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불을 지펴 온 '한미 FTA 재협상론'이 수면 위로 급부상했기 때문. 한미 FTA 협상 자체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명박 정부의 '전략적 사고의 부재'가 또 다시 도마에 올랐다.
"선거 때는 무슨 말을 못하겠느냐"던 대통령의 무지 혹은 오판
실제 한미 FTA를 둘러싼 미국 전·현 행정부의 미묘한 입장차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진은 애써 외면한 채 '조기비준론'만을 되풀이해 왔다.
지난 해 말 G20 금융정상회의 참석자 미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오바마 당시 당선인의 'FTA 반대론'을 두고 "선거 때는 무슨 말을 못하겠느냐"는 식으로 의미를 깎아내렸던 대목이 대표적 사례다.
▲ 이명박 대통령은 오바마 당선인의 'FTA 반대론'을 두고 "선거 때는 무슨 말을 못하겠느냐"는 식으로 의미를 깎아내렸었다. ⓒ뉴시스 |
이 대통령은 "아직 오바마 정권인수팀의 한미 FTA 검토준비가 완료돼 있지 않기 때문에 언론이 오바마의 선거운동 당시 발언(자동차 재협상)을 확대해석하거나 너무 앞선 추측보도를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도 했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한미 FTA 관련 언급이 '선거용 발언'일 뿐이라는 이 대통령의 판단은 보기 좋게 빗나간 셈이다.
미 대선 직전까지도 이 대통령과 매케인 후보 측 인사들의 면담을 주선하고, 부시 전 대통령이 청와대 참모진에게 보낸 편지를 스스로 공개하는 등 '부시 프랜들리'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 줬던 청와대는 오바마 당선 직후에는 "한미 FTA와 관련한 전·현 행정부의 입장 차이는 없다"는 식의 언급만을 되풀이해 왔었다.
여당도 마찬가지였다. 한나라당 박진 의원을 단장으로 한 방미단은 지난 해 11월 미국을 방문한 뒤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이번에 만난 미국 측 인사 중 한미FTA 재협상을 거론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라며 "미측 인사 대부분은 미 의회가 반드시 비준할 것이라고 말했다"며 낙관적인 전망만을 늘어놓았다.
여기에 FTA만 비준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식의 'FTA 만능론'은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의 한미 FTA 비준안 강행상정으로 이어졌고, 여당의 이같이 조치는 국회의 파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결국 미국 새 행정부 전반에 흐르는 재협상 기류를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황 대응력 부족', 오바마 행정부와의 주파수 조율은 외면한 채 떠나는 부시 전 대통령만을 바라보며 입맛만 다셔 온 '전략적 사고의 부재'가 다시 한 번 확인된 셈.
가시화되는 '재협상론'…MB정부는 여전히 "미국이 그럴 리 없다"
더 큰 문제는 미국발(發) 재협상 기류가 급부상한 현재 시점까지도 청와대, 정부, 여당의 '방향 전환'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론 커크 USTR 대표 내정자의 발언 이후에도 정부와 여권 관계자들은 "그것은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이 아니다"는 식의 의미축소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11일 "새 정부의 공식입장이라고 볼 수 없으며 재협상을 요구했다고 해석할 발언도 아니다"며 "재협상이나 추가협상이 없다는 정부 방침에 변함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외교통상부 안호영 통상교섭조정관도 정례 브리핑에서 "(어제 청문회는) 한미 FTA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하는 자리가 아니였다"면서 "커크 내정자가 정식 취임하게 되면 과거 미 행정부 사정이나 한국 입장을 듣고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그는 "한미 FTA는 양국의 이익이 잘 반영된 협정인 만큼 가능한 한 빨리 비준돼 양국 업계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조기비준론'을 되풀했다.
청와대는 이와 관련한 공식적인 발언을 자제하면서도, 같은 방침을 재확인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전날 "인준청문회 발언에 대해 청와대가 공식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면서 "상황을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이 관계자는 "한미 FTA는 양국의 이익을 균형 있게 반영한 것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조속히 발효하는 것이 좋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재협상 '이후' 준비하고 있나?
이와 관련해 한신대 이해영 교수는 "재협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단언하면서 "우리 정부는 하루라도 빨리 재협상을 기정 사실화하고, 재협상을 통해 어떻게 독소조항을 걷어낼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조기비준론을 굽히지 않고 있는 청와대와 여당에 대해서도 이 교수는 "순진한 생각"이라고 일축하면서 "미국 행정부의 입장이 '재협상'으로 굳어진 상황에서 한국 국회의 조기비준은 결코 미국에 대한 압박으로 작용하지 않을 것이며, 거꾸로 '제국의 역린(逆鱗)'을 건들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목을 매고 있는 '조기비준론'이 한미 FTA 협상 자체를 무위로 돌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요즘 보면 정부와 한나라당이 반(反)FTA론자들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한편으로는 우리 국회에서 한미 FTA 비준안을 먼저 통과시킬 경우 오히려 재협상 카드를 지렛대로 삼아 독소조항을 제거하거나 추가 양보안을 얻어낼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시킬 수밖에 없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미국 측이 의회비준 여부를 무기로 자동차나 쇠고기 등과 관련된 추가적 요구를 앞세울 경우 이미 국회에서 비준절차를 마친 한국 정부는 '무조건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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