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가 위기라고 한다. 2일자 <중앙일보>는 "반공·지역주의에만 기댔던 가짜 보수, 둑이 무너졌다"라는 기사를 냈다. 한국에선 자기 이념을 보수로 규정한 쪽이 늘 진보보다 많았다. 그런데 최근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이런 구도가 뒤집어졌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드러난, 한국 주류 보수 진영의 민낯 때문이다.
보수 매체의 보수 위기론…"'사이비 보수'의 실패"
<조선일보>는 "위기의 대한민국…'보수의 길'을 묻다"라는 기획을 진행 중이다. 보수 성향 지식인들의 발언을 소개하는 기획이다. 지난달 28일 발행된 첫 번째 기사에선 송복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를 인터뷰했다. 2일 게재된 다섯 번째 기사는 작가 이문열 씨의 글이다.
<조선일보>의 기획 기사, 2일자 <중앙일보> 기사 등의 요점은 송 교수의 인터뷰에 집약돼 있다. "지금의 위기는 보수(保守)의 실패가 아니라 '사이비(似而非) 보수'의 실패일 뿐"이라는 것이다. <중앙일보>가 거론한 '가짜 보수' 역시 송 교수가 말한 '사이비 보수'와 비슷한 개념이다.
일단 반가운 일이다. '사이비 보수', '가짜 보수'를 솎아내는 것, 그래서 보수가 거듭나는 일은 결국 진보에게도 이롭다. 보수가 건강해야 진보도 바로 선다.
이문열, '보수의 원칙'에 맞나?
하지만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보수 진영의 이런 자정 노력은 얼마나 믿을 만한가. 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이문열의 글은, 이 신문이 기획 기사 첫 번째 편에서 다뤘던 송 교수의 발언과 딱 맞은 편에 있다. 요컨대 송 교수가 말한 '사이비 보수'에 가까워 보인다.
지난달 28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송 교수는 말했다.
"보수에는 4대 원칙이 있다. 과거 경험을 중시하고, 끊임없이 잘못된 것을 보수(補修)하며, 도덕성이 높고, 성실하다는 점이다."
이문열 "4500만 중에 3%가 모였다고, 하야가 '국민의 뜻'이라 할 수 있나"
이문열 씨의 글은 이런 원칙에 얼마나 부합하나. 이 씨는 "보수여 죽어라, 죽기 전에… 새롭게 태어나 힘들여 자라길"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제는 매스컴이 스스럼없이 '국민의 뜻'과 혼용하는 광장의 백만 촛불도 마찬가지다. 지난번에 문재인 후보를 찍은 적극적 반대표만도 1500만 표에 가까웠고, 대통령 지지율 4%가 정확한 여론조사였다면 이 나라에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유권자만도 3000만이 훨씬 넘는다. 아니,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친다면 4500만도 넘는다. 하지만 그중에 100만이 나왔다고, 4500만 중에 3%가 한군데 모여 있다고, 추운 겨울밤에 밤새 몰려다녔다고 바로 탄핵이나 하야가 '국민의 뜻'이라고 대치할 수 있는가. 그것도 1500단체가 불러내고, 매스컴이 일주일 내 목표 숫자까지 암시하며 바람을 잡아 불러 모은 숫자가, 초등학생 중학생에 유모차에 탄 아기며 들락날락한 사람까지 모두 헤아려 만든 주최 측 주장 인원 수가."
문장이 중언부언해서 선뜻 이해하긴 어렵지만, 요약하면 이렇다.
한국인 가운데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는 이들은 약 4500만 명이다. 요컨대 이 씨는 박 대통령 지지율이 4%에 불과하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리고 4500만 명 가운데 3%인 100만 명이 거리에 나왔다고 이야기 한다. 다만, 3%가 거리에 나왔다는 사실이 '국민의 뜻'이 하야 또는 탄핵이라고 주장할 근거는 아니라는 게 이 씨의 주장이다.
불성실, 혹은 부도덕
앞서 송 교수가 꼽은 보수의 4대 원칙 가운데 도덕과 성실이 있다. 이 씨의 주장은 이런 원칙과 거리가 있다.
일단, 성실하지 않다. 박 대통령의 하야 또는 탄핵이 '국민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건 근거는 단지 촛불 집회 참가자가 많다는 점만이 아니다. 여론 조사 결과를 봐도, 탄핵 찬성 여론이 압도적이다. '리얼미터'가 최근 진행한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탄핵 찬성 입장이 75.3%다.
