던 대흥사 해붕스님과 교유했고 추사도 서른 살 무렵 만난 초의선사와 평생 교유했습니다. 그는 만년에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린 1852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버지 김노경이 터전을 잡은 청계산 아래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보내며 추사체를 완성하였습니다.

또한 인근에 있는 봉은사를 드나들며 주지 호봉응규(虎峯應奎)와 교분도 쌓았는데 이때 봉은사는 화엄경을 판각하는 불사를 하고 있어 추사는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경전서사(經典書寫) 공덕을 높이 찬양한 것은 바로 호봉과 같은 이를 두고 한 말”이라면서 ‘판전(版殿)’이라는 현판을 써 주었는데 그가 죽기 3일 전의 일이라 합니다. 그 글씨는 “참으로 무르익으면 오히려 어린 아이의 그것처럼 순수해 보인다”는 의미를 가진 대교약졸(大巧若卒)의 경지를 제대로 보여 주는 추사 예술의 결정판으로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봉은사 일주문을 지나면 오른쪽에 송덕비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데 그중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것은 판전에 보관된 경판을 판각한 남호대율사비(南湖大律師碑)이고 또 다른 하나는 한강을 범람케 한 을축년 대홍수(1925년) 때 많은 돈을 들여 708명의 인명을 구제한 봉은사 주지 나청호 대선사 수해구제공덕비(奉恩寺 住持 羅晴湖 大禪師 水害救濟功德碑)입니다.

남호영기(南湖永奇)대사는 당대의 화엄강백으로서 봉은사 이외에도 삼각산 내원암에서 아미타경을, 흥국사에서는 연종보감을, 철원 석대암에서는 지장경을 간행하고 해인사 대장경을 인경하여 오대산 적멸보궁과 설악산 오세암에 봉안하는 등 경전간행과 보급에 진력하였습니다.

그리고 판전 아래에 비각을 갖추고 위엄 있게 서 있는 흥선대원위영세불망비(興宣大院位不忘碑)에는 봉은사의 땅이 남의 농토에 섞여서 여러 해 동안 송사(訟事)에 시달려 어려움이 많았는데 대원군 덕택에 문제가 해결되어 그 은혜를 돌에 새겨 영구히 전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도심 속의 왕릉 선정릉 Ⓒ문화재청

성종과 중종이 묻혀있는 선정릉

유교(儒敎)의 가치관을 근본으로 한 조선사회에서는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정신을 다스리는 혼(魂)과 육신을 거느리는 백(魄)이 몸에 함께 있다는 것이고, 죽었다는 것은 혼백이 몸에서 빠져나가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육신은 사라져도 초자연적인 정신은 영원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산 자의 육신이 머무는 거주공간인 집과 궁궐은 양택(陽宅)이라 하고 죽은 자의 혼(魂)을 모신 곳을 사당(祠堂), 시신과 백(魄)을 모신 곳을 무덤이라 하여 이를 음택(陰宅)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왕실의 무덤은 그 신분의 차이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불렀습니다. 능은 왕과 왕후의 무덤이고 원은 세자(世子), 세자빈(世子嬪), 세손(世孫) 그리고 종실로서 왕위에 오른 왕의 부모인 사친(私親)의 무덤이며, 묘는 그 밖의 왕족으로 왕의 정비(正妃)의 아들과 딸인 대군(大君)과 공주(公主), 왕의 서자(庶子)와 서녀(庶女)인 군(君)과 옹주(翁主), 왕의 후궁(後宮)인 빈(嬪), 귀인(貴人), 숙의(淑儀) 등의 무덤입니다.

그래서 왕은 궁궐에서 살다가 죽으면 혼(魂)은 종묘(宗廟)에 모시고 체백(體魄)은 능에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의 왕릉은 도성으로부터 십리에 해당하는 성저십리(城底十里)로부터 백리에 해당하는 교(郊)에 이르는 영역 안에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특별히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성 백리 안쪽인 서울 근교(近郊)에 있습니다.

조선왕조는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 왕과 왕비의 무덤인 왕릉 42기와 폐위된 두 왕의 무덤인 묘 2기가 모두 보존되고 있어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지하철 2호선 역 이름으로도 불리는 선릉(宣陵)은 엄밀히 말하면 선릉과 정릉(靖陵)의 두 왕릉이 합쳐져 있는 공간입니다. 선정릉(宣靖陵)이라고도 부르는데 선릉은 성종(成宗)과 성종의 계비(繼妃)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이며 정릉은 중종(中宗)의 능입니다. 선릉은 왕과 왕비가 다른 언덕에 묻혀 있는 동원이강식(同原異岡式)의 두 봉분이고 정릉은 왕만이 묻혀 있는 단릉(單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선정릉 안에 능이 세 개 있다고 해서 삼릉(三陵)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했습니다.

선릉이 조성되는 과정에서 연산군은 자기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데 그 연유는 이렇습니다. 조선은 왕릉을 조성할 때 능에 모시게 될 왕의 생애(生涯)와 가계(家系) 등을 상세히 기술한 지문(誌文)을 작성하여 현재의 왕에게 최종 검토를 받고 함께 묻게 되어 있는데 그 당시의 왕인 연산군이 최종 검토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 엄청난 피바람이 불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중종의 능인 정릉은 원래는 서삼릉(西三陵)에 있었으나 문정왕후가 자신이 죽은 뒤 중종의 능 옆에 함께 있고 싶어 최측근인 보우대사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 가까이에 있는 선릉 옆으로 천장(遷葬)하고 봉은사를 그 원찰로 삼았으나 문정왕후는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릉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왜군에 의해 부자지간인 선, 정릉이 크게 훼손되었다고 하는데 훼손의 정도에 있어서는 아마도 아들인 중종이 훨씬 심각했다고 전해지며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아도 중종의 정릉이 능침에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릉에 대한 공간구성(空間構成)과 배치구조(配置構造), 왕릉 주위의 많은 석물(石物)들의 이름과 의미 그리고 왕릉을 보좌하는 많은 건물들의 이름과 역할에 대해서는 현장강의를 통해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따뜻한 차림, 보온모자, 선글라스,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 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 번씩, 둘째 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 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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