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의 극한 대치가 해를 넘긴 1일, 민주당이 이날 오후 점거 보름 만에 의장실 농성을 해제했다.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의 속도전과 법안전쟁으로 무너진 국회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국회의장실 농성을 풀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민주당은 이날 낮 비공개 최고위원회의를 통해 이같이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은 "국회의장은 입법부의 수장으로서 국회의 권위와 독립성을 지킬 무한책임을 지니고 있다"며 "국회의장은 집무실 복귀를 계기로 무너진 국회의 위상을 회복하는 데 진력해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비록 본회의장을 비롯해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 행정안전위, 정무위 등의 점거 농성을 지속할 방침에는 변화가 없지만, 민주당이 국회의장실 농성을 해제한 건 적지 않은 변화다. 전날 김형오 국회의장이 의장실 농성 해제와 교섭단체 대표들의 협상을 촉구할 때만 해도 민주당은 이를 거부한 바 있다.
이로써 민주당의 점거 이후 국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김 의장도 업무에 복귀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다.
민주당의 이같은 결정은 질서유지권은 발동이후 다시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김 의장에게 최소한의 입지를 세워줌과 동시에 국회 점거농성에 대한 비판여론을 다독이기 위한 행보로 보인다. 의장실에서 본회의장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있다는 게 부담이기는 하지만, 김 의장이 의장실 입구를 통한 진입작전을 강행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나름의 계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그러나 "국회의장은 최소한의 상정요건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국민을 억압하고 경제위기를 심화시킬 악법들에 대한 직권상정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국회가 국민의 뜻을 받들어 여야 합의로 처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국회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을 거듭 촉구한다"고 김 의장을 압박했다.
정세균 대표는 이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김 의장이 직권상정할 경우 큰 불행한 사태가 올 것"이라면서 "직권상정을 하려면 충분히 명분이 축적돼야 되고 요건이 갖춰줘야 되는데 입법 발의가 된 지 한 달도 안되고, 이 법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직권상정해서 밀어붙인다면 야당으로서는 강력한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정 대표는 "(처리 강행시) 장외투쟁은 기본이 될 것"이라면서 "심지어 (당내) 일각에서는 의원직을 걸고 해야 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어 의원직 총사퇴도 충분히 검토의 대상이 된다고 본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또 "입법은 국회에서 해야 하고 원래 대통령은 국회에 간섭하면 안되는데도 마치 권의주의 시대처럼 이명박 대통령이 국회에 자꾸 간섭 하고 있다"면서 "대통령은 입법 문제에 대해 손을 떼야 하고 입법에 관해서는 국회에서 여야가 대화와 토론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도 강온기류 여전
이처럼 'MB악법 직권상정 저지'라는 기본 골격이 유지되는 가운데에서도 어떤 이유에서건 민주당이 의장실 점거 농성을 해제함으로써 전격적인 타협의 실마리가 잡힐지 주목된다. 일각에선 양당이 물밑 접촉을 통해 방송법은 시한을 정하지 않고 협의처리키로 하고, 한미 FTA도 이에 준해 처리키로 의견접근을 보고 있다는 후문도 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조정식 원내대변인은 "민주당의 입장은 방송법에 대해선 시한을 두지 않으며 합의처리 문구가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아직은 타결의 접점이 마련된 것은 없다"고 했다. 한미 FTA에 대해서도 서갑원 수석부대표는 "한나라당은 이번 회기에 처리하자고 하고 우리는 여전히 미국 오바마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하자는 기존 입장들을 발표한 것에서 변화된 것이 없다"고 잘랐다.
특히 임시국회 막바지인 5~8일 사이 국회의장의 경호권 발동을 통한 본회의장 점거 해제와 법안 직권상정으로 이어지는 시나리오도 여전히 거론되고 있어 극적 타결 전망을 점치기엔 이르다.
한나라당도 장기전 채비를 갖추는 분위기. 이미 2008년 처리라는 1차목표가 실패로 돌아갔고 입법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임에 따라 처리 시기보다는 처리 방식과 모양새에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홍준표 원내대표 등을 중심으로 일부 쟁점 법안을 2월 국회로 넘기는 방안이 거론되는 것도 이런 기류와 무관치 않다.
그러나 맹형규 정무수석 등 청와대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여의도 당사에서 진행된 신년회에서 박희태 대표는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그 파도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그것을 잠재울 수 있을까, 신라시대 일파만파를 잠재우고 나라를 평온하게 했다는 그 심묘한 피리, 만파식적은 어디 있는가, 자탄도 해봤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그는 "지난해 저희들은 청와대에 가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지금 여러 가지 정책이 나오는데 가장 아쉬운 것은 속도이다, 지금 국정의 기본이 속도전이어야 한다고 했다"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속도를 외쳤다"며 법안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회창 "이 나라를 소인배들로부터 지켜주소서"
한편 이날 여야 정당 지도자들은 관례대로 국립현충원을 방문했는데 이들이 방명록에 남긴 글들은 각자의 처지를 반영해 눈길을 끌었다.
박희태 대표는 "만난(萬難)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존을 세계 만방에 떨치도록 하겠습니다"고 썼고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민주주의 경제 남북문제 위기극복에 민주당이 나서겠습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영령(英靈)들이시여 이 나라를 소인배(小人輩)들로부터 지켜주소서"라고 써 양당에 대한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 친박연대 서청원 대표는 "반성(反省)하며 새출발 다짐 드립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새해에는 우리모두 희망과 용기를 갖고 다함께 나아갑시다"라고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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