이 씨는 박 대통령 지지율에 관한 여론 조사 결과를 알고 있다. 그런데 굳이 탄핵 관련 여론 조사 결과는 인용하지 않은 이유가 뭔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불성실이다. 어렴풋한 기억에만 의지해서 글을 썼다. 인터넷 검색을 하거나 신문을 뒤지는 정도의 수고조차 하기를 꺼렸다. 나머지는 부도덕이다. 여론 조사 결과를 고의로 취사선택하면서 억지 논리를 폈다.
송 교수가 꼽은 보수의 원칙에 비춰보면, 전형적인 '사이비 보수'의 행태다.
촛불집회가 아리랑 축전?
이 씨는 같은 글에서 이런 내용도 담았다.
"심하게는 그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와 일사불란한 통제 상태에서 '아리랑 축전'에서와 같은 거대한 집단 체조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더라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지난 주말 시위 마지막 순간의, 기계로 조작해도 어려울 만큼 정연한 촛불 끄기 장면과 그것을 시간 맞춰 잡은 화면에서는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고도 했다."
이런 글을 쓰려면, 한 번쯤은 촛불집회를 직접 관찰했어야 한다. 예컨대 보수 언론인인 조갑제 씨도 최근 '조갑제닷컴'에 촛불집회에 관한 글을 썼다. 조 씨 역시 촛불집회에 비판적이다. 그러나 조 씨는 촛불집회 현장을 직접 지켜봤다.
기자 역시 주말마다 촛불집회에 나갔다. "일사불란한 통제", "거대한 집단 체조의 분위기" 등은 아무리 양보해도 억지다. 당장 이 씨의 글 내용과도 상충한다. 이 씨는 같은 글에서 "초등학생 중학생에 유모차에 탄 아기며 들락날락한 사람까지 모두 헤아려 만든"이라는 표현을 썼다.
이 씨는 촛불집회 현장에 "유모차에 탄 아기"가 있었다는 점을 알고 있다. 들락날락한 사람이 많다는 점도 알고 있다. 이런 사실들과 "거대한 집단 체조"가 양립 가능한가? 아기가 집단 체조를 할 수 있나? 노점에서 닭꼬치를 사먹으며 들락날락하는 이들이 "일사불란한 통제"를 받았다는 건가?
글 써서 부자 된 이문열의 책임
이 씨가 쓴 짧은 글 안에서, 이런 모순은 곳곳에 있다. 그럴 수 있다. 평생 몸을 쓰며 살아온 이라면, 땀 흘려 벼를 키우고 기계를 고치며 살아왔다면, 그럴 수 있다. 짧은 글을 짜임새 있게, 논리적으로 쓰는 게 꼭 쉬운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씨는 평생 글만 썼던 사람이다. 쌀 한 톨 직접 생산하지 않고, 글쓰기만으로 부자가 됐다. 그러므로 이 씨의 글에는, 보다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야 한다. 왜냐고? 앞서 송 교수는 보수의 원칙으로 '과거 경험 중시'를 꼽았다. 전통을 중시한다는 뜻일 게다. '작가 이문열'은 대표적인 전통 옹호자였다. 글을 다루는 자들, 선비에겐 농민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게 우리네 전통이다.
이런 잣대에 비춰보면, 이 씨의 글은 너무 불성실하다.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았고,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문치 의식'의 최대 수혜자, 이제 내보낼 때
송 교수의 지난달 28일 <조선일보> 인터뷰는 이렇게 마무리 된다.
"문인(文人)들만 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는 '문치(文治) 의식'부터 하루빨리 버려야 한다. 요즘 말로 바꾼다면 인문·사회과학이나 법학을 전공한 인문계 지식인들이 될 것이다. 문관이나 문인들은 본질과 당위만 추구하다 보니 관념론에 빠지기 쉽다. 잘잘못이나 시시비비만 가리다 보니 상대를 끌어안기보다는 배제(排除)하기 바쁘다. 지금 필요한 건 관념론이나 비판이 아니라 난관과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긍정적 건설론이다. 국회의원을 공천할 때에도 군인·체육인 출신, 이공계 전문가, 인문계 지식인을 '3:3:3'의 비율로 골라야 한다."
<조선일보> 기자들 중에서 이런 주장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이 종종 지면을 내줬던 이문열 씨야 말로, 송 교수가 거론한 '문치 의식'의 대표적인 수혜자라는 점이다. 이 씨의 글은 사실 관계가 틀리고, 논리도 엉켜있기 일쑤였다. 단지 유명한 '문인'이라는 이유로, 너무 높은 대접을 받았다.
<조선일보>가 정말 '사이비 보수'를 솎아낼 생각이라면, 이문열 씨의 글부터 싣지 않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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