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학교(교장 이철승, 백두대간전문가)의 12월 백두대간종주 4구간은 <송년특집 : 백두대간 지리산권역 만복대 구간>입니다. 지리산의 많은 복이 쌓여있다는 만복대를 걸으며 눈꽃 속에 핀 달궁 이야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백두대간학교는 예정한 대로 지난 9월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으며, 참가자 전원이 9월 <천왕봉 구간>, 10월 <벽소령 구간>, 11월 <금산 구간>을 완주했습니다.
백두대간학교 제64강 12월 산행은 백두대간종주 네번째 산행입니다. 산행일은 12월 17일(토), <백두대간 지리산권역 만복대 구간>을 걸으며 올해를 마무리합니다.
[산행지안내]
백두대간종주 12월 산행은 백두산 흘러내린 두류산 만복대(萬福臺)입니다. 수많은 전설과 애틋한 그리움, 절절한 아픔을 아흔아홉 골짜기에 간직한 지리산 구간입니다. 마한의 슬픈 역사가 서려있는 달궁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어둠이 스러지는 신새벽 바람과 구름이 만들어내는 서리꽃과 함께합니다.
[구간소개]
-산행월일 : 2016년 12월 17일(토)
-산행출발 : 2016년 12월 16일(금) 오후11시
-산행코스 : 성삼재-작은고리봉-만복대-정령치-개령암지-큰고리봉-고기리
-산행거리 : 약 11.1km(도상거리)
-소요시간 : 약 6시간
-난 이 도 : 중하(★☆)
이철승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2월 산행지 설명을 들어봅니다.
백두대간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합니다. 또한 장중한 산세의 영향으로 덕산(德山)으로도 이름 지어졌으며, 민중의 저항의식이 함축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도 지리산의 다른 이름입니다. 3도(道)5군(郡)에 걸쳐있는 지리산은 장쾌하고 부드러운 주능선에 기대어 아흔아홉의 골짜기가 흘러내립니다.
‘어머니의 산[母山]’이라고 불리는 지리산을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입니다.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풍부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자연스레 사람들이 기대어 살게 되고,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을 비롯한 이상향의 조건이 되었습니다.
지리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역사적 기록으로는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6세기경 신라와의 전쟁을 피해 지리산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반야봉 아래 달궁은 피난한 마한의 도성으로 전해져 옵니다.
지리산은 그 특유의 자연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험난한 역사가 상존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온통 전란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삼한시대와 가야시대와 삼국시대는 각국의 국경의 접경지대로 싸움터의 주 무대였고, 고려 때에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일본과 대전란을 겪어야 했으며, 근세의 동항민중항쟁과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습니다.
지리산의 지명을 자세히 살펴보면 치열한 전란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세 명의 성(姓)이 다른 장군이 지켰다는 고개 ‘성삼재’, 정씨 성(姓)의 장군이 지킨 고개 ‘정령치’, 마한의 임금이 피난해 머문 ‘달궁’ 등은 마한의 슬픈 역사입니다.
고려 말 이성계가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적을 섬멸한 운봉의 ‘황산대첩비’와 여원재, 피아골 등은 왜적과의 싸움에 대한 전설이 어린 곳이며, 구례의 ‘석주관’은 정유재란 당시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또한 근세에 와서는 동학민중항쟁의 마지막 전투의 장소가 되었고, 현대에 접어들어 여순사건에서 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의 목숨이 산화한 곳입니다. 지리산은 동전의 양면처럼 때론 생활의 터전과 피난지로, 다른 한편으론 치열한 싸움터로 역사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종주의 출발은 세 명의 서로 다른 성을 가진 장군들이 지켰던 고개 ‘성삼재’입니다. 지리산 관통도로가 뚫린 후 번잡해진 성삼재는 새벽 별빛 아래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백두대간학교 도반들과 함께 지리산 관통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다 철책 사이 작은 문을 지나 마루금으로 올라섭니다. 어머니의 품으로 들어갑니다.
