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간의 전국법관회의는 사법행정의 운영방식 개선, 법관인사제도의 개선 등 크게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몇몇 개선책들을 마련했다는 전언이다. 사건배당에 있어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 등이 임의배당을 할 수 있게 하는 법원예규를 폐지하거나 대폭 수정하고, 재판개입의 예에 관한 사례집을 만들고 예규 등에 관련 규정을 마련하며, 판사가 재판독립을 침해받았다고 느낄 때 이를 논의하고 침해 여부를 결정할 기구를 설치하자는 등에 대해선 의견이 일치됐다고 한다.
이밖에 사무분담 등을 위해 1년에 2번 소집되는 자문회의 성격의 법관회의를 정례화하고 이를 의결기관화 시켜 법원장 등의 사법행정권 행사에 실질적인 견제기구가 되게 하자는 의견도 개진되었다는 전언이다. 관심을 모았던 신영철 대법관의 거취와 관련한 논의에 대해서는, 사퇴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지만 이 문제를 전국법관회의에서 결정하는 것 자체가 앞으로 있을 윤리위원회의 결정에 간섭이 될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법관 회의 내용을 공개해야 하는 이유
그러나, 법원측에 의해 이번 법관회의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들이 오고 갔으며 합의를 통해 결정된 내용은 무엇인가에 대해 상세하고 공식적인 설명이 아직까지 없다는 점은 큰 문제다. 대법원은 이번 회의에 앞서 전국 법원들에서 기수별, 보직별 법관모임을 가진 뒤 여기서 수렴된 의견을 바탕으로 보고서를 작성한 것으로 안다.
그러나 이 보고서 자체가 '대외비'로 분류되어 공개되지 않고 있다. 전국법관회의에서의 논의내용도 마찬가지다. 법원측은 당장 전국법관회의의 회의록과 전국 법원에서 법관모임을 통해 논의된 의견들을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공개해야 한다. 법원개혁과 관련된 법원 내부의 목소리들을 최대한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나서 법원 외부의 목소리까지 폭넓게 수용하여 법원개혁에 대한 사회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 법원개혁 논의 과정에 국민이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다.
법원개혁의 문제는 속사정을 잘 아는 법원이 알아서 할 문제이며 법원개혁에 대해 외부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또 다른 사법권 독립 침해라는 식의 폐쇄적 입장을 고수하려 한다면 이번에도 진정한 법원개혁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법원이 행사하는 사법권도 주권자인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이 아니던가.
본인도 재배당을 요구했다면
언론에 보도된 전국법관회의 논의 내용에만 근거해 법원개혁의 방안에 대해 필자의 몇 가지 생각을 밝혀보고자 한다. 우선, 전국법관회의에서는 윤리위원회에서 심의 중이라는 이유로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 신영철 대법관의 거취문제와 관련해, 신대법관 스스로 거취 표명에 조속히 나서는 것이 사법부 신뢰회복을 위해 급선무라고 믿는다.
최근 몇 건의 촛불사건들에 대한 상고심이 신영철 대법관이 소속된 소부에 배당되자, 신 대법관이 재배당을 요구해 이 사건들이 다른 재판부로 배당되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형식이야 어쨌건 본인 스스로도 불공정한 재판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고 대법원이 재배당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신 대법관이 이 촛불사건들을 심리한다는 것이 사실상 기피사유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 ⓒ연합뉴스 |
전국법관회의에서 법원행정처장은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싸라기눈 같아서 쌓이기는 어렵지만 흩어지기는 참 쉬운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신 대법관 한사람의 대책없는 버티기로 인해 법원 전체가 불신의 대상이 되는 상황으로 진전될 수 있다. 하루빨리 사퇴결단을 내리는 것이 진정 법원을 위하는 길이다. 설사 윤리위원회에서 심의 중이라는 이유로 법원이 사퇴를 허용하지 않더라도 신 대법관은 우선 사퇴의사를 밝혀야 한다.
