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궁지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이 또 한번 휘청했다. 2일 김병준 국민대학교 교수를 국무총리에 지명했으나, 김 교수가 입장 발표를 보류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대통령이 총리직을 발표했는데 당사자가 입장 발표를 보류하는 것은 그간 전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김병준, 기자회견 하며 엉뚱하게도 "소감 아니고, 얘기 들으러 왔다"
1주일 전에 총리직 제안을 받았다는 김 교수가 입장 발표를 갑자기 유보하면서 김 교수의 총리직 제안 거부 가능성이 부상하고 있다. 김 교수가 총리직 제안을 거부하면 청와대는 또 한번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실제 김 교수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총리 내정 소감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소감을 준비해서 말씀드린다기보다, 이런 저런 분들, 기자분들, 그동안 저랑 일해봤던 분들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고 엉뚱한 발언을 했다. 야당에서 임명 절차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지적에 "그 부분도 내일 말씀드리겠다"고 함구했다.
총리직 수락 여부 자체까지 포함해 주변 의견을 듣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국면 전환용 카드로 과거 정부에 몸 담았던 인사를 천거했지만, 야당은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한목소리로 '하야'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와 가까운 김 교수를 영입해 야권 분열을 유도하겠다는 전략도 거론됐지만, 지나치게 뻔한 전략이라는 지적과 함께, 김 교수 본인이 야권에서 그리 명망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 등으로 오히려 야권의 결집도는 더욱 강해지고 있는 셈이다.
김 교수 영입 배경에 이같은 정무 기획이 자리하고 있다면, 기획자는 아마추어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전반적으로 정무 컨트롤타워가 엉망이라는 말이다.
김 교수를 잘 아는 인사는 현 상황을 김 교수의 '권력욕'으로 설명한다. 참여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해 김 교수를 잘 알고 있는 한 인사는 "김 교수가 박근혜 정부 초대 총리로 일각에서 강력히 추천돼 상당히 큰 기대를 가졌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초대 총리'가 아니라 '마지막 총리'라는 독배 앞에 섰다.
청와대·정부 분열, 야권은 오히려 결집…정무기획이라면 처절한 실패
청와대와 정부 안에서도 분열상이 엿보인다. 심지어 황교안 국무총리조차 김 교수의 총리 내정 사실을 몰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은 "오늘 아침 황교안 총리를 만났고,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와는 신라호텔에서 얘기하다 함께 차 타고 국회까지 왔는데 그분들도 총리 내정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다.
황 총리가 김 교수 총리 내정 발표 직후 이임식을 공지한 것도, 불만을 표출한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청와대와 정부 내부에서조차 갈등설이 불거지고 있는 셈이다. 김 교수가 두 차례나 기자회견 시간을 바꾸고, 정작 기자회견장에서 "내일 입장을 발표하겠다"고 말한 것도 여권 내부의 혼돈상을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김 교수가 청와대에 제안했다는 총리직 수락 조건들이 나돌고 있다. 국면전환용으로 박 대통령이 급하게 김 교수 총리 지명 사실을 밝혔으나, 김 교수와 청와대, 김 교수와 박 대통령 간 '대외 발표용' 의견 조율조차 이뤄지지 않았다는 관측이 나온다.
김 교수가 추천했다는 박승주 전 여성가족부 차관에 대해서도 뒷말이 나온다. 청와대는 김 교수 인사를 발표하면서, 김 교수가 노무현 정부 말에 여성가족부 차관을 지냈던 박승주 전 차관을 국민안전처 장관을 박 대통령에게 추천했다고 모양새를 갖췄으나, 박 전 차관은 본래 여권 성향이 강한 인사다.
박 전 차관은 세종로국정포럼이라는 사단법인의 이사장을 맡고 있는데 이 단체는 현직 관료 등 친여권 성향 인사들의 국정 과제 강연을 주로 개최한다. 지난 10월 20일에는 고영선 고용노동부 차관이 '4차 혁명과 일자리' 라는 주제로 강연을 열었다. 이 주제는 박근혜 정부의 핵심 과제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주로 현 정부 장차관급 관료들을 초청해 정부 정책에 대한 설명을 듣는 방식의 포럼을 자주 여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차관은 현 정부의 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인사로 분석된다. 김 교수가 박 전 차관과 가까운 사이라고 밝히긴 했지만, 이런 인물 수준이라면, 김 교수 본인의 '안목'에도 의혹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설상가상으로 이날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이 청와대에서 옷을 벗은 지 사흘 만에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 대상 기업들과 접촉했다"고 폭로했다. 박 대통령의 최측근조차 사흘 만에 돌아선 셈이다.
'난파선'에서 핵심 항해사들이 속속 뛰어내리고 있는 상황인데, 과연 김 교수가 박 대통령의 임명장을 받아쥘 수 있을지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물론 그에 앞서 국회 청문회 통과도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김 교수가 오는 3일 총리직 수락 입장을 밝히든, 거부 입장을 밝히든, 컨트롤타워를 잃은 정국은 또 다시 혼돈 속으로 빠져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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