초겨울의 시린 달빛 속으로 들어갑니다. 바늘로 찌를 수 없을 정도로 촘촘한 뭇별들이 밤하늘에 가득합니다. 차가운 계절 시린 별빛은 더욱 또렷하게 다가옵니다. 별빛과 달빛의 안내를 받으며 겨울의 숲을 헤쳐 나갑니다. 뱀사골 입구로 이어진 861번 지방도로와 나란히 걷는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입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나신의 잡목들이 어우러진 마루금은 완만하고 포근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어두운 밤의 포장을 벗기는 여명이 시나브로 밀려오며 별빛이 스러집니다. 점점 또렷하게 장중한 지리산의 주능선이 실루엣을 벗어내기 시작합니다. 소금배의 고리를 묶어 놓았던 고리봉에서 바라보는 달궁계곡은 심연(深淵)의 바다처럼 고요합니다. 전쟁에 패해 이곳 골짜기로 밀려난 마한의 왕의 심정처럼 처연하게 다가옵니다.
반야봉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진 지리산의 주능선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천왕봉 주위의 하늘들이 수줍은 새색시의 볼처럼 붉어지기 시작합니다. 점점 더 붉어진 새색시의 볼은 어느 순간 하얀 알을 토해 놓습니다. 지리산 위로 하얀 태양이 떠오릅니다. 하얀 알은 다시 붉어지며 산하를 물들입니다. 배구대간 지리산과 태양이 그려내는 웅장하고 가슴 저리는 일출입니다.
고리봉을 내려서면 산길은 뒷동산 숲길처럼 편안한 길이 이어집니다. 우측의 심마니능선과 좌측의 산수유로 이름난 산동면을 눈에 담으며 사스락 사스락 마루금을 걷다보면 넓은 개활지가 나타납니다. 묘봉치입니다. 이곳에서 아침식사를 합니다. 함께한 도반들과 옹기종기 모여 각자 준비한 도시락을 펼칩니다. 즐거운 이야기와 함께하는 꿀맛 같은 시간입니다.
묘봉치를 지나 만복대로 오르는 마루금은 유순하기 그지없습니다. 평평한 만복대처럼 편안한 오르막이 계속됩니다. 지리산 주능선에서 북으로 갈래친 심마니능선, 삼정능선, 오공능선이 중첩으로 나란히 걷는 길입니다.
누대에 걸쳐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만복대입니다. 복을 기원하며 쌓은 돌탑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주능선과 달궁계곡의 부채골은 어떠한 표현으로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을 뿐입니다. 심연의 계곡과 산줄기들이 그려내는 부채골의 중첩은 정말 환상 그 자체입니다.
만복대에 올라서면 자연스레 만복대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서서 지리산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곳 만복(萬福)인 것입니다. 함께한 종주하는 도반들과 송년의 만복을 나누고 새해의 만복을 소원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어머니의 산 지리산의 넉넉한 덕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덕담 나누고 달궁골이 전하는 마한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령치로 향합니다.
정씨 성의 장수가 지키던 고갯마루에는 지리산 자락에 기대어 살고 있는 이원규 시인의 시비가 대간꾼(?)이 되어버린 우리 도반들을 반겨줍니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시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 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 노을을 품으려거든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시려 거든
불일 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 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 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 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마지막 시구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 마음이니
행여 견딜만 하다면 제발 오지마시라”
처럼 백두대간 지리산은 언제나 그렇게 묵묵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행여 못 견딜 때에도, 행여 견딜만할 때에도 말없이 받아들여 줍니다. 포근하고 넉넉한 어머니의 품으로 모두를 안아줍니다.
정령치에서 간식 나누고 바래봉으로 이어진 대간길로 접어듭니다. 큰고리봉으로 향하는 마루금은 아기자기한 길들이 이어져 있습니다. 동네골목길 같은 길을 지나 오솔길이 이어지고 작은 철계단길과 솔밭길 그리고 암릉길이 걷는 즐거움을 더합니다.
잠깐 시간을 내어봅니다. 마루금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을 둘러봅니다. 희미해진 불상의 윤곽을 살펴봅니다. 온화한 우리 민초들의 형상입니다. 마애불의 온화한 미소를 뒤로하고 다시 백두대간 마루금으로 올라섭니다.
큰고리봉에서 부운치, 팔랑치, 바래봉으로 이어진 지리산 서부능선과 작별합니다. 큰고리봉에서 대간길은 우측 고기리를 향해 급하게 내려섭니다. 쉼 없는 내리막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부드러운 흙이 쿠션처럼 깔린 길입니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함께 이어진 부드러운 길입니다. 봄의 전령사들인 철쭉과 진달래의 벌거벗은 나신을 보며 내려서는 길입니다. 포장도로가 보이면 고기리입니다. 마한의 달궁 이야기와 작별합니다.
