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물러나야 국정혼란이 멈춘다. 그리고 새로운 민주정부 수립이 가능해진다. 박근혜는 국민주권에 기초한 존엄한 헌정수행의 장을 헌정파괴범죄의 현장으로 만들어버렸다. 4일,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발표한 이른바 "담화"에는 자신이 바로 헌정유린의 중범죄자라는 인식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이유는 없고, 청와대생활의 고독이 가져온 의도치 않았던 불찰을 용서해달라는 동정심 유발을 내세웠을 뿐이다.
"필요하면" 검찰 수사에 응하겠다는 것도 가당치 않다. 그것은 조건부가 아니라 이미 절대적 원칙이 되었고, 용서를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헌정문란의 죄에 응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는 본연의 기능을 하루속히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역시 그 기능을 손상시킨 장본인이 손을 떼야 가능하다. 하지만 박근혜에게는 그럴 의사가 없다. 희대의 지지율 5%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여전히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수사는 검찰에 맡기고 정부는 제 할 일을 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 경우 이미 최순실의 경우에서 드러났듯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구속수사가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된 상황이다. 박근혜가 대통령 자리에 있는 한 이게 제대로 되겠는가? 수사의 완벽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중범죄 피의자의 처지가 된 당사자를 권력의 정점에서 축출하는 것이 마땅한 순서다. 그것이 정부 본연의 기능회복이다.
민심과 하나 되지 못한 민주당
제1야당 민주당의 태도는 지금까지 적절치 못했다. 악정을 펼친 박근혜 체제의 청산에 적시의 속도를 내지 못한 채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고 만 것이다. 박근혜 퇴진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노도와 같이 물결치고 있는데 국정혼란 운운으로 사태의 본질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퇴진 이후의 상황을 감당할 책임에 대한 자신감도 보이지 못했다. 정치적 이해계산에 몰두하고 국민들을 믿고 가는 자세가 결여된 까닭이다. 비상한 격동의 시기에, 광장과 제도정치에 선을 그은 원내대표 우상호의 초기대응 책임이 적지 않다.
대선후보 선두주자 문재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국정농단의 죄를 물어 그 책임자를 즉각 정리하고, 이후의 급변상황을 국민적 지지 속에서 수습해나갈 수 있다는 용기도 보이지 않았다. 대선주자로서의 지도력에 중대한 의문을 품게 만든 것이다. 신중과 책임을 내세우긴 했으나 전격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민심과 하나가 되는 길에서 전망과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헤맸다는 평가다. 새로운 정국창출 노력보다는 지켜보겠다는 식의 태도는 실망스럽다는 반응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과 함께 한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은 상대적으로 돋보였다. "뭐시 중한디?"라는 문제의식에 충실한 결과다. 정의롭지 못한 질서를 어떻게 타파해야 하는가에 대한 용기와 자기헌신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를 보여주었다. 안철수가 이들보다 뒤처지긴 했으나 퇴진 서명운동에 나선 것도 주목된다. 정치가 민심에 주도적 반응을 이끌어내기보다는, 이제 국민대중이 정치를 광장으로 끌어내고 있다. 시민사회와 정의당, 민중연합당, 노동당 등은 일찌감치 박근혜 퇴진으로 입장을 정했다.
과도정부의 기능
퇴진 이후 정국을 관리할 거국내각은 중립내각이 아니다. 그것은 청산과 이행의 과제를 근본성격과 기능으로 하는 과도정부다. 이걸 애초에 분명하게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각을 지휘할 예상 인물들이 먼저 튀어나와버렸다. 엉뚱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헛발질한 인물도 있다.
"중립"이라는 말은 여야 합의와 협치라는 전제를 갖는다. 박근혜가 임명권을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거국내각 조성에는 지금의 새누리당도 자격이 없다. 이들도 청산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중립"은 새누리당의 정치적 역할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문재인의 거국중립내각 논리는 이런 차원에서 중대한 결함을 가지고 있다. 거국중립내각에서 중립이라는 글자는 사라져야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여야의 정치적 합의가 요구될 것이다. 그러자면, 지금의 새누리당 지도부는 완전히 재편되어야 그나마 가능하다. 야당은 바로 이것을 집중적으로 압박해야 한다. 박근혜 체제의 부역, 비호세력이 중심이 된 새누리당은 거국내각 조성의 발언권이 없는 것이다. 과도정부로서의 거국내각은 현 정권 접수의 기능을 확실하게 가져야 한다.
