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은 지난 15일 장지량 전 공군 참모총장이 <국방일보>에 연재중인 회고록 가운데 실미도 사건과 관련된 대목을 입수해 보도했다. <국방일보>는 21일자에서 이 회고록 중 실미도 사건의 마지막 회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게재했다.
여기서 장 전 참모총장은 공군이 내륙 지역에서 운영하던 문제의 특수부대가 실미도로 옮아간 시점과 그 때를 전후해 부대의 성격이 바뀐 점, 그리고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남북 대화 국면에서 이 부대를 방치한 점 등을 구체적으로 증언하면서 이들을 '냉전과 데땅뜨라는 전혀 상반되는 상황이 낳은 희생자'로 규정했다.
이같은 의미있는 증언을 재록할 수 있게 해준 <국방일보> 측과 이 글을 구술정리한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편집자>
내가 듣기 거북해하자 미 314사단장은 이런 언질도 했다.
"아다시피 지금 우리는 월남전을 수행중이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또 전선이 분산, 확대됩니다. 이럴 경우 작전수행이 난처해지오. 두 전선을 감당할 수가 없소."
우리가 전쟁준비를 해나가는 사이에 미국은 합참회의를 통해 어느새 전쟁억지력을 발동해 우리의 동태를 감시하는 입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들은 북을 견제하지만 남의 호전성도 제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화가 치민 나는 그길로 공군본부 참모총장실 내 집무의자 뒤쪽에 간이침대를 마련하고 전화선을 모두 끊고 비상근무에 들어갔다. 때로는 전투비행단 벙커로 몸을 피해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자 그들은 정보망을 가동해 나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몰래 숨어다니고 그들은 결사적으로 나를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어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형국이 됐다.
내가 계획을 세운 공군 특공대는 미국 CIA도 처음에는 감지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막연히 우리를 의심하다가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던지 어느날부터 나의 모든 것을 미행 감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실 공군 특공대는 별도의 훈련이 필요 없었고 날짜와 시간만 정해주면 언제든지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전투조종사들은 정예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 머릿속에 이들의 면면을 담아두고 언제 어느 때든지 호명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미국 CIA도 감을 잡지 못하고 계속 내 주변만 맴돌았다. 중앙정보부가 차출해 공군에 보내준 특공대원 훈련도 순조롭게 진행돼가고 있었다. 이들 역시 언제 어느 곳이든지 출동하면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한편 71년 11월 5일 닉슨이 제37대 미국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닉슨은 대통령 집무 초기부터 키신저 국무장관을 내세워 분쟁지역간의 긴장완화와 현상유지 정책을 목표로 외교를 펴고 있었다. 이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미소중일의 협동체제 필요성을 강조한 닉슨 독트린의 반영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중국과 핑퐁외교(71년 4월)를 펼치면서 수교준비를 다져나갔고 한국에게도 남북화해를 유도, 남북 적십자회담 준비회담(71년 8월)과 남북고위급회담 준비회담 등 남북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갔다. 이런 때 김일성 숙소를 때려 부순다든지 124군부대와 관련한 보복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미국의 만류와 저지로 뜻을 이룰 수 없게 돼 있었다.
나는 68년 8월 전역, 공군 참모총장 직에서 벗어났지만(이로써 나는 특공대 훈련을 6개월 맡은 셈이었다) 후임 김성용 총장 재임 시절에도 특공대는 운영됐으며 70년 8월 그 후임인 김두만 총장 역시 이를 인계받았다. 특공대원들은 69년 말이나 70년 초 실미도로 옮겨간 것으로 알고 있다.
미국과 중국 간의 정치질서가 데땅뜨 분위기로 이행되면서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특공대의 위상이 달라지고, 그래서 그들에게 처우나 대접도 허술해졌을 수 있다. 훈련마저 느슨해지니 정신력도 해이해져 여기저기서 사고가 터졌을 개연성이 높다.
특히 김형욱 정보부장이 경질되고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 후임으로 들어서면서 특공대의 위상과 역할이 재고됐을 수 있다. 새 정보부장의 정보부 운영철학이나 개성이 다를 수 있고, 특히 이후락 부장은 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위해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오는 등 1년 전부터 밀사로 활약했던 만큼 북을 치기 위한 특공대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다를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특공대원들이 극도로 신변 불안을 느꼈을 수 있다.
야간 고공침투가 아니라 해안 상륙작전으로 임무 수행방법이 전환하면서 실미도로 훈련장이 바뀌고 (물론 이들에 대한 격리 차원도 있었을 것이다), 제대로 주부식이 보급되지 않는 등 처우가 허술한 데에다 목표가 사라진, 이른바 내일이 없는 불안한 나날을 살다보니 이들이 이윽고 실미도 난동사건(71년 8월 23일)을 벌인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당시 에티오피아 주재 한국대사로 근무하던 중 이 소식을 들은 나는 망연자실했다. 고공침투가 아닌 상륙 특수부대로 재편성하긴 했지만 부대원의 상당수는 68년 1.21사태 직후 중정에서 차출된 인원이었을 것이다. 임무수행 방법이 완전히 변질돼 공군 소속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지만 굳이 따지자면 연원이 고구마 줄기처럼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자괴감이 없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냉엄한 국제정치 질서의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하는 이른바 냉전과 데땅뜨 분위기의 와중에서 희생된 사람들이라는 안타까운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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