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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장애인도 자기 생활에 책임질 줄 압니다"

<전태일통신 7> 장애인 자립생활

1996년, 저는 집안의 경제사정 악화로 강원도 철원의 모 장애인 요양원으로 저의 삶터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 나이 27세, 몸이 멀쩡했다면 한창 일할 나이였죠. 하지만 전 중증의 뇌성마비 장애인이었고 당시 저의 짧은 생각으론 거기밖에 갈 데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많은 장애인들을 만났고 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7년을 살았습니다.

***시키는대로만 했던 장애인시설 생활…아무도 나의 생각을 묻지 않았다**

처음 그곳에 입소했을 때, 저는 어리석게도 장애인은 의례 그렇게 살아야 되는가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밥을 주면 주는 대로 먹고, 자라 하면 시키는 대로 자야 하고, 깨우면 일어나기 싫은데도 일어나야 하고, 장애인들은 항상 열등한 존재이며 부족하기에 비장애인들의 동정과 시혜 속에 시설에 수용되거나 가족들로부터 보호받아야 되는 그런 존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입소 이틀 후, 보모 손에 이끌려 강제로 머리를 깎여도 항의조차 못했고, 어느 날 아침, 우리 방에서 함께 자는 자폐장애를 가진 어린 친구가 세수를 하고 나와 보모의 수건으로 얼굴을 닦다가 보모에게 걸려서 단지 자신의 수건을 썼다는 이유로 흠씬 두들겨 패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마음만 아파해야 했습니다. 다른 시설에서 나이가 찼다는 이유로 본인들의 동의절차도 없이 소풍간다는 말에 속아 그곳으로 옮겨온 장애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육체적 장애를 갖고 있기는 했지만 정신적으론 누구보다 건강한 사람들인데도 이들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런 시설을 운영하는 자들의 시설 비리를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은 이미 여러 군데에서 터져 나온 터이고, 저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시설 속 장애인들의 인권을 말하고 싶습니다.

***일년 내내 똑같았던 일과…누가 그 생활을 견딜 수 있을까?**

제가 있던 시설에는 거의 500명의 장애인들이 입소해 있엇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정신적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었고 저와 비슷한 장애 유형도 약 10% 가까이 됩니다. 우리들의 하루 일과는 아침 6시 기상, 7시 30분 아침식사, 12시 점심식사, 5시 30분 저녁식사, 7시 취침입니다. 이것이 500명 규모 시설의 하루생활입니다. 그곳의 장애인들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생활합니다. 이들에게 개인 시간은 없습니다. 봄과 여름철엔 일광욕 시간이 있는데 이것도 단체적으로 행해지는 연중행사일 뿐입니다.

1년 12달 매일의 하루 일과가 이런 식으로 똑같다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들까요? 아마도 거의 돌지 않을까요?

며칠 전 그곳 시설에서 생활하는 한 장애인이 저희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셨는데, 평소 시설에 있을 때 친분이 있던 터라 함께 여의도에 가서 놀다가 하룻밤 더 묵고 들어가시라고 제가 권유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갑자기 시설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그곳에서 전화가 왔는데 왜 빨리 안 들어오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분 말이 외출증을 끊을 때 오늘 날짜로 끊었고 나올 때 함께 데리고 나온 정신지체인 친구 때문에라도 빨리 들어가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부랴부랴 자원봉사자를 구해 저희 센터의 장애인 리프트가 장착된 차로 모셔다 드렸는데…. 철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의 그분의 표정이란…. 마치 몇 년만에 외출나갔다 돌아가는 무기수처럼 그 분의 얼굴엔 어둠이 드리워 있었습니다.

장애인 생활시설의 존재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오갈 데 없는, 사회에서 일도 못하고 아무 쓸모도 없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수용하는 곳인까요?

***우리나라에선 장애인으로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불행의 시작**

감히 말하건대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으로 태어난다는 것 자체부터 그 장애인에겐 불행의 시작입니다. 저는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남들 다 받는 의무교육도 받지 못했고 외출 기회조차 27년간 재가장애인으로 살아 오는 동안 1년에 한번이 될까말까였습니다. 그 뒤 7년이란 세월을 장애인 시설에서 옥살이 아닌 옥살이를 했습니다. 전 그곳에서 장애의 아픔을 느꼈고 차별 또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비롯한 장애인들의 삶이 고작 이것뿐인가란 푸념도 수없이 했습니다.

TV에 나오는 교도소의 풍경과 제가 살던 시설의 풍경이 흡사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교도소에는 수인번호라는 게 있어서 수인의 앞가슴에 붙이고 있는데 우리들도 방번호를 앞가슴에 붙이고 다녔고 머리 역시 수인들처럼 남녀 구분 없이 짧은 커트를 쳐야 했습니다. 그래야 머리 감기기 좋다나 뭐라나 하면서 말이죠.

어째서 이렇게 우리 장애인들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요?

시설은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모든 장애인들을 획일화 시키려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들을 보다 손쉽게 관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누구나 각자의 소질과 재능이 있고 하늘이 부여해 주신 능력들이 각자에게 다 존재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시설에서 그것을 확실히 느꼈습니다. 저와 함께 살았던 시설의 제 동료들도 하늘이 부여해 준 저마다의 재능과 소질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제 동료들의 그런 재능들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장애라는 베일에 가리워진 그들의 재능과 소질은 시설 속에서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있습니다.