만복대와 정령치에서 흘러내린 시린 옥계수에 발을 씻으며 종주의 피로를 날려버립니다. 묶은지를 넣어 칼칼한 닭도리탕과 운봉고원의 맑은 물로 담근 막걸리 한 잔으로 백두대간 종주의 여운을 흘려보냅니다.
[산행계획]
여유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엄재용 선생님 등 전문가이드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 그리고 중간에서 함께 하며 평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전에 도착하여 스쿨버스에 탑승하세요. 버스 앞에 <백두대간학교> 표지가 붙어 있습니다.
12월 16일(토) 오후 11시
23:00 덕수궁 대한문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2번 출구)
23:30 사당역 공영주차장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23: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23:55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승차장
12월 17일
00:05 경부고속도로 신갈(하행) 버스승차장
<산행일정>
05:20 성삼재 주차장 도착/산행 준비 & 스트레칭
05:30 성삼재 출발 – 산행 시작
05:50 당동고개 갈림길
06:20 작은고리봉
07:20 묘봉치 - 아침식사
08:50 만복대
09:30 정령치
09:45 개령암지
10:10 큰고리봉
11:30 고기리 도착 - 산행 마감/스트레칭
선유산장(전북 남원군 /063-626-7300)에서 묵은지 닭볶음탕과 막걸리로 뒤풀이
13:00 고기리 출발
13:30 운봉 탐방
17:3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시간 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재킷,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버프(얼굴가리개), 아이젠, 스패츠, 도시락 1개(아침식사용) 등
▶백두대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2017년 1월 백두대간종주 5구간 산행 안내]
-산 행 지 : 백두대간 지리산권역 수정봉 구간
-산행일시 : 2017년 1월 14(토) - 당일 산행
-출발일시 : 2017년 1월 14일(토) 오전 6시
-산행코스 : 고기리-노치샘-수정봉-여원재
-산행거리 : 약 8.3km
-소요시간 : 약 5시간
-난 이 도 : 중하(★☆)
*상기 일정은 현지의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습니다.
[산행자료]
[지리산(智異山)]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역사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887년) 최치원 선생의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에 등장하는 ‘智異山’이다. 다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가 최초인데 <삼국사기>의 기타 기사에도 ‘地理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오늘날과 같이 ‘智異山’으로 표기되어있다. 고려시대 이후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으로 개인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들에 의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데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덕산(德山),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다.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자락 골골이 숨어 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 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과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다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곳이다.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은 <청학동 변증설>에서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말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진 배경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태동하였던 것이다.
국토의 남쪽에 크게 둥지를 틀고 있는 지리산의 입지적 무게는 중심지에 대한 변방지역의 독립성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장소성을 띤다. 따라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견지에서는 반역지의 속성이 있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기도 했다. 구산선문의 2개 산문이 지리산에서 일어난 통일신라 말 불교의 변혁과정도 그랬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운동도 그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리산의 호칭이 불복산, 반역산이라는 것도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에 대한 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드러내어 주는 단면이다.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과 의로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제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 조종도, 정인홍, 김효원, 최영경 등의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혁명 등의 위정척사운동과 3월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 모성적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지리산 이름의 뜻
1. 신라5악(岳)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하여 ‘智異山’이라 하였다.
2.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찬탈하려고 명산에 기도를 드리러 다닐 때였다. 백두산과 금강산 신령은 쾌히 승낙하였는데 지리산 신령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혜(智慧)가 다른[異] 신선이 사는 산이라 하여 지리산(智異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3. 백두산이 흘러와 된 산이라 하여 백두산(白頭山)의 '두(頭)' 흐를 '류(流)'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하고, 남해에 이르기 전에 멈추었다 하여 머물 '류(留)'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이를 순우리말로 지리산의 산세가 두루뭉실하여서 '두루', '두리'를 한자로 차자하여 두류(頭流)가 되었다고도 한다.
4. 사명당 유정(惟(政)은 우리나라 명산을 이렇게 비교하여 말하였다. 금강산은 수이부장(秀而不壯)이요, 지리산은 장이불수(壯而不秀)요, 묘향산은 역수역장(亦秀亦壯)이라 하여 높이 1,909m의 산세가 기묘하고 향기를 풍긴다.
