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열 씨의 "위기의 보수, 쇠퇴하고 허물어진 정신의 허울부터 벗어야"란 제목의 지난 2일 <조선일보> 칼럼이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다. 이 씨는 "위기의 대한민국…'보수의 길'을 묻다"는 연재물의 5번째 화자였다. 그의 칼럼은 광화문 광장의 촛불 집회를 북한의 아리랑 축전에 비유하고 촛불의 민의를 폄훼해 지탄을 받았다.
논리 전개나 사태 인식에 문제가 있지만 나는 이문열 씨의 진단이 '일정 부분' 옳다고 판단한다. 이 씨 칼럼의 논지는 칼럼의 결어에 해당하는 마지막에 있다.
"죽어라, 죽기 전에. 그래서 진정한 보수의 가치와 이상을 담보할 새로운 정신으로 태어나 힘들여 자라가기를. 이 땅이 보수 세력 없이 통일되는 날이 오기 전에 다시 너희 시대를 만들 수 있기를."
공 들여 쓴 마지막 단락에서 나는 보수주의에 대한 이 씨의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 애정이 애국심과 연결되는지는 논외로 하고, 소위 현 보수 진영의 활로에 관한 해답으로는 매우 정확하다. 이 씨의 엄숙한 권고대로 이른 바 보수 정치인들은 지금 죽어야 한다.
"죽어라, 죽기 전에"는 민의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 전에 스스로 죽어야 하며, 그래야 살길이 열린다는 충언이다. 이정현, 서청원 등 폐족을 모면하려 발버둥치는 친박이나, 김무성, 유승민 등 이 국면에서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려고 탄핵 전선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비박이나 모두 새겨들을 얘기다. 그들이 살려면 죽어야 한다.
물론 친박이나 비박을 막론하고 박근혜 정권에서 헌법 파괴에 가담하거나 주도한 부역자들에게도 죽어야 사는 역설의 생존법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다만 그들은 역사적으로 반민 특위가 와해되는 과정을 목격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제 부역자들이 권력을 기반으로 어떻게 민의를 거슬러 생존하였는지를 학습하였다. 그래서 3일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훨씬 넘은 국민이 나선 상황 속에서도, 광장과 촛불의 민의가 향후 전혀 새로운 도정을 찾아내지 못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반복할까 두렵다. 박근혜 씨와 그 핵심 부역자들을 정의롭게 처리하지 못하고 광장의 촛불이 민주주의의 패배의 상흔으로 기억될까 두렵다.
이문열 씨가 적어도 보수의 그런 사악한 생존을 염두에 둔 것 같지는 않기에, 이 씨와 다르게 생각하는 나보다 기이하게도 오히려 사태를 긍정적으로 보는 듯하다.(이 씨에게도 '긍정적'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또한 이 씨가 보수의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미래를 우려하는 나보다는 확고한 전망을 지닌 듯하다. 그는 현존하는 보수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면서 "진정한 보수의 가치와 이상을 담보할 새로운 정신"을 가진 미래의 보수를 축원한다.
그러나 이 씨의 논법에는 B급 헐리우드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한 비약과 무분별한 상상력이 눈에 띄는데, 그게 어쩌면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 노작가의 한계일 수 있겠다. 나름 인정할 만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보수적'이지 않다. 굳이 그 부적절함을 이 자리에서 반복하지 않겠지만 가장 문제가 된 북한 아리랑 축전 비유는 칼럼의 엄숙한 결론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100만, 200만의 촛불이 민의가 아니라는 인식 또한 어이가 없다기보다는 그 논리 구조가 흥미로다. 광장에서 촛불을 든 100만 명은 4900만 명과 배치되는 집단이 아니라, 5000만 명의 국민 중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96%를 모집단으로 한 표본 집단으로 간주된다. 통계적으로 엄밀한 표본 추출은 아닐지 모르지만, 100만~200만의 표본은 통계적으로 100% 신뢰할 수 있다. 촛불은 민의라는 상식은 어떤 궤변으로도 부인되지 않는다.
이문열 씨는 일견 점잖게 들릴만한 다음과 같은 지적을 내어놓는다.
"무엇에 홀린 듯 여성 대통령의 미용이나 섭생까지 깐죽거리며 모욕과 비하를 일삼다가 그것도 특종이랍시고 삼류 도색 잡지도 다루기 낯간지러운 사생활에 대한 억측과 풍문을 무슨 큰 폭로라도 되는 것처럼 뉴스로 쏟아내는 매스컴…무슨 교수, 무슨 평론가, 무슨 전문가 해서 풍채 좋고 언변 좋은 양반들이 온종일 종편이 펼쳐준 좌판에 몰려 앉아 대통령 속곳까지도 슬쩍슬쩍 곁눈질하며 최가네 일족 잡상스러움을 시시덕거리거나, 문고리 몇 인방이니 친박 개박 매화타령 하며 킬킬거리는 모습이 보기 민망스럽다."
앞으로 진실 규명을 통해 밝혀지겠지만 언론 보도나 세간의 지적 중 일부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날 수 있다. 더러 불편한 접근 방법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미세한 오류나 불편이 이미 확인된 거대한 부패와 거짓에 대한 분노를 부정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이문열 씨는 자신이 말한 "낯간지럽고 민망한" 바로 그 방법으로 촛불의 민의를 훼손한다.
민망하고 낯간지러움을 넘어서 이문열 씨의 인식에서 근원적인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대목은 가치의 부재이다. 칼럼에서 이 씨는 "하지만 이 또한 어찌하랴. 그 촛불이 바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성난 민심이며 또한 바로 '국민의 뜻'이라는 것은 지난 한 달 야당의 주장과 매스컴의 호들갑으로 이제 누구도 쉽게 부인할 수 없는 논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촛불의 성난 민심은 야당의 주장과 매스컴의 호들갑에 의하여 마련된 논리이며 그것이 '국민의 뜻'으로 통용되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수용하여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여기서 이 씨의 민의는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특정한 세력이나 집단에 의해 안출된다.
이 씨에게는 지식인에게 요구되는 역사인식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같은 게 없다. 지금 상황이 권력 투쟁과 정치 공학적 관점에서만 이해될 뿐이다. 그래서 그는 '보수의 위기'를 민감하고 일견 정확하게 감지해내지만 '국가와 사회의 본질적 위기'에는 무감각하다. 어쩌면 그의 사고 체계 안에서 국가나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구성되며 그는 지배 블록의 일원으로 지배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가 가치를 말하지만 그 가치는 지배와 이익만을 의미하는 전혀 다른 용어임이 확실하다.
그런데도 '보수의 위기'에 대한 그의 진단은 '보수'에 관한 한 분명 정곡을 맞힌 것이다. 만일 국가와 사회의 위기에 관한 인식을 추가하며 죽기를 감당하는 어떤 '보수'가 나온다면 그게 "가치와 이상을 담보할 새로운 정신"으로 무장한 이문열식 보수가 될지, 다른 무엇이 될지 모르겠지만 보수는 위기를 뚫고 부활할 것이다. 물론 이 땅에 죽음의 의식을 통해 살려내야 할 엄밀한 의미의 보수세력이 있었냐는 근본적 질문이 제기되면 좀 맥이 빠질 수 있다. 내가 알기로 이 땅에 건강하고 의미 그대로의 보수는 아직 태어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안치용 교수는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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