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이 지고 밝아오는 달을 서양에서는 '야누스 달(January)'이라 한다. 대문(ianua)을 지키는 우리네 '문간대신'이 집 안팎을 한꺼번에 살피듯, 야누스신은 머리 하나에 얼굴 둘을 하고 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내다보는 형상으로 숭배를 받아왔다. 한겨레 역사의 중대한 갈림길에서 올바로 새달(正月)을 맞으려면 우리도 병신년을 잘 털고 가야겠다.
헌법상 주권재민(主權在民)을 표방하는 민주공화국에서는 국민이 나라의 주군이고 공무원은 신하다. 5년 임기로 최고위에 뽑아 앉힌 공무원이 사익을 위해 권력을 휘둘러 국정을 농단하였으니 삭탈관직은 의당하고, 그의 외교가 국운을 위태롭게 만들었다면 더 중형에 처해야 마땅하다. 조선에서는 금부도사가 사약을 가져오면 죄인은 머리를 풀고 큰절을 한 후에 약사발을 비웠다.
퇴임 후를 열심히 챙기면서
연산군을 내몰고 중조반정을 주도한 세력들의 전횡을 보다 못해 '사림혁파'를 도모하다 기묘사화로 내몰린 조광조. 자기를 중용하고 총애했던 임금에게서 사약을 받고서 "선비로 태어나 이 세상에 살면서 믿는 것은 오직 임금의 마음뿐입니다. 국가의 병통이 모두 사사로이 이익을 추구하는 이원(利源)에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라의 맥을 새롭게 하여 무궁하도록 하고자 했을 따름이지 다른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해명하면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최근의 대국민담화에서 박근혜는 "오로지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모든 노력을 다 해왔고 단 한 순간도 저의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지금 벌어진 여러 문제들 역시 저로서는 국가를 위한 공적인 사업이라고 믿고 추진했지만 주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라는 어투로 조광조를 거듭 흉내 냈지만, 최순실을 하수인으로 세워 설립해온 저 모든 단체들과 대기업 수탈이 퇴임 후 일신의 영달을 위한 장치임은 요새 시위대의 단상에 올라와 기염을 토하는 '초딩'(옛말로 '삼척동자')도 짐작하는 일인데…. 이 얘기는 특검에 맡기자.
필자가 현 정권에 장탄식한 까닭은 '친일파의 커밍아웃'에 있었다. 해방되자마자 미군정에 붙어 기득권 유지에 성공한 친일부역자들, 반공을 내세워 제주와 여순을 비롯 6·25 전후 국민 100만을 죽이고도 여전히 득세하는 반민족세력, 4·19혁명정부가 들어선 그날부터 5·16군사반란을 음모했고 10·26정변을 5·18군사반란으로 다시 뒤집어엎은 반민주집단! 그래도 몇 해 전까지는 낯부끄러운 시늉은 했다. 조상이 친일인명사전에 오르면 "사실이 아니다"라거나 "당시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면서 본인들은 애국자인 척이라도 했다. 그런데 다카키 마사오의 딸이 다시 권력을 쥐자 국민의 내장 깊숙이 숨어 자양분을 빨아오던 기생충들이 제 세상 만난 듯 일제히 밖으로 기어나와 나라를 통째로 갉아먹는 형국을 보였다.
예컨대 박근혜의 대일 외교는, 필자의 짧은 실무경험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국익 도모라는 호혜원칙마저 깨뜨려, 헌법 84조에 명기된 "내란 또는 외환의 죄" 혐의를 받고도 남겠다. 배상금도 위로금도 아닌 후원금 몇 푼을 받고서 70년 넘게 나라의 체통이 걸렸던 '일본군위안부문제'를 단번에 합의했다. 그것도 합의문을 숨긴 채로!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외교의 근간으로 보면 한반도 안보에 가장 두려운 나라와 '군사비밀정보의 보호에 관한 협정'마저 서둘러 맺었다.
외교는 국익을 외면해
군대 다녀온 남자들 눈에는, 사드가 설치되는 성주는 중국의 장거리미사일 공격에서 오로지 일본(멀리는 미국)을 지켜주는 전략지점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국민 절반이 모여 사는 수도권 방어를 포기하면서까지! 북한의 자동붕괴로 '통일 대박'을 노린다면서도 언제 붕괴될지 모를 북한 영토를 국군이 접수하게 만들 전시작전통제권을 마다했다, 미군이 돌려주겠다는데도! 딴 나라가 우리 영토 절반을 점령하더라도 수수방관하겠다는 말인가? 그러니 중등학교 국정교과서 단일화는, 그런 사태에 국민이 눈감게 만들려는 술수로 보일 밖에!
서기 42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사로잡힌 카이키나 파이투스가 로마로 압송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근위대장이 단검을 들고 찾아왔다. 비록 역적이지만 참수당하는 욕을 보지 말고 자살하라는 선처였다. 검을 쥐고 벌벌 떨던 남편의 손에서 부인이 칼을 빼앗았다. "정숙한 아리아는 자기 가슴을 찌르고 칼을 뽑아 남편에게 건네며 한마디 남겼다. '아프지 않아요, 파이투스(non dolet, Paete)!'" 남편이 어명을 어겨 멸문의 화를 입지 않을까 여자는 두려웠다. 역사가 플리니우스가 전하는 일화다.
이미 식물 정권으로 전락한 박근혜가 기득권 세력에게도 용도 폐기되었음은 보수 언론들이 먼저 내비쳤다. 광화문 광장에서 내려진 국민의 교시를 보고 "근혜양, 아프지 않아요!"라는 전갈을 담아 청와대에 은장도를 서둘러 보낸 것도 보수 언론이었다. 딸한테마저 부모의 비운이 닥친다면 모두에게 역겨운 일이어서 그래도 국민이 베푼 선처마저 끝내 외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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