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7년이 시작됐다. 2017년은 마르크스가 <자본>을 출간한 지 150년이 되는 해이자,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100년이 되는 해다. 2017년은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있은 지 30년이 경과한 해이며, 1996~1997년 노동법 개정 정치총파업이 벌어진 지 20년이 되는 해다. 그러나 무엇보다 2017년은 위와 같은 연대기적 의미를 훌쩍 넘어 2017년 자체가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중대한 해가 될 전망이다. 알다시피 2017년은 지난해 10월 29일부터 시작된 촛불광장이 연속되는 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엄청나게 커져 있다. 2017년은 아마 지난 1996~97년처럼 미래에 2016~2017년로 표기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 자본주의는 지금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중국의 대대적인 경기부양책에 힘입어 비교적, 상대적으로 그런대로 위기를 넘겨온 한국경제가 지금은 중국의 경기후퇴에 따른 직격탄을 맞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이른바 4대 개혁 그 중에서도 특히 '노동개혁'(노동개악)을 통해 이러한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다행히도 그동안 자본의 공세와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해 온 민주노총과 '진보-좌파' 진영이 지난 2015년 이후 조금씩 투쟁을 끌어 올리면서 전선을 형성함으로써 박근혜의 노동개악은 부분적으로 실패, 부분적으로 성공하는 데 그쳤다. 2016년 4.16 총선 결과에도 이 점이 반영되어 나타났다. 사실 4. 16 총선 결과는 이명박근혜 정권 9년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와 반발이 표출된 것이다.
한편 지난 대선에서의 국가기관의 부정한 선거개입, 인사와 국정에서 보인 난맥상, '통진당' 강제 해산과 세월호 참살, 메르스 사태에도 불구하고 4.16 총선 이전까지 박근혜 정권은 자본과 보수 진영의 훌륭한 대변자였다. 박근혜 정권은 단순한 대변자를 넘어 위안부협정, 국정교과서 도입, 개성공단 폐쇄, 대북 강경제재 조치, 사드 배치 강행에서 보듯이 보수 진영을 이끄는 전위 역할을 수행했다. 지난 총선에서 보수 진영에서 보아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의 무리수를 무릅쓰고 '친박' 전위대를 국회에 입성시킨 것도 모두 그러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단순히 비선 실세에 의해 농락당한 허수아비 정도로 박근혜 정권을 바라보는 것은 자칫하면 사태를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에서 나오는 착각과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거야말로 지금 보수 진영이 바라는 바이자, 의도하는 바다.
2.
광장이 그토록 빠르고, 그토록 거대하며, 그토록 지속적으로 표출될 수 있었던 배경과 동력은 크게 세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4.16 총선 결과다. 4.16 총선 결과는 박근혜 정권과 '친박' 세력이 보수 진영을 이끌기는커녕 대변하는 것조차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는 보수 진영 입장에서는 정권 재창출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보수 진영 내부에 분열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수진영을 분열시킨 원동력은 4.16 총선 결과를 낳은 노동자민중의 분노와 반발이다. 만약 총선 결과가 달랐다면 '박-순실' 게이트는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그치고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거나 기껏해야 보수진영 내부에서의 권력 다툼을 위한 재료 정도로 쓰이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광장을 탄생시킨 주역은 보수 진영의 분열을 불러일으킨 노동자민중 자신이다.