-지리십경(智異十景)
제1경: 천왕일출(天王日出) - 천왕봉 일출
제2경: 직전단풍(稷田丹楓) - 피아골 단풍
제3경: 노고운해(老姑雲海) - 노고단 구름바다
제4경: 반야낙조(般若落照) - 반야봉 일몰
제5경: 벽소명월(碧宵明月) - 벽소령 밝은 달
제6경: 세석척촉(細石躑躅) - 세석고원 철쭉
제7경: 불일현폭(佛日懸瀑) - 불일폭포 낙수
제8경: 연하선경(烟霞仙境) - 연하봉 선경
제9경: 칠선계곡(七仙溪谷) - 칠선계곡 아름다운 풍광
제10경: 섬진청류(蟾津淸流) - 섬진강 맑은 물결
[성삼재] 지리산 주능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고개다. 지리산 종주의 기점으로 이용된다. 861번 지방도로가 성삼재 정상까지 올라간다. 이곳에 있는 국립공원관리사무소에서 서북능선인 만복대를 포함, 고기리까지 관리한다. ‘3개의 재(고개)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다른 유래도 있다. 성삼재는 삼한 시절의 전적지로, 마한군에게 쫓기던 진한 왕이 달궁계곡에 왕궁을 짓고 피난하여 살 때였다. 북쪽 능선에 8명의 장수를 두어 지키게 한 곳이 팔랑재요, 동쪽은 황장군에게 지키게 하였으므로 황영재, 남쪽은 성(姓)이 각각인 세 사람의 장수를 보내어 지켰다 해서 성삼재라 하였다 한다.
-팔량치
조선시대의 팔량치는 팔량관(八良關)이라 하여 꼬박 나라에서 지켰다. 나라 길이 지나는 중요 길목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왜적으로부터 호남의 곡창을 지키는 으뜸 관문이었던 탓이다. 흔적은 역력하여 흥부 마을로 자부심이 대단한 성산 마을에는 지금도 산성 자리가 뚜렷하며, 팔량치에 여원재까지의 산성만도 그 수를 한참 헤아려야 한다. 인월에서 보면 팔량치는 생김이 마치 시위 당긴 활처럼 휘어져 있다.
-달궁 이야기
남원군 산내면에서 노고단 정령치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가다 뱀사골 입구인 반선을 조금 지나면 달궁마을이 나오는데 이곳 주차장 바로 아래에 궁터 흔적이 남아있다. 달궁이라는 이름은 계곡 들머리의 마한 왕궁 터에서 비롯됐다는 것만 어렴풋이 전해진다.
지리산 반야봉 좌우에 두 봉우리가 있는데 황령과 정령이다. 옛날 한나라 소제 3년에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의 난을 피해서 도성을 쌓을 때, 황, 정 두 장수에게 일을 맡겨 축성케 했다. 도성이 완성된 후 고갯마루 이름을 두 장수의 성을 따 각각 황령과 정령으로 불렀다. 도성은 그로부터 72년을 보전했다.
달궁에 은거지를 마련한 마한 왕조는 사방 험준한 산세 중 적이 넘어오기 쉬운 길목마다 수비군을 배치했다. 북쪽에는 8명의 장군을 배치, 팔량치라 했다. 서쪽은 정장군을 배치하고 정령(현재 정령치)이라 칭했다. 동쪽은 황장군을 배치시켜 황령으로 불렀다. 남쪽은 특히 중요한 요충지여서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 방어토록 하고 성삼(姓三)재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곳이 오늘날 지리산 자락을 동강내고 도로가 연결된 해발 1090m의 성삼재다.
기원전 78년의 일이었다. 그때 도성이 있던 곳이 지금의 달궁계곡이고, 이때 쌓은 성의 흔적은 고리봉에서, 정령치로 다시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에 남아 억새를 키우고 있다.
정령치에서 고리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에는 토성의 흔적이 역력하다. 중간 중간 다듬은 돌로 쌓은 성곽도 멀쩡하게 남아 있다. 마한의 정장군이 달궁계곡의 도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다는 성의 흔적이다.
