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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환경' 문제도 OECD 최하위권…위기 극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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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 '환경' 문제도 OECD 최하위권…위기 극복은

[민미연 포럼] 우리 사회의 다중적 위기와 그 극복을 위한 단상

- 젊은이들이 동식물조차도 기본적으로 누리는 연애와 출산을 포기하고 온 인류가 생태적 파멸을 고민하는 다중적 위기의 시대에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통령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른바 국정농단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접하고 있다. 따라서 누구 말마따나 국민들은 "몸을 추스르기 어려울 정도의 외롭고 슬픈" 상태에서, "내가 이러려고 국민을 했나 자괴감이 든다"라는 대통령 담화 패러디로 현재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더욱이 우리는 범죄자 무리들에게 우리의 생명은 물론 우리의 살림을 통째로 맡겨놓았던 것이 아닌가라는 섬뜩한 생각에 무어라 할 말을 잃을 정도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분노하면서도 우리 국민들은 비교적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심각한 문제들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한국은 총체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는 젊은이들이 한국을 자조적으로 일컫는 '헬조선' 이라는 말의 의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은 '지옥에 가깝고 전혀 희망이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3포세대'니, '5포세대'니, '7포세대'니 하는 말들이 회자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은 동물로서 존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연애', '결혼', '출산'조차도 포기한다. 이러한 삶은 기본적인 영양을 섭취하고 그나마 최소한 교배와 번식 정도의 호사를 누리는 동식물들의 삶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전매특허인 '희망'과 '꿈'마저도 포기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지나치게 자조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공신력 있는 기관의 여러 지표들을 보게 되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지난 18일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은 우리나라 경제·무역·사회 주요 지표들을 살펴본 '2016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라는 통계집을 발간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정보통신기술 등 일부 부문에서는 세계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삶의 질과 같은 주요 사회 지표들은 계속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올해 5월 발표한 '한국경제보고서(OECD Economic Surveys: Korea 2016)'에 의하면, 지난해 한국은 국내 총생산(GDP) 세계 9위에다가 세계 6위 수출 대국이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38개국 대상으로 한 삶의 질 지수는 2012년 24위였으나 2013년 27위로 떨어졌고, 올해는 28위로 하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살률도 여전히 OECD국가 중 12년째 부동의 1위로 전혀 개선이 되지 않고 오히려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1996년 15.2명에서 2014년에는 25.8명으로 늘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괴로운 세계 최고의 나라가 되어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 개선을 위한 노력이 별로 없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이밖에 우리나라는 낙태율 세계 1위, 산재 사망률 세계 1위, OECD 국가 중 결핵 발생률 1위, 대장암 발병률 1위, 간암 사망률 1위 등 다른 생명 및 환경보건 관련해서도 최악으로 알려져 있다.


OECD 보고서에 의하면 삶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도록 하는 지표인 '일과 삶의 균형' 부분에서도 한국은 38위인 터키와 37위인 멕시코에 이어 36위를 기록했다. 비정규직 문제나 불안한 노동시장 문제도 여전하다. 1년 미만의 단기근로자 비중은 32.8%로 OECD 주요 회원국 중 1위, 10년 이상 장기 근속자 비중은 19.7%로 OECD 주요 국가 중 꼴찌, 근로자 300명 이상 사업체의 고용 비율도 약 14%로 OECD 국가 중 꼴찌이다. '흙수저'와 '금수저'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에서 보듯이 소득불평등 및 쏠림현상도 세계에서 거의 최고로 심각한 상황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한국은 국제 투명성 기구 청렴도 평가에서 OECD 34개국 중 27위에 올라 있을 만큼 부정부패 또한 심각한 상황이다. 국가 최고 권력기관의 범죄혐의가 눈덩이처럼 점점 늘어가고 있는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듯 몇몇 보고서와 관련된 보도들을 두루 살펴보다보니 더욱 아쉬운 점은 여러 가지 삶의 열악한 상황을 보여주는 표징들이 세계적으로 상위권을 다투고 있음에도 상황은 개선되기는커녕 많은 부분에서 더욱 악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삶의 질과 관련한 문제는 우리에게 직접적이고 급박하면서 절실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에 대해 그다지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그러나 사실 이보다 더 급박하고 절실하며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의 특성이 복잡하고, 광범위하고, 간접적이고, 장기적이며 집단적이라는 연유로 사람들이 훨씬 더 관심을 적게 가지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환경문제다.