둘째는, 이게 핵심으로, '박-순실' 게이트가 갖는 성격이다. '박-순실' 게이트는 단순한 정치 스캔들이 아니다.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국가의 존립의 근거와 정당성을 뿌리째 흔드는 일대 대사건이다. 대중이 분노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대중도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바로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국가에 두고 있다. '박-순실' 게이트는 이러한 대중의 신체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기존 정치권의 보수/진보, 좌/우 대립 구도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 박근혜의 지지율이 4% 수준까지 급락한 것도, 야당과 유력 대선주자의 지지율이 크게 반등하지 않았던 것도 역시 모두 그 때문이다. 즉 '박-순실' 게이트는 특정 정파의 문제를 넘어 대의제 자체가 부정당한 것이다.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달려 나온 대중은 주권자로서 무너진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국가를 스스로 복원하고 있다. 오직 이를 통해서만 자신의 신체에 가해진 충격을 치유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기존 정치권에게 맡겨뒀던 대의를 거두고 직접민주주의의 집행자로서 떨쳐 일어선 것이다. 설령 박근혜의 실정이 덜했더라도 상황은 지금보다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는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좌파' 진영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알다시피 민주노총과 '진보-좌파' 진영은 10월 24일 JTBC 보도에 이어 10월 25일 박근혜의 1차 대국민 담화가 나온 이후 곧바로 10월 29일(1차) 박근혜퇴진 투쟁에 주저 없이 나섰다. 이게 지금까지의 촛불광장을 이끈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특히 11월 12일(3차)은 민주노총 전국노동자대회와 민중총궐기 투쟁이 결합되고 100만 대중이 운집함으로써 사실상 박근혜정권 퇴진정국을 돌이킬 수 없는 현실로 만든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진보-좌파' 진영은 "박근혜 정권퇴진 국민행동"(퇴진행동) 안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정치권을 비롯해 보수언론은 물론이고 심지어 진보언론조차 이를 애써 감추거나 굳이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말이 민주노총과 '진보-좌파' 진영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별개의 문제다.
3.
12월 31일까지 10차에 걸친 촛불광장에 나선 대중은 연 인원으로 1000만을 넘어섰다. 참으로 경이적인 일이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기존 정치권과 무관하게 오직 대중 자신의 힘으로 일군 것이라는 점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광장이 이룬 성과는 일일이 헤아리기 힘들만큼 엄청나다. 그 중 하나는 모순적으로 나타나는데, 한 측면에서는 기존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국가 그리고 이를 담당(대의)하고 있는 기존 정치권이 한마디로 얼마나 허약하고 형편없는 것인가를 폭로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그러한 부르주아 정치, 부르주아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는 욕망을 표출, 분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나라냐', '주권자의 명령이다'라는 외침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모순은 결코 대중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이 모순적으로 존재하는 데에서 나오는 불가피한 현상이자 현실이다.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대중 자신이다. 모순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을 바꾸는 것을 통해서만 대중은 그러한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며 비로소 자유로워 질 수 있다. 그 어떤 대의(제)로도 이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순서를 전변해야 한다. 대의제를 근간으로 하고 거기에 직접민주주의를 더하는 방식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대의를 일부 활용하는 방식으로 전면 전환시켜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대의제가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대의제 안에서의 활동이 필요하다. 다만 그 목적은 대의제 바깥, 즉 거리, 현장, 광장에서의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즉 대의제 안에서의 활동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이 되어야 한다. 대의제를 전복하기 위한 의지와 전망을 갖지 않으면 모순적 현실을 바꾸기 어렵다. 모순적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확장해야 한다. 의회정치, 제도정치에 갇힌 정치를 일상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대중의 일상은 거리, 현장, 광장, 가정, 선술집 등 도처에 있다. 의회와 청와대는 대중의 일상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분리, 분단되어 있다. 대중이 기거하는 모든 곳, 대중이 겪는 모든 것을 정치의 장, 정치의 재료로 삼아야 한다. 의회와 제도는 그 중 극히 일부만을, 그저 간간이, 그것도 왜곡하면서 겨우 반영할 뿐이다.
광장은 아직 '즉각퇴진'의 열정과 열기로 가득 차 있다. '즉각퇴진'과 '탄핵'은 하늘과 땅 차이다. '즉각퇴진'은 직접민주주의의 연속이지만, '탄핵'은 대의제의 연속이다. 물론 ‘탄핵’을 이끌어 낸 것도 '즉각퇴진'이라는 점에서 이번의 경우에는 '탄핵'도 직접민주주의의 직접 효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쯤에서 생각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즉 '즉각퇴진'을 계속 가져가되, '즉각퇴진' 또는 '탄핵' 이후를 뒤로 미루지 않고 지금, 여기 광장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말한 바의 모순적 현실을 이 기회에 최대한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제는 그 방향과 구체적 방안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미 많은 얘기들이 나왔으며, 앞으로도 나올 것이다. 광장의 정치적 성과를 광장의 것으로 만들고 굳히는 것이 지금 그 무엇보다 절실하고 절박하다. 만약 그렇지 못하거나 축소되면 광장이 갖는 의미가 약화되거나 심지어 굴절될 수도 있다.
