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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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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들의 전쟁

[작은책] 꿀 훔쳐가는 도둑벌, 우리네 인생사와 닮은꼴

강원도 평창 청옥산 중턱에서 경상북도 군위 소보면 야산으로 봉장을 옮겨 왔다. 산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가 살기에는 평창 산골이 딱이었으나, 봄이 더디 오고 일조량이 짧아 꿀벌들이 번성하기에는 좋은 환경이 아니었기에 이곳으로 옮겨 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6월부터 8월까지는 다래화분과 야생화꿀, 그리고 피나무꿀을 따기 위해 다시 평창 산골로 이동양봉을 갈 계획이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곳에서 살고 더운 여름에는 시원한 곳에서 살 수 있는 것이 극한 직업의 이동 양봉인들에게 주어진 그 나마의 특혜라 할 수 있겠다.

벌통은 꿀벌들이 벌통 안으로 다 들어간 다음에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저녁 8시에 상차를 하고 10시에 출발할 계획이었으나, 3.5톤 트럭은 길을 헤매다가 구렁에 빠졌다는 연락을 보내왔고, 1톤 트럭 두 대가 산길을 내려가 그 트럭을 빼내 와서 밤새 벌통을 옮겨야 했다. 군위에 도착해 벌통을 내리고 나니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고 밤참으로 준비했던 막걸리를 마시며 도깨비에 홀린 듯 길을 헤맸던 지난밤 이야기를 하다 보니 해가 떠올랐다. 늦은 장맛비를 뚫고 여섯 번이나 더 평창과 군위 사이를 왕복하며 살림살이와 짐을 옮기며 겪었던 그 많은 일은 나중에 웃으며 얘기할 수 있으리라.

봉장 근처에 빈집이 없어서 컨테이너하우스를 구입했다. 200여 통의 꿀벌을 돌보며 컨테이너하우스에 창고와 마루와 처마를 이어 붙이느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정신없이 일하며 지내다 보니 벌써 11월이다. 우리가 초보 일꾼인 데다 이웃 분들이 한 수씩 거들어 주시고 직접 연장을 잡고 도와주셨는데 사공이 많았다고나 할까.

의견이 분분하다 보니, 일의 진행이 느려졌다. 게다가 마을 어르신들은 평창에서 왔다는데 서울말을 쓰는 젊은 부부가 궁금해서 수시로 올라오시곤 했다. (내가 서울에서는 중년의 아주머니이지만 이 마을에서는 젊은 새댁이다.) 어르신들은 타지에 와서 어려운 점이 많을 테지만, 열심히 살아 보라는 응원과 심심하면 놀러오라는 정겨운 눈길을 보내 주신다. 그러고는 우리가 일하는 데에 방해가 될까 봐 얼른 돌아가 주셨다. 어르신들은 오실 때마다 복숭아를 한 바구니, 밤을 한 웅큼, 고구마를 한 상자, 배추를 한 아름씩 가져다주셨다. 물론 나는 젊은 새댁으로서 고구마를 캐는 날이면 함께 땅을 팠고, 들깨를 베면 이랑에 줄줄이 눕혀 두었고, 들깨 터는 날에는 함께 들깻대를 매치고 들깨를 걸러 내어 자루에 넣는 것까지 도와드렸다. 아, 내가 저 많은 일을 해내다니!

우리 부부가 이웃 분들을 도와 가을걷이를 하고 집을 손질해 가며 소보면 사리리에 적응해 나가고 있는 동안 꿀벌들도 열심히 살고 있었다. 여왕벌은 소비라 부르는 벌집판에 알을 빽빽이 채워 주었고, 일벌들은 들깨꿀과 꽃가루를 신나게 나르고 어린 벌들은 육아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9월 중순부터는 한 달 동안은 월동 식량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겨울 동안 꿀벌들은 공처럼 똘똘 뭉쳐진 봉구(蜂球)를 이루고는 펭귄의 허들링처럼 자리를 바꾸면서 먹이를 교대로 먹으며 그들의 체온과 벌통 안의 온도를 따뜻하게 유지한다. 그러려면 봉구 가까이에 꿀이 많이 있어야 한다. 멀리 있는 꿀을 먹으러 갔다가 체온을 빼앗기면 꿀벌은 금세 몸이 마비되어 죽기 때문이다.