물론 OECD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역시 '환경' 부문에서도 예외 없이 최하위권이다. 37위로 최하위인 이스라엘에 이어 꼴찌에서 두 번째이다. 특히 환경 부문 중 '수질'은 26위에 머물렀고 '대기오염' 부문은 꼴찌였다.


여러 환경문제들 중에도 특히 대기 오염 문제와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나 지구적 기후변화 등의 문제는 국경이 없을 뿐 아니라 지구상에서의 우리 생존을 광범위하고 치명적으로 위협해 오고 있다. 인도에서는 대기오염으로 하루 3천 283명이 사망한다는 며칠 전의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은 중국 및 저개발국가가 모인 아프리카는 물론 영국과 같은 유럽 선진국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한 해 대기오염 때문에 사망하는 사람은 전 세계 사망자의 12%에 해당하는 700만명에 육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기와 대기가 국경이 있을 수 없겠지만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공기질 수준이다. 우리나라 공기질 수준은 세계 180개 국가 중 173위로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6월 9일 OECD의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대기오염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경우 대기오염 사망률이 2060년에는 OECD 회원국 가운데 최고가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변화들과 위기들에서, 특히 환경과 관련된 변화들과 위기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변화들과 위기들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변화의 속도를 정확하게 가늠하기는 어렵겠지만 혹자는 17-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던 시절의 10년 동안의 변화가 오늘날 1년 동안에 발생한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21세기에 80평생을 살면서 겪는 변화는 17-8세기의 800년에 해당하는 변화를 체험하면서 사는 꼴이라는 것이다. 혹자는 최근 100년간의 변화가 인류가 생겨난 이래 지난 100여 년 전까지 겪었던 변화와 맞먹고 지난 20년의 변화는 지난 100년의 변화와 맞먹는 수준이라고 말한다. 이는 대개 50대 이상 중년의 나이에 해당하는 세대가 어릴 적 우리 사회의 모습을 회상해보면 쉽게 어림해 볼 수 있는 속도이다.


게다가 문제는 이러한 속도가 앞으로 점점 더 가속화될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학자들은 "새로운 것의 수명은 점점 더 빨라지고 인류전체 역사에서 겪었던 위기나 기회가 21세기 앞으로 남은 몇 십 년 동안에 압축되어 다가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느 세대보다 더 많은 위기, 더 복잡한 위기, 더 광범위한 위기, 더 새로운 위기들을 우리의 일생에 있어서 거의 대부분 겪어보게 될 것이고 그 위기들은 지난 것들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라고 예상한다(세바시 622회 '에너지와 미래사회 변화 : New Wealth', 아시아미래인재연구소 소장 최윤식, 2015. 12. 15. 강연).


그런데 변화가 이렇게 가속화되고 다양하거나 압축되어 다가올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위기와 변화는 단편적이거나 지엽적이지 않고 광범위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하여 핵전쟁의 위협이나 환경위기와 같이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온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인류는 그러한 파멸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현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세대 인간들의 삶까지도 걱정해야 한다.