결국 거국내각은 야당이 주도하면서 시민사회와 협의해나가는 전방위적 협치를 토대로 굴러 가도록 해야 한다. 지금 가동되기 시작한 비상시국회의는 그러한 협치의 모태가 될 수 있다. 야당이 이를 배제하고 기존의 정치권만의 주도권을 내세우게 되면 이 또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이미 폭넓게 공유된 새로운 정부수립의 요구를 최대한 담아내는 거버넌스 시스템이 절실한 것이다.
거국내각의 임무는 (1) 박근혜 헌정문란 청산 (2) 새누리 부역세력 책임 추궁 (3) 경제의 일상적 안정화 (4) 남북관계 안정 (5) 국정교과서, 사드, 성과급 퇴출제 등 일체의 반민주적 정책 중단 (6) 대선관리가 된다. 박근혜 체제 청산과 민주정부로의 이행이 바로 이 과도정부의 중책이다.
향후 일정의 안정적 관리
박근혜 퇴진 이후 일정을 정리하는 것은 이제 매우 중요해졌다. 누가 선출된 수장이 되었던 간에 절실하게 요청되는 민주정부로의 이행과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해나가는 것은 국민 모두의 책임이다. 박근혜 퇴진과 국정문란의 진상규명, 그리고 일상적 정책의 추진과 국정운행은 국정경험이 있는 국회의 구성원들이 다수인 상황에서, 국민들의 의지를 안다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라면 정치인의 자격상실이다.
문제는 헌법상 대통령 궐위 시 60일 이내의 후임자 선출과정이다. 원칙을 정확히 세우면 된다. 대선제도는 낯선 장치가 아니다. 예상보다 선거가 빨라졌을 뿐이지, 법과 제도 그리고 예산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대선주자들의 개헌공약은 수용될 수 있으나 여기에 개헌논쟁이 끼어들 틈은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이유도 없다. 거국내각이 개헌 수렁에 빠지는 순간, 정국은 엄청나게 비틀거릴 것이다.
만에 하나, 60일 이내 후임자 선출을 위한 대선이 정치권 전체에 현실적 부담이 된다면 국회는 국민의 동의를 얻어 비상상황을 요건으로 60일 조항적용을 잠정 중단하고, 내년 4월에서 6월 사이로 대선시기를 조정하는 방법도 강구할 수 있다. 이는 국민주권의 원칙과 실현을 어떻게 꾸려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60일 조항은 대통령 궐위시 국정공백 여파를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 그 기본정신이라는 점에서, 과도정부가 국정공백을 충분히 채울 수 있다면 국민들의 동의방식만 정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수 있다. 이행과정의 안정을 바라는 국민들은 국민투표를 통해서라도 대선시기의 일정한 조절에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광장의 힘
결국 광장의 힘이 어떻게 솟아나올 것인가가 관건이다. 박근혜 퇴진 이후의 상황을 정치적 계산으로 풀려는 입장은, 퇴진 이후 국민주권적 요구를 중심에 놓고 새로운 해법을 찾는 작업의 힘을 회의적으로 보기 때문에 생겨난다. 그러나 왕정을 종식시킨 근대 시민혁명의 경우를 보더라도 기존질서의 관점을 뛰어넘는 돌파구가 열리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사태는 시민혁명의 정치적 격변과 궤를 같이 할 때 비로소 거대한 동력이 분출된다.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는 새로운 법과 제도, 그리고 질서를 만들어내는 근본적 힘이다. 이에 기초하지 못하는 대의민주주의는 그 안에 제도화되어 있는 세력의 기득권 보호장치로 전락할 뿐이다. "국민적 주도권"이 사태를 이끌고 가는 것이 답이다. 정치권은 이 주도권을 관철하는 전문 대리인일 뿐이다. 대리인이 임무를 맡긴 주권자의 요구를 거부하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축출대상이 된다.
11월 5일 백남기 농민 민주사회장을 시작으로 광장의 힘은 다른 수위로 진화해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고 한국사회를 변모시킬 것이 분명하다. 이후 1주일은 격동의 시간이다. 11월 12일, 우리는 시민혁명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경험하게 될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시민들 앞에서 경찰은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더는 퇴로가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11월, 한기가 몰아치는 계절에 명예로운 시민혁명의 장이 펼쳐진다. 분노와 불안을 넘어서서 거대한 축제가 벌어질 것이다. 새로운 민주정부의 역사를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이다. 가자, 모이자, 그리고 바꾸자. 우리가 국가의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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