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안타깝게도 우리 박근혜 대통령은 왜 매주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는 평화적인 시위에 전국적으로 그렇게 많은 국민이 모이고, 왜 국회에서 그렇게 압도적인 다수가 자신에 대한 탄핵소추를 의결할 수밖에 없었는지 아직도 그 까닭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세 차례에 걸친 담화나 마지막 국무회의 간담회에서의 발언, 그리고 막판에 단행한 국민통합위원장, 인권위 상임위원, 민정수석 등에 대한 인사조치를 보면 그 오기와 철면피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두 달 가까이 '대통령 박근혜'와 관련한 음습한 소식들을 들으면서 국민들은 너나없이 더할 수 없는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누구 말대로 너무도 같잖은 인물이 박근혜 뒤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사실에서 국민은 참담한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통령 박근혜가 최순실과 같은 급이었고, 정권 자체가 사실상 최순실‧박근혜 공동정권이었다는 증언을 들으면서 그 모욕감은 절정에 달했다.
아는가, 이 참담한 국민의 모욕감을
최순실이 '보안 손님'으로 출입증도 없이 청와대에 들어가 문고리 3인방과 회의를 하고, 국무회의와 수석비서관 회의일정과 대통령이 할 말까지 점검했다니, 장관과 수석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받아 적었던 것들이 필경은 최순실의 말씀이었을 것이다. 차(車) 아무개가 추천하는 그의 대학 시절 지도교수가 갑자기 장관이 되고 그 외삼촌이 수석이 되었으니, "이게 나라냐"는 울분 어린 탄식이 나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정호성의 음성 파일만 공개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행세하던 왕실장은 이제와 발뺌과 모르쇠로 일관하고, 그토록 대통령의 총애와 보호를 받던 민정수석은 청문회 출석요구 우편물을 받지 않기 위해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뺑소니 법률 미꾸라지 행각으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근혜, 최순실을 뒤에 두고 국정을 쥐락펴락 농단했던 그들이 실상은 하찮은 쥐새끼들에 지나지 않았는지 국민은 더할 수 없는 치욕감을 느낀다.
박근혜 정권 4년 동안 이 정권 안에는 "이래서는 안 된다"고 간(諫)하거나 "이럴 수는 없다"고 항거한 사람이 오직 유진룡 전 문화체육부장관 한사람뿐이었으니, 박근혜 정권 안에는 온통 간신과 내시만 있었더란 말인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된 황교안 국무총리를 비롯한 내각은 국회로부터 탄핵소추를 받은 박근혜 대통령과 공범관계에 있거나, 적어도 대통령을 잘못 보필한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그들이 사과 한마디 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4‧19혁명 당시만 해도 그해 4월 21일, 전 국무위원이 일괄사표를 제출했다.
블랙리스트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박근혜 정권 4년은 역사를 거슬러 역행하는 기간이었음에 비추어, 무엇보다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시급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작업과 1만여 명에 달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다. 시대에 역행하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자체도 문제이지만, 정권의 그릇된 역사 인식의 강요가 더 큰 문제다. 일례로 검토본에 나온 제주 4‧3사건 기술은 2003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사건의 정의조차 외면하고 있다.
유신시대의 망령인 블랙리스트가 대명천지 21세기에 작성되었다는 사실이 박근혜 정권에 의한 역사의 역주행을 증언하고 있다. 타계한 김영한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문화예술계의 각종 좌파 책동에 투쟁적으로 대응", "영화계 좌파인식 네트워크 파악 필요" 등 색깔론으로 각색한 나치식 문화 탄압을 비서실장 김기춘 등이 지시한 사항이 적시되어 있다.
헌법은 물론 민주주의의 본질을 훼손, 유린한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진실은 끝까지 추적해 그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온 세계가 부러워하고 칭송해 마지않았던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말짱 빈껍데기, 도로아미타불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가져온 이 대한민국의 치욕, 떨어진 국격과 그리고 그로 인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지금은 국민의 촛불이 막아내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지금 건곤일척의 시험대 위에 올라있다. 오늘의 사태를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위상과 수준이 새롭게 설정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제까지와 같은 구차한 변명보다는 그동안 국민으로 하여금 비탄과 우울과 치욕에 빠뜨리게 한 역사적 죄과와 무능을 솔직하게 국민 앞에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제 발로 떠나길 바란다.
이형기 시인이 <낙화>에서 노래한 것처럼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이며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최고의 애국이자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도리이다. 그리하여 국민의 마음속에 그에 대한 한 가닥 연민이라도 남겨질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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