성벽이 이어진 큰고리봉 정상 아래 암벽에는 마애불상군이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있다. 설명문에는 조각 양식이 고려조의 수법이라고 적혀 있지만 부근에서는 마한장군상으로 부른다. 사람들은 모두 12분의 부처가 있다고 하고 보물 제1123호라고 적은 설명문에는 9분의 부처가 있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보면 3분의 부처 이외는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풍화된 탓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나 탁본을 떠갈 정도로 관리가 소홀했던 탓이 더 커보였다.
[고리봉] 1248m. 남원시를 벗어나 곡성 쪽으로 서진하다 보면 금지들이라 불리는 평원에서 눈앞을 가로막고 솟은 바위산이 바로 고리봉이다. 고리봉이란 이름은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소금 배를 묶어 놓았던 고리가 어딘가에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이 고리봉은 명산이라 하여 가뭄이 심할 때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이 마을뿐 아니라 인근 금지면에서도 온갖 정성을 다하여 모셔 왔다. 수일동안 몸을 청결히 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기우제를 지냈는데 제물은 삼실과(대추, 밤, 곶감)와 돼지머리를 쓰고 기우제가 끝나면 그 자리에서 삼실과는 산 아래로 던지고 돼지머리는 땅에 묻고 하산하였다고 한다.
[묘봉(墓峰)치] 만복대와 고리봉 사이의 허리를 낮춘 부분인데, 작은 봉우리 위에 올라앉아 있다. 헬기장이 있고 서쪽에 산동면 위안리로 내려가는 길이 갈라진다. 묘지가 있는 봉우리다.
[만복대(萬福臺)] 1438.4m.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지리산의 많은 복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여 만복대라는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며, 사방으로 복을 내려주는 봉우리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가을에는 전형적인 초가지붕을 연상케 한다고 했을 만큼 복스럽게 생긴 모양새다. 거대한 젖무덤처럼 부드럽게 솟아 오른 만복대는 광활한 억새 군락지를 이루고 있어 가을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정령치] 1172m. 정령치는 주천면 고기리에서 산내면 달궁부락으로 넘어가는 지리산 줄기의 고개로, 황령치(黃嶺峙)와 함께 마한의 별궁을 지키던 중요한 곳이었다 하는데 이곳은 고갯마루가 운동장만큼이나 넓어 이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마한의 별궁을 방어하기 위해 황령치와 정령치에 성을 쌓고 정씨 성을 가진 장군과 황씨 성을 가진 두 장군이 각각 지키고 있었는데, 정장군이 지키던 이 정령치에 마을을 만들고자 그의 신통력을 써서 손바닥으로 고갯마루를 쳐서 주위의 높은 산들을 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리하여 산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 앉기 시작하는데 운봉에 사는 어느 아낙이 저녁을 짓고 있는데 천지를 올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지축이 흔들리므로 괴이하게 여겨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보니 정령치 쪽 높은 산들이 탕탕 내리치는 소리에 맞추어 빙빙 돌면서 조금씩 움직이므로 무심결에, “오메 산이 가네~”하고 외치면서 들고 있던 부지깽이로 부엌문턱을 치니 그 순간 정장군이 내리치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던 산들이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 다시는 움직이지 않아 고갯마루가 넓어지려다 말았다 한다.
한국전쟁 전만 해도 정장군의 손바닥이 찍힌 바위가 달궁마을 앞까지 굴러 내려왔었다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정장군이 쌓았다는 산성만이 고리봉 능선에 약 20m 정도 남아있어 옛날 전설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는 이 고개를 한자로는 정령치(鄭嶺峙)라 하지 않고 정령치(正嶺峙)라 고쳐 부르고 있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지리산 정령치에 연이은 고리봉 아래 개령암 터 뒤 절벽에 새긴 이 마애불은 크고 작은 12구의 불상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불상군이다. 울퉁불퉁한 자연암벽이어서 조각 자체의 양각도 고르지 못하고 훼손도 심한 편이나 3구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거대한 불상은 4m나 되는데 조각 솜씨도 제일 뛰어나 본존불로 여겨진다. 얼굴은 돋을새김이지만 신체의 옷주름은 선으로 처리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고려 마애불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또한 큼직한 얼굴과 형식화된 이목구비, 장대해진 체구와 간략해진 옷주름 등에서도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거불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2m의 작은 불상들 역시 조각수법이 모두 같으며, 각 부분의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서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규모가 큰 불상군은 희귀한 예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며, ‘세전(世田)’ ‘명월지불(明月智佛)’등의 글이 새겨 있어 그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큰고리봉] 1305m. 남원시 산내면과 운봉읍 경계에 있다. 고리봉은 북동쪽에 세걸산(世傑山), 남서쪽에 만복대(萬福臺)를 마주보고 있다. 지리산을 지척에 두고도 그 맥을 달리하는 바위산이다. 지리산 서북능선의 출발점인 성삼재에서 만복대 구간에 있는 고리봉(작은고리봉)과 구분하여 큰고리봉이라 불리운다. 정령치휴게소를 떠나 큰고리봉까지 급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큰고리봉에서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능선으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큰고리봉에서 대간은 고기리마을 방향으로 뚝 떨어진다.