이렇게 보니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또한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전대미문의 문제들을 고민해야 할 운명에 처한 최초의 세대임에 틀림없다. 이렇듯 우리는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개인이나 가족 그리고 민족은 물론 온 인류와 미래세대 그리고 전 지구적인 차원의 파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러한 것들로 미루어보건대 지금이야 말로 진정한 '위기의 시대'이자 '격동의 시대'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 정치, 경제, 국방, 문화, 노동, 일자리, 복지, 보건의료 등등 어느 하나 가벼이 보아 넘길 것이 없다. 하지만 특히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환경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환경은 우리의 삶을 위한 여러 조건 중에서도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환경문제는 잘살고 못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또한 대기오염 및 지구적 기후변화의 문제를 비롯한 환경문제는 생존권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실제로 세계는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2015년 6월 18일에 발표된 가톨릭교회의 교황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는 더불어 사는 집, 곧 지구를 돌보는 데에 관한 것으로 6장 246항에 걸쳐 환경 문제를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성찰 하며 회개와 행동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엔도 현대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대응책을 고민하는데 그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UN은 "현재 인류 전체는 기후변화, 식량위기, 물 부족, 질병 등 많은 위기에 봉착해 있고, 이 같은 다중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공조가 절실하다"는 인식 하에 2015년 8월 지구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개발 목표인 '지속가능발전목표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를 발표했다.


그러나 세계가 이렇게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음에도 우리가 처한 상황은 암담하기 그지없다. 앞에서 본 각종 지표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삶의 질보다는 경제적 발전에만 목을 매고 있었던 것 같다. 국내 총생산 등 경제적 지표 중 일부는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으나 환경 및 생명관련 지표들을 포함한 삶의 질 수준에 대한 많은 지표들은 대부분 최 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그 지표가 개선되기보다는 악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가치가 전도된 사회임이 분명하다. 엄청난 돈을 벌어보겠다고 밤낮없이 무리하여 일만하다가 일찌감치 병들어 허망하게 죽어 가는 꼴과 다를 바 없다.


더욱 암담한 것은 작금의 국정농단사태를 보아하니 이러한 위기 극복을 주도할 사람들도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공공선이나 공공의 이익보다는 개인적 영달과 이권에 몰두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최고 권력자들에게 이것을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리고 그들을 추대하고 거기에 부역하는 주변 관료들이나 정치인들에게 이것을 기대하는 것도 분명히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현재의 정치현실에서 그러한 기대는 절망적이다. 그런 자들에게 과연 이러한 광범위한 위기에 대한 인식이 있을지, 비전이 있을지, 의지가 있을지, 양심이나 도덕성이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조차도 과분하다.


이들은 아마도 여러 지표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가 분명함에도 아쉬움이 없어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늘 행복감에 젖어 있는 사람들일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오히려 그러한 위기를 기회로 엿보며 개인적인 영달이나 이득을 취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자면 그들은 오히려 위기를 즐기고 더욱 조장하는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아닐 지경이다. 그렇다면 위기는 더욱 분명해 진다.


그러나 또한 위기는 기회이다. 인류는 위기에 대한 탁월한 도전과 응전을 통해서 위기를 멈추거나 새로운 기회로 만들어 왔다. 어떤 위기든 그것은 어떻게든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남은 문제가 있다면 유쾌한 방식으로 해결되느냐, 아니면 폭동이나 대량 학살, 사회 붕괴 등을 통해 유쾌하지 않은 방법으로 해결되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기가 다중적이고 총체적인 만큼 그 극복방안 또한 만만치는 않을 것이다. 또 이미 그 극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또 해결방안에 대한 저마다의 찬반논쟁이 끊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낙관적 입장과 비관적 입장이 병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의 극복을 위한 최선의 노력들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분명하다.


물론 권력자들을 포함한 국민 모두가 혹은 인류전체가 같이 고민하고 노력하여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절망적이고 암담한 우리의 상황에서 이러한 위기의 극복은 지도자 없는 시민의 혁명을 통해서 가능하지 않을까도 생각해 본다. 요즈음 촛불과 함께 거리에서 타오르는 국민들의 열망으로 가름해 보건대 이러한 꿈은 헛되어 보이지 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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