4.
지금의 전망으로는 빠르면 1월말, 늦어도 3월초에는 헌재에서의 탄핵 인용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그건 그 때가서 다시 생각을 하더라도 광장은, 특히 민주노총과 '진보-좌파' 진영은 정치 시간표를 1월말~3월초에 맞추고 지금부터 그에 따른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 정치권은 이미 대선이 시작됐다. ‘진보-좌파’ 진영은 현실적으로 대응이 늦을 수밖에 없는 조건과 처지를 안고 있다.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다르며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존 정치권에 앞선 대응을 할 수 있고 또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트랙을 동시에 가동해야 한다. 첫째는 광장의 정치화를 지금까지보다는 훨씬 속도감 있게 시도, 추진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속도라면 정치권에 역전 당하는 현실이 도래할 수도 있다. 광장이 기존 정치권의 대권 다툼에 말려들 경우를 차단해야 한다. 이제 '즉각 퇴진'을 통해 다다르고자 했던 효과는 거의 이루었다고 보아도 좋다. 그 힘에 근거하여 다음 정세를 선점해야 한다. 광장의 정치화를 이루는 방안은 다름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보다 적극적이고 전면적으로 등장시키는 것이다. 현재 '퇴진행동'이 제출하고 있는 이른바 '6대 요구(과제)'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6대 요구'만으로는 기존 정치권을 압박하는 데에도 힘이 달리지만, 그 보다 더 노동자민중이 지금 처해 있는 당장의 절박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현재 한국사회 노동자민중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소, 완화시키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요구를 중점적으로 들고 나와야 한다. 이 문제야말로 최대의 '개혁입법'이 되게 해야 한다. 가능하면 대선 전에 비정규직 문제가 획기적으로 개선되는 법제화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나머지 요구도 모두 중요하지만 비정규직 문제에 비하면 그 시급성은 덜하다.
둘째, 민주노총은 이번만큼은 대선 정국에, 이 때까지 제대로 실현한 바가 없었던, 대중투쟁과 선거를 결합시켜야 한다. 대선 이후의 투쟁 계획과 일정을 잡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무의미 할 수 있다. 대선을 어떻게 경과하고, 그 결과가 어떠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민주노총은 비정규직 문제, 최저임금 문제, 민영화 문제, 노동기본권 확대/강화 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노동 계급 전체의 전위로 나서야한다. 노동 개악 폐기, 성과퇴출제 저지 등을 굳힐 필요가 있지만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사실 이런 요구는 벌써 광장에서 외쳐져야 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재벌개혁', '재벌총수 구속'과 같은 요구는 뒤로 돌려도 괜찮다. 재벌을 실질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은 위와 같은 요구를 쟁취함으로써 가능하다. 민주노총은 광장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거기에서 다 다루기 어려운 노동 문제 해결을 자신의 과제로 분명히 하고 가능한 광장에서부터, 그리고 광장 바깥에서 동시에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셋째, '진보-좌파' 진영은 민주노총과 함께 바로 대선 대응을 시작해야 한다. 야권연대에 의존하지 않고도 한국사회의 현실과 당면 과제를 실질적으로 변화, 개선시킬 수 있는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갖추고 대중에게 제시해야 한다. 노동자민중이 처한 모순적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과 시도를 다해야 한다. 그를 위한 일환으로 '진보-좌파' 진영은 민주노총과 함께 아래로부터의 노동자민중 경선을 통한 대선 후보 선출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민주노총은 이미 지도부 선출에서 조합원직선제를 치른 경험을 가지고 있다. 민주노총 조합원을 근간으로 삼아 예컨대 '100만 선거인단'을 조직하여 이를 통해 ‘진보-좌파’ 진영의 정치를 새롭게 가다듬어야 한다. '진보-좌파' 진영은 이에 필요한 협의를 하루빨리 시작해야 한다. 대의를 존중하고 따르면 나머지 문제는 충분히 기술적으로 처리가 가능한 것들이다. '100만 선거인단' 조직화는 단순한 형식, 경선 방식이 아니다. 조직화 과정과 경선 과정 속에 폭발적인 정치가 내재되어 있다. 그 자체가 곧 최대의 정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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