ⓒpixabay.com

그런데 꿀벌 입장에서는 5,6월에 모은 꿀은 사람에게 다 빼앗기고 7,8월에 모은 꿀로 월동 식량을 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다. 게다가 9월이 되면 꿀벌들의 밀원이 되는 꽃은 대부분 사라진다. 바로 그때 우리 벌쟁이들은 설탕물을 진하게 타서 여러 번 넣어 준다. 일벌들은 신이 나서 소비에 꿀을 쟁이고 날개바람으로 수분을 날려 꿀이 걸쭉해지면 밀봉하여 꿀장을 만든다. 꿀을 더 많이 채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여왕은 산란을 멈추고 일벌들은 애벌레도 파내 버린다. 그리고 먹이만 먹고 일은 하지 않는 수벌들을 벌통 밖으로 쫓아낸다. 몸집이 큰 수벌이 벌통 안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애쓰는데 작은 일벌들이 달려들어 쫓아내는 모습과 버려진 애벌레를 보고 있노라면, 월동을 위한 꿀벌들의 전략이 비정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여왕벌과 꿀벌들이 몸통 크기를 줄여 최소한의 먹이로 긴 겨울을 견뎌 낼 준비를 마친 모습을 보면 사뭇 비장하게까지 느껴진다. 여왕을 비롯한 꿀벌들은 종족 보존을 위해 모두가 희생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기에는 벌통 안이 궁금해도 절대 뚜껑을 열어보면 안 된다. 꿀 냄새가 조금만 풍겨도 도봉(盜蜂)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기 집에 꿀이 풍족해도 도둑벌이 생겨나서 몰려다니며, 이 벌통 저 벌통을 기웃거린다. 그러다가 여왕벌이 없어졌거나 군사 수가 약한 벌통을 발견하면 총공격을 해서 그 벌통 앞은 아수라장이 된다. 벌통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기세등등하게 왕왕대는 벌, 못 들어오게 하느라 방어벽을 세우고 웅웅대는 벌, 도봉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벌, 수비하는 벌을 죽이고 들어가는 벌, 약해진 적을 물고 나가 떨어뜨리는 벌, 소문 앞에서 밀려 떨어져 내리고 다시 날아오르고…. 그렇게 전쟁터를 방불하는 소란이 일어나면, 다른 벌통에서도 일벌들이 출동해서 도둑벌로 변신한다. 도봉이 든 벌통은 다른 곳으로 옮겨도 계속 도봉이 따라 붙어서 해체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봉장 전체에 도봉이 들어 모든 벌통이 다 망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벌통 몇 개를 해체해야 했다. 빈틈만 있으면 몰려다니며 비집고 들어가 꿀을 훔쳐가려는 도둑벌을 보며, '옆 사람이야 죽든 말든 나만 아니면 된다'는 우리네 인생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11월이 되어 아침 기온이 낮아 꿀벌들의 움직임이 둔한 틈을 타서 우리는 벌통 축소 작업을 했다. 꿀이 적게 쟁여져 있는 꿀장은 덜어 내고 꿀이 많이 쟁여진 꿀장으로만 꽉꽉 붙여 주고 꿀장 양옆에 보온재를 넣어 꿀벌들의 공간을 줄여 주는 것이다. 그러고는 꿀장 위에 보온재를 덮어 주고 꿀통 밖에도 보온덮개를 덮어주는 작업까지 끝냈다.

12월에는 바닥에도 솜이불을 깔아 주고 보온덮개를 더 두툼하게 싸매 주어 바람이 벌통 사이로 들어가지 않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빗물과 눈 녹은 물이 스며들지 않게 방수천을 덮어 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주는 것이다. 그렇게 월동 준비가 완벽하게 갖춰지고 나면 우리 부부는 내년 봄에 많은 벌들이 잘 깨어나 주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봉장을 둘러볼 테지.

(꿀을 사고 싶은 분은 연락 주세요. 이순이 010-4238-2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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