***만약 스티븐 호킹이 한국에 태어났더라면…**

저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이런 질문을 합니다. 만약 스티븐 호킹이 우리나라 사람이었다면 그가 지금처럼 저명한 과학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불행하게도 그는 어는 산골 장애인 시설에서 반짝하고 나타났다 신기루처럼 사라졌을 겁니다. 왠지는 여러분이 저보다 더 잘 아실 겁니다.

원석이 아무리 좋고 뛰어나도 그것을 개발하고 다듬지 않는다면 보석으로서의 가치는커녕 그저 하나의 돌로만 남겨질 뿐이겠죠. 그렇게 시설은 개인의 개성과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입소 후 1년간은 시설의 시스템대로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조로운 생활을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전 시설 시스템에 대한 가벼운 도전을 하기로 결심했고 그에 대한 첫 단추로 글을 창작하며 이런 단조로운 일상에서의 반란을 꿈꾸었습니다. 또 다른 대안을 찾아보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였습니다. 시간이 흘러 저는 그곳에서 시인으로 알려졌고 사무실에서도 저의 노력을 귀엽게 봤던지 작은 공간을 마련해 주고 문예창작 동아리 운영을 한번 해보라며 컴퓨터를 한 대 놓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손님이 올 때마다 저를 소개하며 시설 홍보하는 데에 활용하더군요. 저는 그 공간을 반란의 공간으로 활용하였습니다. 저는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가 필요했고, 그래서 문예창작 활동에 필요하다는 구실로 자비로 전화를 놓고는 컴퓨터에 모뎀을 달아서 인터넷을 시작했습니다.

IL(Independent Living 장애인자립생활)이 뭔지도, 노말라이제이션(normalization)이 뭔지도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되었고 외국의 사회복지 체계에 비추어 우리나라의 복지가 경제 수준에 비해 상당히 미달된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2003년 저와 절친한 전도사로부터 장애인자립생활 지도자대학 수강 공모 메일을 받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저는 시설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33년만에 처음으로 해본 자립생활…모든 것이 새롭다**

피노키오자립생활센터에 입소해서 첫 번째로 해본 일은 지하철을 타는 것이었습니다. 33년 동안 저는 한 번도 지하철을 타본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처음 해 본 일이 어디 지하철뿐이겠습니까? 체험실에서 센터 식구들과 함께하며 노래방도 처음이요,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셔본 것도, 동료들을 따라서 집회에 나간 것도, 가게에서 스스로 물건을 사고 값을 지불한 것도 33년만에 처음이었습니다. 비장애인들은 눈 뜨면 늘상 하는 일들을 33년 동안 몸에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하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것이 과연 저만 못해본 것들이었을까요?

센터에서 활동간사로 일하면서 중증의 적지 않은 재가 장애인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얘기해보면 한결같이 저의 33년 이전의 생활과 다를 바 없는 생활들을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세상에 두려움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의 욕구들을 억제시키며 자신이 움직이면 가족들에게, 또는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피해의식 속에 자신을 가둬놓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을 누가 가둬놓았나요?

우리나라 사회는 우리의 동료들을 죄인 아닌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거리에선 높다란 턱과 계단이 즐비하고 건물들은 대부분 저와 같은 휠체어 탄 장애인들에겐 접근조차 허용치 않는 건물구조입니다. 버스도 탈 수 없고(서울에 저상버스가 다니지만 가뭄에 콩나듯 다니죠) 서울에선 그나마 장애인 콜택시라도 있어서 1시간이고 2시간이고 기다리면 오지만 지방에선 이마저도 없는 실정입니다.

엊그제 우연히 국회방송에서 장애인 특별소위 위원장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나라에 장애인 복지예산이 전부 6000억(8000억이던가?) 원이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꽤 많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나라 전체 예산에 0.06%밖에 안 된답니다.

이런 금액 중 장애인 생활시설에 투입되는 돈이 얼만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과반 금액 이상이겠지요. 그러나 장애인 생활시설 속 장애인들의 삶은 여전히 최악입니다. 가족들의 보호를 받는 재가 장애인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우리나라의 장애인들은 언제까지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아가며 살아야 합니까.

***나의 선택과 결정에 내가 책임진다**

저는 지금 현재 동대문구 소재 피노키오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간사로 일하며 33년간 배우지 못한 인생의 모든 것과 장애인자립생활을 배우고 있습니다. 자립생활의 핵심은 장애인 당사자의 자기 선택과 결정, 그것의 결과에 대한 자기 책임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회는 장애인 당사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선택과 결정들을 장애인을 책임지고 있는 가족들과 그 장애인을 수용하고 있는 관리자에게 맡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애인 당사자는 좋건 싫건 가족들과 관리자의 일방적인 의견을 따라야 했습니다.

장애인 자립생활은 가족과 관리자에게 맡겨진 장애인의 권리를 장애인 당사자에게 되찾아 주자는 이념입니다. 저는 지금 그 이념대로 생활하며 행동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은 장애인 연금도, 활동보조인 제도도, 이동권도, 시설에 대한 접근권도 우리나라에 도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이 힘들고 어려운 일들도, 위험한 일들도 많지만 새로운 장애인 복지제도인 장애인자립생활(IL)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작은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 자체가 저에겐 참 행복한 도전으로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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