고법부장판사 제도의 문제점
법관의 재판상의 독립이 이루어지기 위한 구체적인 제도개선책도 시급히 마련되어야 한다. 제도적 개선방향에 대해 할 말이 많지만, 가장 시급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현행 법관인사제도의 가장 큰 맹점이자 전관예우의 근본원인이 되고 있는 고등법원 부장판사제도의 폐지이다.
현행 고등부장제도를 시급히 폐지하고 순환보직개념의 고등부장제도를 도입해야 하는 것이다. 법관의 승진단계를 보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과정에서 최초로 발탁인사가 행해진다. 고등부장 승진대상자 중 반 수 이상이 승진에 탈락하는 해도 많다. 그 이전인 지방법원 부장판사 단계까지는 법관경력만 차면 큰 문제가 없는 한 연공서열에 의해 거의 자동 승진이 된다.
그런데 지방법원 부장판사에서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해야 하는 이 최초의 발탁인사 단계에서 승진에 누락되면, 사법시험 몇 회다 연수원 몇 기다가 중요한 우리 법조 특유의 기수문화 하에서는 판사들이 후배법관을 위한 용퇴를 강요당하며 법원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법원을 떠난 판사들과 고등부장 승진에 별 자신이 없어 미리 법원을 떠난 판사들이 소위 '전관변호사'가 되어, 우리 법조 특유의 고질적 병폐인 전관예우의 문제를 일으킨다.
전관예우야말로 사법정의를 형해화시키고 국민들 입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장탄식이 나오게 하는 사법불신의 주범이 아니던가. 이처럼 현행 고등부장제도는 상급법관에 의한 재판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토양이며, 국민들이 사법부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드는 만악의 근원이다.
물론 대안도 있다. 현행 고등법원 부장판사 제도를 폐지하고 지방법원 부장판사급 정도의 법조경력을 가진 판사들을 고등법원 판사로 임명하면서 이 대등한 경력의 고등법원 판사들 중에서 돌아가며 순환보직으로 고등부장을 맡게 한다면 발탁인사도 없앨 수 있고, 법관들이 승진에 신경 쓰는 일도 많이 줄어들 수 있다.
또한 고등법원 합의부를 대등한 경력의 법관들로 구성함으로써 지금처럼 부장판사가 법관경력이 적은 배석판사들을 가르치려드는 '사이비 합의부'가 아니라 판사들간에 진정한 의미의 합의가 이루어지는 합의부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법원은 이를 더 이상 갖가지 핑계를 대며 미루려 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현행 고등부장제도의 폐지가 법원개혁의 출발이자 신호탄이 되어야 한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책임도 무겁다
대법원장은 법원의 행정에 대해 총괄적이고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자리다. 이런 대법원장의 법관과 국민에 대한 진심 어린 사과표명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오히려 대법원장이 전국법관회의 오찬장을 방문해 그 자리에 있던 법관대표들에게 "국민의 신뢰 없이 사법부의 독립을 외치는 것은 독선으로 비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문제가 크다.
법관 독립을 해친 당시 신영철 서울중앙지법원장의 재판 개입에 대해 대법원장도 직무감독을 다하지 못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사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사라진 책임 중의 상당부분은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의 몫이기 때문이다. 법관들에게 국민의 신뢰를 얻으라고 말하기 이전에, 법관들이 국민적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공정한 재판을 할 수 있게 대법원장이 법원장 등 고위법관들에 의한 재판 개입을 막을 제도적 장치부터 내놓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대법원장이 "외부에 전달되는 법원의 소리는 보편적 소리여야 한다"며 "대법원과 일선 법원의 의사소통이 원활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 것도 이번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대법원의 인식에 문제가 많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판사도 법원 내부의 문제에 대해 내부고발자로서 법원 밖으로 용기있는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번 사태의 원인은 대법원과 일선법원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판사가 공정한 재판보다는 승진에 더 신경쓰게 하는 제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만약 이번 전국법관회의 이후 진지한 법원개혁의 논의가 이어지지 않고 법원개혁을 위한 대법원의 과감한 결단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우리 사법부는 엄청난 국민적 저항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 국민들은 사법부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내일(25일)은 46회째를 맞는 '법의 날'이다. '법의 날'을 맞아 진정한 법관의 독립과 국민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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