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저녁, 촛불 행진을 하던 홍익대학교 학생들이 걷고 싶은 거리 공터에 자리를 잡았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이들의 구호에, 시민들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지켜봤다.
멀찍이서 집회를 바라보던 대학생들이 수군댔다. "박근혜 여론 조사 20대 지지율 1%대 찍었대." 옆에서 듣던 학생들이 경악한 표정으로 "뭐?"라며 되물었다.
이날 여론 조사 전문 기관 리얼미터의 조사 결과,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10.9%를 나타내며 또 다시 최저치를 경신했다. 가장 놀라운 수치는 2030세대의 지지율이었다. 30대는 3.1%(부정 평가 93.7%). 20대는 1.6%(부정 평가 85.7%)였다.
그들에게 다가가 물어봤다. 이 여론 조사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1.6%면 거의 아무 의미 없는 수치잖아요. 솔직히 제 주변에서 지금 박근혜 지지한다고 하는 애들 아무도 없을걸요? 아마 (박 대통령을 지지한다고 하면) 맞을걸요? 0%라고 아닌 게 다행인 거죠. '핵노답'이잖아요. 세상에 이런 대통령이 어딨어요."
'신촌 라인'의 한 대학교에 다닌다는 이대희(24) 씨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옆에서 그의 얘기를 듣던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 한 명이 대선 때 박근혜 찍었었다고 엄청 놀림받아요. 예전에 그 친구한테 왜 박근혜 찍었냐고 뭐라고 할 땐 그 친구도 욱했는데, 요샌 놀려도 아무 말도 못 해요. 짜증 내면서 '투표 폭망했다'고 해요. 그게 저희 첫 투표였잖아요."
박근혜 대통령과 비선 실세 최순실, 그리고 그와 함께 얽히고설킨 이들의 막장 정치극은 '정치적이지 않은' 20대까지 움직이게 만들고 있다.
이 집회에서 자유 발언에 나선 한 홍대 학생은 "저도 정치적인 이슈에 나서는 편이 아닌데 너무 명백하다. 두렵다. 저 사람들(최순실 게이트 연루자들)이 저러고도 잘 살까 봐 무섭다"고 했다. "설마 대통령씩이나 된 사람이 그럴까 싶었는데, 이제는 설마란 게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나도 연설문 쓸 땐' 이정현 발언에 여당 궤멸 직감"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찍은 20대는 33%였다. 그들마저 돌아선 까닭은 무엇일까.
3일 동국대학교에서 만난 박모(25) 씨는 그 33%에 해당한 '소리 없는' 박근혜 지지자였다. 박 씨는 박 대통령이 과거 보여준 강한 리더십 때문에 지난 대선에서 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다고 했다.
"사람들이 박근혜가 대통령 되면 독재할 거라고 반대했지만, 저는 생각이 달랐거든요. 이미 어느 정도 형식적으로 민주주의가 갖춰져 있기 때문에 독재는 쉽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리더십도 없고 능력도 없는 이도 저도 아닌 야권 주자들이 될 바에야..."
그는 그러나 이 정권이 이렇게 한 순간에 무너지게 될 줄은 몰랐다고 했다.
"이게 누가 감싸 안는다고 해결이 되는 것도, 안 터질 것도 아닌 문제였던 것 같아요. 비선 정치는 어느 정권에나 있겠지만, 일개 민간인한테 연설문을 다 뜯어고치게 하고 국가 기밀을 다 들여보게 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잖아요."
그는 박 대통령에게도 실망했지만,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에게 더 큰 실망을 했다고 했다.
"이정현 대표가 자기도 연설문 쓸 때 친구한테 물어본다는 식으로 얘기했잖아요. 그걸 보고 '이러다 여권이 궤멸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 같은 '젊은 보수'는 야당이 지금까지 했던 '떼쓰기'를 싫어하거든요. 여당이나 대통령이 뭐 하자고 할 때마다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고, 주장이 논리가 맞든 아니든 일단 억지부터 쓰는 모습이 싫은 건데, 이정현 대표 하는 게 딱 억지잖아요.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얘긴지 아마 본인도 알거예요. 그런데도 대통령 도와준답시고 말하는 걸 보고 이건 진짜 아니구나 싶었어요. 얼마 남지 않은 여권 지지자들도 다 떨어져나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년 대선 때 박 씨는 과연 어디에 표를 던지게 될까.
"문재인이나 안철수, 박원순을 넘는 지도력과 능력을 갖춘 사람이 나온다면 모를까. 아직 야당을 찍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런데 남은 1년 동안 여당에서도 이렇다 할 대안이 없고, 또 여권 전체적으로 지금처럼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땐 저도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어요."
"이런 상황에 학교를 가도 되나 싶다"
대학생들은 요즘 공부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도승범(20) 씨는 "아침에 학교 오는 지하철에 서서 손잡이를 잡고 동대입구 안내 음성을 들으면서 '내가 어떻게 이 상황에 학교를 가나', 대통령이 친구 의리 지킨답시고 아무렇지 않게 주권을 내동댕이치는 상황에... 이런 생각이 든다"라고 했다.
그는 "'적당히 모른 척하고 살아야 한다'는 '헬조선' 마인드 때문인 것 같다"며 "'그분'들도 민중이 '개돼지'니 배고파지면 주인 품으로 돌아오겠지 하는 안일한 인식을 갖고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지금의 20대는, 대학생은, '적당히 모른 척하고 살기'조차 지쳤다고 아우성치고 있다.
2일 광화문광장에서 만난 이화여대생 이모(21) 씨는 '박근혜 퇴진 전국 대학생 시국 회의' 기자 회견에 참가한 최은혜 이대 총학생회장의 발언을 경청하고 있었다.
이 씨는 "하루라도. 한 시간이라도 정유라, 최순실 이야기를 안 하는 때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정 씨와 동갑이라는 이 씨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열 받는 일이다. 우리는 그렇게 기를 써서 공부하고,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좋은 대학 못 가는 친구들이 널렸는데, 정유라는 부모 잘 만나서 별 노력도 안 하고 많은 걸 누리게 되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이대생들은 요즘 '고구마 캐려다 무령왕릉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정유라 씨 특혜 의혹에서부터 밝혀진 최순실 씨 문제가 국정 농단 문제로까지 번진 것. 이 씨는 이에 대해 "우리가 역사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고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애초에 있어선 안 될 일이었고 또 언젠간 밝혀졌을 일"이라고 했다.
"박근혜는 욕해도 '여자 대통령' 욕은 안 했으면"
거리에서 만난 20대 대학생들은 '최순실 게이트' 관련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을 물으면서도, 본질 흐리기식 발언이나 보도는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씨는 "제가 박근혜를 찍은 건 아니지만, 기왕 됐으니 첫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게 사실인데, 결과적으로 결말이 좋지 않아 안타깝다"면서 "최근 정국 관련해서 '여자 대통령은 안 돼'라는 식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데, 이건 아닌 것 같다. 박근혜 욕은 해도, 여자 대통령 욕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동국대생 김요한 씨도 "지난 집회 때 이재명 성남시장이 '아녀자', '강남 아줌마'와 같은 말을 썼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여자라서 이 나라가 개판인가. 왜 이상한 방향으로 말하나. 우리는 헌법 정신을 지키기 위해 나온 거지, 여자를 혐오하기 위한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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