[고기리] 본래 남원군(南原郡) 상원천면(上元川面)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고촌리(高村里)와 내기리(內基里)가 병합되어 고촌과 내기의 이름을 따서 고기리(高基里)라 하고 주천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남원시에 군이 통합되어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가 되었다.
마을 뒤로 산지가 위치하며 앞으로는 원전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고촌, 안터, 내건너 등이 있다. 고촌은 고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로 지대가 높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안터는 고촌 서쪽에 있으며 골짜기 안에 깊숙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1914년 지명을 한문으로 표기할 때 안내(內)자와 터기(基)자로 고쳐 내기(內基)로 바뀌었다. 내건너는 고촌 남쪽에 있으며 내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자료출처 : 아름다운소통(협), 백두대간학교, 국립공원관리공단, 한민족문화백과 등)
[백두대간학교]
백두대간학교 이철승 교장선생님은 오랜 동안 백두대간학교 수석가이드로 활약해주셔서 낯익은 얼굴입니다. 산행 경력 30년의 저명한 M.T.디자이너이며 국가공인 숲길체험지도사(산림청), 응급처치법 강사(대한적십자)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낭 하나 메고 지리산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얼굴이 환해집니다. 천상 산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연이어 정맥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백두대간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산악회 가이드, 기업체 가이드, 목적산악회 가이드 등으로 활약하며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가이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인문학습원 백두대간학교 개교부터 가이드로 동분서주했습니다.
백두대간 교양강좌, 트레킹학교 등의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고, 아이들과 뚜르드몽블랑(TMB), 몽블랑 일주 트레킹을 다녀왔으며, 흥덕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대 <백두대간 하늘길를 걷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백두대간 숲길을 거닐며 바람과 햇살, 구름, 안개, 곤충과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종주를 시작하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백두산 장군봉에서 지리산 천왕봉까지 이어진 산줄기 ‘백두대간’ 총 길이 1,625km의 백두대간은 단순한 산줄기가 아닙니다. 이 땅 모든 산줄기와 강줄기의 시원입니다. 또한 한반도 허파이자 생태계의 보고입니다. 이 땅에 기대어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의 근간입니다. 백두대간 줄기 따라 물이 흐르고, 마을이 생겨 사람들이 깃들어 살았습니다. 공동체가 형성되고 문화가 생성되었습니다. 백두대간은 우리의 삶이며 우리의 문화의 결정체입니다.
생명의 근간인 백두대간을 찾아가는 백두대간 종주는 우리의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에 대한 이해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인문학의 보따리를 찾아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입니다.
지난 6년간 60강에 걸쳐 백두대간 아름다운 산하를 걸었던 백두대간학교는 백두대간의 결정체인 백두대간 마루금을 걷습니다. 총 길이 1,625km의 백두대간 중 우리가 걸을 수 있는 남측 구간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강원도 고성 향로봉까지 701km입니다. 이중 비법정탐방로 79.9km를 제외하면 도상거리 621.1km입니다. 접속구간을 포함하면 실제 백두대간 종주거리는 약 1,000km에 이릅니다.
2016년 9월부터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삶과 문화를 찾아 떠납니다. 마음 한켠 간직해왔던 꿈을 찾아 떠나는 희망의 발걸음입니다. 백두대간 종주는 힘든 여정이지만 도반들과 함께라면 거뜬하게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혼자 걸으면 나의 길이 되지만, 함께 걸으면 모두의 희망이 됩니다.” 모두의 희망인 ‘백두대간 종주’ 힘차게 출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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